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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생 아저씨 넋두리 한 번 들어주실래요?

저는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월남전에, 그것도 두 번이나 갔다오셨거든요.
다행히 살아 돌아 오셔서 제가 태어났어요.
일곱살 되던 해 1월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해 10월에 박정희가 죽었어요.
대통령이 죽었단 소식에 엄마랑 형이랑 저랑 손 붙잡고 울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흘린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흑백테레비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어깨에 번쩍번쩍 별을 달고 나와 지도를 짚어가며
북괴의 지령을 받은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떠들더군요.
그무렵 흑백테레비에는 번쩍번쩍한 아저씨 말고도
똘이장군이라는 소년이 맨몸으로 총을 든 늑대무리와
거대한 돼지를 쳐부수는 만화도 나왔어요.
그래서 저는 김일성이 거대한 돼지이고
북한 인민군은 머리에 뿔 달린 늑대들인 줄 알았어요.
시간이 흘러 저도 중학생이 되었어요.
그사이 흑백테레비는 칼라테레비로 바뀌고
번쩍번쩍 아저씨는 대통령이 되었어요.
여름방학 때 집에 온 대학생이 된 큰형이 이상한 소릴 하는 거예요.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며 대통령 각하를 욕하는 거예요.
저는 큰형이 빨갱이가 된 것 같아 무서웠어요.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을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대신 뽑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했는데,
큰형은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뽑는 게 맞는 거래요.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이 도탄에 빠진 우리 국민을 위해
구국의 결단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데
큰형은 군인이 나라는 안 지키고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욕했어요.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라서 처벌할 수 없다고 배웠는데,
큰형은 군인이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건 범죄랬어요.
저는 조만간 형 머리에서 뿔도 나고 늑대로 변할까봐 무서웠어요.
1987년 6월이 되었어요.
칼라테레비에선 대학생 형, 누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만 하는 게 나왔어요.
자꾸 누구를 살려내래요.
어느날엔 서울시청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대학생 형, 누나들 뿐 아니라 양복 입은  아저씨들도 많이 보였어요.
그리고 주변 빌딩에서 휴지를 막 던졌어요.
나는 변소에 가면 공책 찢어서 비벼서 닦는데,
그 아저씨들은 휴지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막 던졌어요.
그러다가 부처님 귀 같은 아저씨가 무슨 발표를 했어요.
그리고, 많은 것이 변했어요.
대통령은 똑똑한 사람들이 대신 뽑아줘야 한다던 선생님이
드디어 대통령을 우리가 직접 뽑게 됐다고 기뻐하셨어요.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라던 선생님이
군인은 나라 지키는 일 외에 권력을 탐해서도 안 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댔어요.
어느날엔가는 아침에 싸이렌이 울리고 묵념을 하래요.
독재정치에 반대한 학생들이 떨쳐 일어나 의거를 일으키고
나쁜 대통령을 쫓아낸 날이랬어요.
그때 4.19를 처음 알았어요.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어요.
우리를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라고 가르치고
대해주던 선생님들이었어요.
그 선생님들이 쫓겨나면 학교에는 무서운 선생님들만 남아요.
비싼 리바이스 청바지 입었다고 허벅지가 터질 정도로 때리고,
수업시간에 쓸데 없는 질문 한다고 코피가 나도록 때리고,
캐비넷에 회초리 부터 각목에 야구배트까지 종류대로 걸어놓고
학생들을 쥐어패고 다니는 선생님들만 남는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 쫓아내지 말라고,
좋은 선생님들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선생님들과 함께 싸웠어요.
전교조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우리나라를 좌경화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한 게 아니고,
그저 학생들을 사람으로 보고 인격적으로 대하자고,
아이들은 시험점수 생산해내는 기계가 아니라고,
아이들을 정답 맞히는 기계로 만들지 말자고 시작한 거예요.
대학생이 되었지만 성적 맞춰 온 학과라 공부에 뜻이 없었어요.
직업군인이 되기로 하고 부사관으로 갔어요.
그사이 대학 동기들은 군대도 갔다 오고 복학해서 졸업할 때가 됐어요.
4년제 대학교만 졸업하면 대기업에서 어서옵쇼 할테니 큰 걱정은 없었어요.
그런데,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요.
나라에 돈이 없어서 부도가 났다는 거예요.
절대 망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대기업들이
날마다 몇개씩 무너졌다는 뉴스가 온나라에 가득했어요.
졸업하고 취직했던 91학번 선배들은 회사가 없어지거나,
채용이 취소되거나, 발령이 안 나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 동기들이 졸업할 쯤엔 아예 신규채용을 안 했어요.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학교에 남았어요.
학교에 남을 수 없었던 친구들은 전공과 아무 상관 없는 곳으로 갔어요.
그래서 저희 동기들 중엔 석,박사도 많고
보험 영업, 자동차 판매 영업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토목기사 자격증을 가진 친구들이 보험 팔러 다니고 자동차 팔러 다녀요.
그런 저희가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 있겠어요?
그 치열했던 삶을, 하루아침에 좌파라고 매도하고
빨갱이라고 무시하는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우리가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어요?
일하다가 죽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연대해서 만든 노조를 두고
귀족노조라며 깎아내리는 국민의힘을 저희가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어요?
저희는 민주당 콘크리트가 아니에요.
그때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군인이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고,
헌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바꿔 독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말 안 듣는다고 붙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하던,
그 야만의 시대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막걸리 마시다 울분에 차서 대통령 욕 한마디 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시키는
그 폭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학생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가르쳤다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선생님들을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발견 됐다며
우리 국민들을 광우병으로 다 죽일 거냐고 선동하더니,
대통령 바뀌자마자 좌파들이 광우뻥 선동한다고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는 조중동 같은 쓰레기를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뼈가 바스라지도록 일하고 돈도 못 받아도
어디 하나 하소연 할 데도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 자식들이 그런 정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반대하는 거예요.
페미니즘이 그렇게 싫고, 여가부가 그렇게 불만이면
남성부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될텐데,
여가부폐지 한마디에 홀려 대한민국의 인권을
여러분 스스로 후퇴시킨 거예요.
윤석열이 잘못하면 끌어내리면 된다구요?
여러분이 윤석열 끌어내리자고 싸울 때,
과연 우리 세대들이 여러분과 연대를 해줄까요?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눈물로 호소한 걸 두고
꼰대라고 손가락질 받은 저희가
기꺼이 여러분의 어깨에 손을 올려줄까요?
민주당 콘크리트라고 무시 당하고
대깨문이라고 조롱 받던 저희들이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손을 잡아줄까요?
제 답은… 그때 가봐야 알겠다입니다.

