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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구출 작전, 그리고 비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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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로이센으로 이동중인 붉은 군대. 1945년 1월

 

붉은 군대는 지금까지의 수면을 끝내고 거대한 울부짖음과 함께 서부로 진격하고 있었고, 근대 독일인들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아리안 문화의 발상지인 동프로이센이 그 목표였다

독일의 추축동맹들은 하나 둘 연합국에게 백기를 들었고, 홀로 수백만의 붉은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독일의 전력은 동프로이센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1945년 1월, 소련의 160만 대군은 동프로이센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독일 방어병력은 손쓸 틈 새도 없이 궤멸당했고

스탈린은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 문제를 풀기위해 단숨에 시내 주위를 포위하고 독일의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잔존 병력 20만명과 수백만명의 독일 민간인들은 소련군이 퍼붓는 불바다에 의해 실낱같은 목숨을 버려가며

쥐구멍보다도 작은 보급로를 통해 하루 180g 미만의 빵을 배급받았으며, 이제 이들이 정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도시에 함락될 때 까지 굶어죽어가거나

살을 에는 강추위 속에서 비스와 석호의 빙판을 건너 필라우의 구난선을 타고 서부로 도망치는 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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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독일인들의 고향 동프로이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에 2,0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석호의 빙판을 건너 피난선에 탑승했으며

독일 전쟁해군 소속 칼 되니츠(Karl Doenitz)제독은 동 프로이센에 남아있는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국의 모든 군, 민간 선박들을 징발하였고

동 프로이센의 그디니아에 위치한 고텐하펜에 정박 중이었던 병원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를 즉각 이 작전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이 함선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하고, 동시에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해상 사고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는 지금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Wilhelm Gustl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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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부르크 항구에서 처녀항해를 시작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1938년 3월

 

 사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처음부터 전쟁해군의 병원선으로 이용되던 함선은 아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스위스에서 활동하던 나치당원의 이름을 딴 선전용 유람선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탄생했던 과거가 있다

나치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조된 만큼 25,000 t급의 거대한 선박이었고, 내부에는 1,500명의 승객들이 모두 안락함을 누릴 정도로

선박 내부 곳곳을 채우는 편의시설과 숙박시설이 설치된, 그야말로 인민을 위한다는 프로파간다를 가장 잘 나타내주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크루즈선으로, 길이 208m, 폭 24m, 수심 7m로, 선박 내부에는 계급 사회를 타파한다는 히틀러의 선전에 걸맞게

식당 2개, 강당 3개, 극장, 뮤직살롱, 체육관, 수영장 시설, 그리고 분만실과 객실 489개가 설치되었고

나치는 노동자들의 복리후생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조직된 Kraft Durch Freude (KDF 즐거움을 통한 힘) 선단에 소속되어

이런 초호화 유람선을 국가에서 직접 책정한 낮은 요금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나치당의 지지율을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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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Gustloff (1895.01.30 ~ 1936.02.04)

 

크루즈 선의 이름으로 쓰인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한떄 스위스에서 활동하며 친나치당 조직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총통이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자신의 가족도 죽일 수 있다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니던 골수 나치주의자였으며 

그는 1932년부터 나치당 스위스 지부의 당수직을 역임하다 1936년 2월 유대인이었던 다비드 프랑크푸르터엑게 암살을 당한다

 

그를 암살한 다비드 프랑크푸르터는 의대생 출신이었으며, 나치당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자 구스틀로프를 암살했으며

스위스 법정은 그에게 18년형을 선고하고, 복역 중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동시에 석방되어 이스라엘로 건너가 여생을 누리고 1982년 사망했다

 

아이러니 하게 총통과 나치당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스틀로프가 암살당하던 시기는 나치가 잠시 반유대주의 정책을 폐지했었던 1936 베를린 올림픽 시기와 겹쳐

그의 죽음은 잠시 묻혔고, 1년이 지난 1937년 건조중이었던 호화 유랍선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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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스페인 내전 종료 후 귀환하던 독일 콘도르 군단 병사들을 위한 복시시설이나

 Deutsche ArbeitFront (독일 노동전선)조합 소속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용하는 독일-남아메리카 행 정기 여객선으로 이용되며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았ㄷ

 

그러나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빌헬름 구스트로프는 여객선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독일 전쟁해군에 의해 병원선으로 징발되어

전장 이곳 저곳을 누볐고, 1940년 11월 20일에는 함체를 하얗게 재도색하여 병원선처럼 꾸미기도 하였다

 

