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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시대에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위인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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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그로스쿠르트(Helmuth Groscruth)

1898년 12월 16일 독일 뤼덴샤이트 출생

 

 그는 신학자이자 법학자였던 아버지 라인하르트 그로스쿠르트는 지난 대전에도 참전한 경력이 있던 참전용사이자 나치의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던 인물중 하나였으며

헬무트 그로스쿠르트 또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애국자이지만 나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던 당대의 평범한 독일인으로 성장하였고

1924년부터 5년간 에르빈 폰 비츨레벤의 부관으로 활동하며 비밀리에 소극적인 반나치 행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는 반히틀러 성향의 독일 정보국 Abwehr(압베어)의 정보국장 빌헬름 카나리스의 밑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에르빈 폰 비츨레벤과 빌헬름 카나리스 모두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가담한 반나치 일원들이었다)

1939년 12월, 그는 점령당한 폴란드 지역을 여행하던 중 나치가 저지른 잔학행위를 문서화한 보고서와 메모를 동료들에게 전달하여 반나치 행위의 정당성을 설득하였지만

오히려 그의 행동은 나치당과 히틀러를 분노하게 만들어 그를 믿고 지지해주던 전우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하던 그로스쿠르트는 정보국에서 퇴출당한다

 

이후 프랑스 전선으로 재배치되었고,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제6군 11군단 295 보병사단의 참모로서의 우크라이나에 당도하였지만

 운명의 1941년 8월, 그는 그곳에서 지금껏 목격한 적이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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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체르크바 난민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두명의 유대인 고아. 1941년 8월 8일

 

 

그의 소속 부대인 독일 제6군, 그리고 나치 친위대 소속으로 인종학살을 저지르던 특무대(EinsatzGruppen)는 우크라이나의 소도시 '빌라 체르크바'를 무력 점령하고

그 곳에서 사로잡은 90명의 유대인 아동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고 그로스쿠르트가 속해있던 11군 295사단이 이 학살작전을 지원한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당시 6군의 책임자였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사후 그들을 맡은 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다)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을 지키려는 그로스쿠르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집단에 비해서 한없이 약한 그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인종정화' 준비가 완벽하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즉시 빌라 체르크바 내의 90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납치해와 폐건물에 감금시켰다

 

이런 아동학살에 반대하는 채플린 에른스트 테베스와 게르하르트 빌크체크는 즉시 그로스쿠르트를 도와 학살을 중지시키려 노력했지만

단지 '인종정화'를 위한 작업이 완벽하지 않다는 통보를 받으며 학살을 유예하겠다는 소식만이 그들을 절망시킬 뿐이었다

 

학살을 유예하겠다며 방치된 폐 건물 안에서 90명의 아이들은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감금된 채 공포와 굶주림에 맞서야했으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로스쿠르트와 일부 채플린들은 지속적으로 지휘부에 항의를 하며 학살을 막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잔인한 나치가 고대하던 그 시간이 왔고 90명의 아이들은 1941년 8월 21일 목숨을 잃었다

 

그로스쿠르트는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학살 직전의 상황, 학살 과정, 그 이후의 모든 것들을 문서화하여 자칫하면 잊혀질 수 있었던 이 끔찍한 사건을 기록에 남겼으며

그가 죽기 직전 남겨놓은 유산은 훗날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서 나치전범을 처벌할 증거로 활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스쿠르트는 이러한 불온함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나머지 좌천당하는 것이 아니라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그의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고

그는 결국 차가운 러시아의 한파 속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 패배와 함께 소련군의 포로로 잡히는 안타까운 결말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가 막바지에 다달은 1943년 2월 2일, 생포되기 직전 독일육군에게 Lang lebe Deutschland(독일이여, 영원하라) 는 통신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43년 4월 7일 포로수용소에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44세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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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아달베르트 호젠펠트 (Wilhelm Adalbert Hosenfeld)

 

1895년 5월 2일 독일 헤센 출생

 

그는 그로스쿠르트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신학자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복지, 프로이센식 순종, 애국에 관심이 많은 당대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후에 만나게 될 인생의 동반자 안네마리 크룸마허와 당시 나치식 규율과 억압에 반대하던 시민운동에 영향을 받아 평화와 박애를 배우게 되었다

 

당시 그는 다른 독일인과 다를 바 없이 지난 대전에도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도 수여받은 참전용사이자 애국자였고,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하던 과거가 있었지만

나치당의 인종차별과 소수자 박해에 환멸을 느껴 나치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며 괴로움에 몸부리치던 시간이 많았음에도

그런 그에게 배우자 안나마리는 언제나 사랑과 지지를 보내왔고, 호젠펠트는 아내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전쟁기간동안 핍박을 받던 피해국들을 돕기 시작했다