댓글
  • 암흑행자 2022/03/11 12:15

    힘내서 이겨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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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규 2022/03/11 12:19

    님아.............우리 힘들지만 우리는 이겨냈어요
    독재정치에 피흘린 민주화운동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끌어 왔어요
    지금은 아마도 친일기득권세력과 맞서야 할것 같네요.....
    정치개혁으로  기반을 다져야 할것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은 드물지만 뻔뻔한 정치인은 많습니다..
    우리 모두 힘내구.......검찰에서 영웅이 나오길 바랍니다............

    (c1YBIU)

  • 유겐 2022/03/11 12:25

    연대의 고리를 끊어버린게 실감나고 그걸 해낸 저 무리들이 활개칠거 생각하니 맘이 아프긴하네여
    같이 촛불들었던 지인들도 이젠 먹고 살 터전 능력 갖췄으니 각자도생들 하겠답니다
    일본처럼 이제 무관심의 시대로 접어드는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글 잘읽었습니다..

    (c1YBIU)

  • Sarasate- 2022/03/11 12:30

    아… 씨바…
    충격받아서 출근도 못하고 있는데
    이형 눈물나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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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세 2022/03/11 12:30

    같은 또래의 같은 고민
    깊이 공감합니다

    (c1YBIU)

  • Littlebboy 2022/03/11 12:33

    정말 이글이 우리세대가 해주고 싶은 말이네요..공감합니다

    (c1YBIU)

  • 영원3757 2022/03/11 12:38

    글 진짜 잘 쓰시네요
    한숨에 다 읽었습니다

    (c1YBIU)

  • C앤C적색경보2 2022/03/11 12:39

    Easy come easy go..
    그들은 공짜로 민주주의 얻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함을 잘 모르죠. 민주주의가 독재와 대립관계인데 공산주의와 대립 되는걸 알고 있고요.