이렇듯 구스틀로프 호는 약 1년 여간 전쟁해군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 발트해 주변을 맴돌았으나, 그 직후 고텐하펜 항에 입항한 후 1945년 1월까지 활동을 중지하였다

 

 

 

 

 

 

 

 

 

 

 

 

 

 

 

 

-Unternehmen Hanni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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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에 탑승 중인 피난민의 행렬을 그린 기록화

 

 1945년 1월, 붉은 군대는 이미 독일 본토 코앞 까지 당도하였고, 야포의 불길은 수없이 쾨니히스베르크 시내를 타격하고 있었다

이에 칼 되니츠 제독은 "작전명 한니발(Unternehmen Hannibal)"이라고 명명하고 즉시 피난민 구조에 착수하였고

한 떄는 전쟁해군의 병원선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오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프리드리히 페터슨(Friedrich Petersen) 선장의 명령을 받고 피난민들의 행렬에 당도하였다

 

공식적으로 제2잠수함훈련전대 소속 전쟁해군 장병 918명, 승조원 173명, 해군 여성 보조요원 373명, 부상병 162명, 민간인 4,426명으로 총 6,050명이 탑승하였지만

독일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피난민들이 구스틀로프 호에 함승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18살로 출납책임계 임용지원자였던 하인츠 쇤(Heinz Schoen)의 증언에 의하면 7,956명 부터는 종이가 바닥이 나 함승자 목록을 적지 못했다고 하였고

결국 정원을 한참 초과한 10,582명이나 되는 인원이 구스틀로프 호에 콩나물 시루처럼 발 디딜 틈도 없이 함에 올라타 함 내부는 온도와 습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함승자에게 지급된 구명조끼를 해제하지 말라는 병사들의 명령을 거부한 채 수많은 민간인들이 구명조끼를 벗었고, 이는 앞으로 있을 비극을 키우는 방아쇨 작용하고 말았다


구스틀로프 호는 1945년 1월 30일 잠수함사령부로부터 서부에서 활동하던 소련 소속 잠수함 3척이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전쟁해군 소속 어뢰정 Loewe의 호위를 받으며

구스틀로프 호는 모든 채비를 마치고 독일 본토의 킬 항구로 이동하기 위해 나섰지만 지휘부에서 큰 혼란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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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페터슨 Friedrich Peter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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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찬 Wilhelm Zahn

 

 

배에 탑승한 4명의 책임자 중 전쟁해군의 빌헬름 찬 소령과 최선임 상선사관 프리드리히 페터슨 선장은 함의 이동경로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대서양에서 유보트 함장 경력이 있던 빌헬름 찬 소령은 발트해의 항만 시설을 복구하여 다시 활동을 개시할 소련 잠수함과 대공 위협을 피하기 위해 육로와 가까운 곳에서

후퇴하는 아군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킬 항구로 이동해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반대로 페터슨 선장은 오히려 육로로 이동한다면 소련 기갑부대의 이동속도를 고려할때

적에게 더 쉽게 발각당할 위험이 있으니 수심이 깊은 곳에서 빨리 이동을 해 거리를 단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페터슨 선장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강추위 속에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 슈비네뮌데(Swinemuende) 부근 레바 북동쪽 28마일 부근 슈톨페방크(Stolpebank) 해안 구역을 출항한지 5시간 째 되던 시각

이때 기뢰부설함 1척이 구스트로프 호를 지워한다는 연락을 받고 어두운 밤, 자신들의 위치를 아군함에게 알리기 위해 항해등을 발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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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잠수함 S-13에 의해 격침된 빌헬름 구스틀로프

 

그러나 독일군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 1척의 소련 잠수함이 철수하지 않고 발트해에 남아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 소령이 이끄는 S-13 잠수함이 조국을 유린한 독일인에 대한 분노를 간직한 채 철수 명령도 거부하고 얼음장같은 바다 아래서 숨을 죽이며

