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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건국사)번외 67편: 명 요동총병 장승윤의 청나라 기록서의 이름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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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출처 : 칼부림

 

 

 

 

장승윤(張承胤)은 1610년대 당시 명나라에서 요동총병으로 일했던 무장이다. 그는 1615년 음력 6월 당시 조정의 명을 받고 명-건주간 요동 경계를 순시한 뒤 건주측에 범하, 채하, 삼차아 지역서 철거할 것을 요구하여 누르하치를 분노케 했으나 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여 건주가 일시적으로 영역을 철퇴하게 했다. 1618년에는 드디어 칠대한을 선포하고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누르하치의 친정군과 맞붙었다가 대패, 현장에서 전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장승윤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목숨을 잃은 명나라의 총병급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며, 해당 전투로 말미암아 후금이 명을 상대로 자신감을 크게 얻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청의 실록에서는 장승윤이 최초 실록인 무황제실록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장승음(張承廕, 혹은 張承荫)으로 기록되었기에, 보통 실제 인명인 장승윤 대신 장승음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서술되고, 호칭되어왔다. 이는 비전문가뿐만이 아니라 전문가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명기 교수 역시 본인의 논설에서 장승윤을 장승음으로 호칭했던 사례가 존재한다.1


청의 사료문이 명청전쟁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기본 뼈대가 되는 만큼 이러한 청의 사료로 인한 인명오인, 기술이 자주 발생하지만 인명의 경우 본래의 인명으로 기술하는 것이 보다 좋은 서술 경향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장승윤은 청의 기록에 실려있는 '장승음'이라는 이름 보다는 본래 이름인 '장승윤'으로 올바르게 서술 혹은 호칭하는 것이 좋은 서술 경향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청의 사료에서는 어찌하여 장승윤을 장승음으로 기록한 것일까? 사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청의 최초의 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무황제실록2에서는 장승윤은 본래의 이름대로 장승윤(張承胤) 혹은 중간의 글자인 승(承)이 수(守)로 변형된 장수윤으로 기록되었다.3후자의 이름의 경우 오기라고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전자의 경우를 살펴보건대 확실히 장승윤의 이름은 본래의 본인 이름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건륭본 고황제실록을 비롯하여 건륭제 시기에 완전히 편찬이 완료된 명나라에 관련한 기전체 사서인 명사, 청초 역사를 다룬 황청개국방략, 만주실록등의 사료를 살펴보자면 해당 사료들에서 장승윤의 이름은 모두 장승음으로 수정되었다.4 건륭제 시기에 편찬된 수많은 사서들에 장승음이라는 이름이 실리면서, 장승윤의 이름은 '장승음'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옹정~건륭 시기 혹은 그 이후에 편찬 혹은 수정된 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발현된 이유는 다름아닌 옹정제 때문이다. 옹정제의 본명이라 할 수 있는 만문 이름은 아이신교로 인전(aisin gioro in jen)이다. 그런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애신각라/혹은 애신교라 윤진(愛新覺羅 胤禛)이 된다. 옹정제의 이름은 황제의 이름이기 때문에 피휘의 대상에 속하게 되는데, 여기서 한문표기된 옹정제의 이름의 구성글자 윤(胤)은 장승윤의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 윤(胤)과 일치하게 된다. 그 때문에 장승윤의 이름은 피휘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그로서 그 이름이 장승음으로 개칭된 것이다. 


그렇게 장승윤은 옹정~건륭 시기에 편찬된 모든 사료에서 이름이 장승음으로 개칭되었으며 우리에게 있어서 본래의 이름보다도 피휘된 이름인 장승음으로 훨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장승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사르후 대전 당시 조선군의 도원수로 전역에 참전한 강홍립 역시도 무황제실록에서는 그대로 강홍립(姜弘立)으로 기록되었으나 이후 사료에서는 이름이 개명표기되어 건륭본 고황제실록에서는 강굉립(姜宏立), 건륭본 만주실록 한문본서는 강공립(姜功立)으로 기록되었다. 강홍립의 경우 중간의 글자인 '홍(弘)'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건륭제의 이름의 한문표기 피휘에 걸렸다. 건륭제의 한문이름은 애신각라/애신교라 홍력(愛新覺羅 弘曆)이었는데 여기서 '홍(弘)'은 강홍립의 이름을 구성하는 홍과 일치했다. 그로 인해 강홍립 역시도 이름이 변형기록되었다.5

 

 

1.한명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2)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Ⅳ, 서울신문, 2007

2.그 이전에 삽화로 그려진 태조실록도가 존재하긴 했으나 여기서는 제외한다.

3.무황제실록 을묘년 음력 6월, 무오년 음력 4월 21일

4.고황제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4일, 명사 권 239 장승음 열전, 황청개국방략 권4 乙卯年夏四月拒明使臣索田明廣寧總兵張承蔭, 만주실록 천명 3년 4월 21일

5.다만 청태종실록의 일부 판본서는 강홍립의 이름이 제대로 피휘되지 않은 경우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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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qnLw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