 

호젠펠트는 조국에 부끄러움을 느꼇으며, 자신이 근무중이던 독일령 폴란드에서 폴란드인들에게 동정심을 느꼇다고도한다

 

그는 폴란드어를 직접 배워 많은 폴란드인들과 신분을 넘는 우정을 쌓았고, 대위라는 자신의 직위를 남용하여 폴란드 전쟁포로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하거나

정치적으로 박해받던 반나치 인사들을 남몰래 돕는 것은 물론, 때로는 독일인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폴란드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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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 

 

 아마 호젠펠트의 수많은 선행 중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례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이었던 폴란드의 음악가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일 것이다

호젠펠트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의 박해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가족을 잃고 홀로 폐허 속에서 숨어살던 슈필만을 발견하고

그가 전쟁이 끝날때 까지 안전하게 머물수 있도록 그의 신변을 보호한 덕분에 슈필만은 종전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오로지 그와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자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치독일 패망 이후 호젠펠트는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작은 도시 블로니에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고, 그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6년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이 구한 유대인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연락을 해주어 자신을 석방해주길 고대했지만,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고

빌헬름 호젠펠트는 포로수용소에서 소련군의 고문으로 뇌혈관이 파괴되고 그 후유증인 대동맥 파열로 1952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난다

 

이는 스필만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실화이며 폴란드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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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욘 하인리히 데틀레프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

 

1882년 11월 23일 함부르크 출생

 

전쟁의 불길이 그의 코앞까지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굴지의 대기업 지멘스 사의 인정받는 직원이자 선망받는 나치당원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이웃들에게는 모날 것 없는 대머리외국인일 뿐이었던 그의 인생의 변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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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꼐 찾아온 1937년 12월의 어느날이었다

 

중일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나치독일은 오히려 중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욘 라베는 히틀러가 일본에게 압박을 넣어 전쟁을 막을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히틀러는 일본의 만행에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중국은 세계사회에 고립된 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본군의 공세에 수도 난징을 허무하게 내주고 만다

 천황의 자식이자 그 어떤 인종보다 우위에 서있다고 믿는 일본군은 그런 자신들을 막아선 난징의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 곳에서 감히 입에도 담기 힘든 끔찍한 대학살의 서막이 욘 라베의 두 눈앞에 여실히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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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민간인 무리에 숨어든 중국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과 중국군을 가리지 않고 무참히 학살하는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였고

 수천명에 달하는 난징의 여자들이 일본군에게 집단윤간을 당하고 그대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난징 시내를 가득 채웠고, 난징의 부둣가는 시체들로 인해 붉은 핏빛이 투명한 강물을 대신하고 있었다

 

 욘 라베는 이런 끔찍한 참극을 막아달라고 히틀러에게 호소했지만 정작 히틀러도 5년 뒤 똑같은 일을 벌일 작자라...

 

결국 욘라베는 스스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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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욘 라베는 아직 난징에 남아있던 15명의 유럽 선교사들과 함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난징 안전 국제 위원회를 조직,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서 조성된 난징 안전 구역에

대피해온 시민들을 보호하였고, 더 많은 희생자를 요구하는 일본군 사절들을 물리치고 피난민들에게 물자와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초기에는 전쟁에 생겨난 전쟁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소수의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이 임시 위원회는

종래의 전쟁과 다른 일본군의 인종말살로 인해 희생자들이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피난민들이 늘어나자

사실상 수십만명의 난징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그 책임감과 숭고함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욘 라베는 자신이 독일 나치당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더 많은 희생자들을 내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둘 수 있었고

그가 일본군을 잡아두는 동안 약 20만여명의 난징시민들이 그 시간동안 난징 외부로 빠져나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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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욘 라베에서 전투로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시민들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자 일본 육군 항공대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궁여지책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펼쳐 그 아래에 시민들을 보호했던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군의 난징 폭격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 구역 방공호에 하켄크로이츠를 걸어두어 폭격을 막았다는 실제 일화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욘 라베 또한 다른 위인들처럼 좋지못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조국으로 귀국 후 '동맹 일본의 적은 곧 우리의 적인데 그들을 도운 반역'이라는 명목으로 SS에게 불이익을 받고 패전할 때까지 감시를 받았다

 

전후 그는 가난한 생활을 연명했으며 그의 업적을 잊지 않은 중화민국 정부가 보조금을 보냈으나

1950년 1월 5일 베를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거대한 국가의 악의에 맞선 나약하지만 의로운 개인의 선의다 

댓글

  • 마르군
    2021/06/28 06:57

    영원히 기억될 이름들

    (djy2Zw)


  • 환타포도맛
    2021/06/28 07:00

    지옥에도 의인은 있겟지

    (djy2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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