    (c1YBIU)

  • X391 2022/03/11 13:01

    패미니즘 자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20남성전체를 타켓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문제인듯...
    어른이됬다고 자유를 느낄 만킥하고 싶은 나인데, 인터넷등에서 즐겨보는 사이트나 등등을 만리방화벽 같은 거로 막았으니 열받을 수도..
    20들도 문정부에 투표했는데, 자신이 선출한 정부가  패미를 위해 남성인 자신의 행동에 제제를 하니 기분나쁘고 지지한 것이 후회되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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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으른낙타 2022/03/11 13:05

    다른 건 몰라도 20대30대가 누리는 근로 환경은 거저 얻은 게 아닙니다. 70년대생만해도 회사에서 날밤 세우는 거 허다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동기들끼리 그냥 창고나 컨테이너 빌려서 짐 넣어놓고 사는게 낫겠다고 했었죠. 월세가 너무 아까와서요.  지금 같은 근무 환경은 꿈도 못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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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wanyee 2022/03/11 13:16

    73년 동갑입니다.
    헛헛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했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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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마리★ 2022/03/11 13:25

    저랑 연배가 비슷하시네요.
    저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랑 도덕 선생님
    진짜 수업도 잘 가르치시고 아이들 예뻐하시던 분들인데
    어느날 교문 지나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막더라고요.
    알고보니 전교조 소속......
    아이들은 선생님 돌려달라고 울고
    선생님들은 아이들 부르며 울고
    결국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분들을 다시 뵐 수 없었죠.
    저희 동년배들 역대급 대학원 진학도 충격이었네요.
    취업 확정되었던 동기들 줄줄이 입사 취소돼서
    아침에 학교 가면 게시판 보며 펑펑 우는 동기도 있었고
    진짜 졸업식 분위기 엄청 우울했었습니다.
    아버지는 20년 근속으로 받은 황금 열쇠도 헌납하고
    회사 살리기 위해 평생 다니신 직장 그만두셨고...
    믿고 있던 것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어요.
    외환 위기 터지고 머지않아 남편 실직했던 건 덤이고
    하루 아침에 자식 잃고 우는 부모의 울음소리 들어봤나요?
    실시간으로 아이들 수장되는 장면 본 적 있습니까?
    내 조카랑 비슷한 연배의 군인들이,
    수학여행 간 내 자식 뻘 아이들의 죽음을 밝혀달라 하니
    돌아오는 건 빨갱이라는 비난과 조롱뿐이었죠.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산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겁니다.
    언젠가 삼풍백화점 자리를 지나가는데
    그 자리에 있는 서초동 아크로비스타ㅋㅋ
    정작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비는
    집값 떨어진다고 양재 시민의 숲에 세웠죠.
    이게 현재 대한민국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c1YBIU)

  • 두마리스 2022/03/11 14:46

    86학번입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86부터 87까지 폐가 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었는데
    학교 안까지 백골단들이 학생들 잡으러 뛰어다니고
    여학생들에겐 성희롱하고
    제적 당할 각오 하면서 전공 시험 거부하고
    남학생들 잡으면 강제로 군대 보내고
    88 올림픽때는 휴교령까지 내려서 한 달 동안 시위 못하게 막고... 그 시절이 이렇게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건
    아마도 어게인 80년대 일 듯 해서 인 듯 합니다.
    과연 검찰공화국에서 예전처럼 시위를 할 수 있으려나 싶지만......

    (c1YBIU)

  • 젠커 2022/03/11 15:02

    같은 73년생입니다  아직은 울지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좋은글에  위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c1YBIU)

  • 후포등대 2022/03/11 15:10

    나를 토해 베오베

    (c1YB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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