희생양이 될 독일 함선이 자신들의 눈 앞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월 30일 밤 9시, S-13에게 포착당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2시간에 걸친 공격 준비 마친 잠수함의 어뢰공격에 의해 차가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S-13이 발사한 네발의 어뢰중 세발이 명중했고, 각 어뢰에는 '조국을 위해','스탈린 동무를 위해', '레닌그라드를 위해',' 소비에트 인민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어뢰 공격을 당하고 휘청이는 구스틀로프호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어뢰의 직접 공격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사람들이 갑판 위로 올라오며 혼란이 발생하자, 장교들은 민간인들을 객실에 감금하고 그 앞을 무기를 들고 지키기도 했으나 침몰을 막을 순 없었다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1시간 10분 후인 10시 10분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결국 구스틀로프의 승조원들은 구명보트에 아이와 군인들을 우선적으로 탑승시켰고, 극히 적은 수의 생존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 시기 발트해의 수온은 영하 16도 까지 내려가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고 있었고, 결국 9,434명들이 차가운 발트해 한가운데에 목숨을 잃었다

침몰 직후 퇴각하는 S-13를 추격하던 어뢰정 Loewe는 구조요청을 보내왔고, 근교에서 활동중이던 순양함 아드미럴 히퍼가 가장 먼저 1시 30분에 도착하였고

뒤를 이어 한니발 작전에 동원 되었던 다른 선박들이 도착하여 아직 바다 위 구명보트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 구조 작업을 실시하였고

 최종적으로 1,216명 (독일측 기록 1,252명) 만이 구조되어 슈비네뮌데와 콜베르크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후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 소령은 구스틀로프 호 격침 11일 뒤인 2월 11일에도 독일의 구난선 SS 게네랄 폰 슈토이벤(General von Steuben)호를 격침시켜

4,300명의 피난민 중 4천명이 사망하여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마리네스코를 독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타이타닉 호 사고의 6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어 최악의 해상 사고로 기록되긴 했으나,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깊게 파헤치려 들진 않는데

그 이유는 피해자가 추축국이었고, 전쟁 초기 나치스 또한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의도적으로 공격하여 5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이 있어

현대 독일에서 이 사건에 관여한다면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구실을 줄 수도 있어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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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사건을 조명한 서독의 영화 고텐하펜에 밤이 내리다 (Nacht Fiel Ueber Gotenha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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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틀로프 호 침몰을 다룬 귄터 그라스의 2002년 소설 게 걸음으로 가다 (Im Krebsgang)

 

비록 나치스의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는 없으며 그에 동조한 독일 시민들에게도 여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천명의 민간인들의 희생까지 죄를 물을 순 없었고, 수십년 가까이 묻혀져 있었던 이 사건은 서독의 '고텐하펜에 밤이 내리다'로 다시 조명되었고

독일의 문호 귄터 그라스의 '게 걸음으로 가다'에 의해 대중들에게 구스틀로프 호의 비극을 알렸으며

이후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잔해를 찾기 위해 노력한 폴란드 조사팀이 발트해에서 북위 55도 7분 동경 17도 42분 60m 바닷 속에서 구스틀로프 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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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조사팀이 발견한 구스틀로프 호의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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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현창

 

그리고 이 탐사에 참여했던 마르친 얌코프스키 (Marcin Jamkowski)를 비롯한 조사대 대원들은 나치가 자신들의 조국에 저지른 만행에 분노했지만

그럼에도 민간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독일이 저지른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다시는 시민들이 전쟁의 목격자가 되는 일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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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우에서 도주하는 독일인. 1945년 1월 26일

 

비록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나치가 낳은 응보이자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지만 한니발 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되니츠의 지휘 아래 30만명의 부상병들과 2백만명의 민간인들이 안전하게 서부로 탈출할 수 있었고,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 구조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는 미래는 밝지만은 않았고, 그렇게 구조된 인원들 조차 베를린에서 목숨을 잃고 한때 유럽을 정복했었던 대독일국은 4개월 뒤 멸망한다

댓글
  • 루리웹 루머게시판 2021/06/07 08:49

    서로가 서로에게 한 짓이 있으니 죄를 묻지 않고 덮어두기로 했다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비극이 또 있을까...

  • 김봉팔 2021/06/07 08:48

    오 좋은글 잘봤습니다


  • 김봉팔
    2021/06/07 08:48

    오 좋은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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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리웹 루머게시판
    2021/06/07 08:49

    서로가 서로에게 한 짓이 있으니 죄를 묻지 않고 덮어두기로 했다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비극이 또 있을까...

    (T5OKMH)


  • naguma5
    2021/06/07 08:50

    '나치가 자신들의 조국에 저지른 만행에 분노했지만
    그럼에도 민간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평범한 사람들(민간인들)이 광기에 휩쓸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집단에 동조한 결과 맞이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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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cicle017
    2021/06/07 08:51

    정성추. 정말 전쟁이라는건 무서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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