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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원고지에 담아내는 펜 - 라이카 M-P

편안한 글을 쓰고싶어 반말체로 적게 되었습니다.
어투가 불편하신 분께는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발단은 평창 동계올림픽 홍보 영상이랍시고 만들어진 '아라리요'를 보게 된 날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88올림픽보다 못한 연출이라고 화를 냈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30년 전 것과 비교하기엔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사람들이 비교를 하는지. 괜한 측은지심이 들어 88 올림픽 개막 영상을 찾아보던 중 한 영상과 기사를 보고 기술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타박했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날. 경기장 안으로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들어오다가 환히 웃으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30년 전 전쟁터의 참혹한 모습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룩했노라 전 세계에 선언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자체가 한 편의 시 였고 그 시를 쓴 이가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선생께서는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을 맡았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 채움 대신 비움, 군중 대신 단 한 명의 아이를 내세운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두고두고 감동을 안겼다. 김영태 시인은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어령씨는 그 넓은 운동장에 시를 썼다.
이 ‘정적’이라는 시는 태초의 빛을,
그리고 벽을 넘어 화합의 어우러짐에서
잠실벌의 숨죽임으로 남기지 않았던가."
훗날 이 장면을 두고 누군가 선생께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선 어떻게 이걸 생각해내셨습니까?"
그러자 이어령 선생께서
"원고지를 경기장 안으로 옮겨놓은건데요 뭘.." 라고 하셨단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감탄했다.
이어령 선생은 인문학자다. 보통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은 영화 감독이나 무대 감독 등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맡는다고 하는데 선생은 그런 경험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인문학자의 철학' 을 담아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를 취재했던 기자는
'창조의 원천이 되는 강렬한 기억 한 컷'이 선생의 인문학적 재능과 결합된거라 추측했다.
'원고지를 경기장 안으로 옮겨놓은 것'
'창조의 원천이 되는 강렬한 기억'
그 날 이후 곰곰히 저 두 문장을 곱씹어보다가 번뜩하며 내 머리를 스쳐가는게 있었다.
'가만... 난 대체 무슨 사진을 찍고 있던거지?'
사람들은 흔히 사진은 시각 언어라고 한다.
언어이기에, 사진 속에는 촬영자가 전달하려는 말이 담겨있어야 한다.
라이트룸을 열어 지난날 찍은 사진을 하나 둘 넘겨보다가 눈물이 났다.
내 원고지에는 겉멋이 가득한, 미사여구로 가득찬 글밖에 쓰여있지 않았다.
그렇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듯한 기분이 들며, 한동안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지난날 인터넷에서 유행한 예쁜 사진과 멋진 사진만을 찍으려 덤볐던 모습이 생각에
내가 저 비싼 라이카를 갖고 있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장비를 하나 둘 처분하고
그래도 다시 사진 찍을일이 있어 카메라를 바꾸고
다시 처분하고 하며 1년여 시간을 보냈다.
우연히 다시 사진이라는 것에 발을 들인건 지난날 에스토니아를 다녀오며 찍은 사진들을 하나 하나 넘겨볼 때였다.
L1013572.jpg
'Crossing', Leica M9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을 담은 이 사진 한 장을 본 순간
나는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걸 담아내려 했었는지 기억해냈다.
풀어내기 어려웠지만, 분명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겠지. 하며 다른 사진으로 넘겼다.
L1013581.jpg
'Departure' Leica M9
우연찮게 사진 일부를 잘라내었더니, 내가 원하던 모습이 나오게 된 사진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잠시동안 설렘, 아쉬움, 즐거움 등 모든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
그 강렬한 기억 하나가 미약하게 머리를 스쳤다.
L1013481.jpg
'Them' Leica M9
그리고 이 사진을 보며, 내 스스로 어떻게 이 우연의 순간을 담아냈는지 고민했다.
제목은 '그들' 이고 사진엔 노부부가 걸어나오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노부부 왼쪽 사진엔 또 다른 사람들이 노부부처럼 벤치 곁에 있었다.
사진속 그들과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이 교차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L1013567.jpg
'Look' Leica M9
그리고 이 사진을 보게 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분명 의도한것은 아니었지만 중앙 여성이 가리키는 곳에 모든이의 시선이 향했고
뒤에 걸어가는 사람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우연스럽게 모든게 맞아 떨어진 강렬한 한 컷. 분명, 내가 찍고 싶은 사진 그 자체였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같은 사진을 찍고싶다는 생각으로 달려온 지난날.
그리고 지난날의 사진들이 결코 헛된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진을 찍어볼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Screen_Shot_2017_04_21_at_8.11.22_PM.jpg
먼지만 먹던 500px.com 계정에 하나 하나 사진을 올려보았다.
많은 추천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 위에 있던 사진 모두가 Popular 항목으로 진입한 순간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DSCF6004.jpg
그렇게 나는 라이카 M-P를 들였다.
전 전작인 M9과 비교하면 많은 부분에서 기술적으로 진보한 카메라다.
코닥센서에서 CMOS 센서로 바뀌어 노이즈 억제력이 강해졌고
화소수도18메가픽셀에서 24메가픽셀로 진보했고
LCD 창을 보며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촛점 맞추기 기능이 있어 10배율로 정밀한 촛점도 맞출 수 있었다.
여전히 오토포커스를 지원하진 않지만, 나는 그다지 그 기능을 선호하지 않기에 별 불편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주목한것은 평창 아라리요에 쓰인것같은 '기술적 진보' 보다는
서울 올림픽 개막식같은 '세상을 원고지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라이카의 뷰파인더에는 수천개의 경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DSCF6005.jpg
나는 단순한것이 좋다.
셔터 속도를 설정할 수 있는 다이얼과
전원을 켜고 끄고 하는 스위치
노출을 설정하는 다이얼
이거면 내가 담아낼 원고지에는 충분하기에 더 욕심은 없다.
복잡한 기능은 촬영이 아닌 기능에 집중하게 만들고, 나를 더 혼란하게 한다.
이제 세상을 나만의 원고지에 다시 담아낼 시간이 왔다.
L1000347.jpg
'호흡' Leica M-P
미세먼지가 씻겨간 지난날 오후에 이 카메라로 첫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는 창문이라는 숨구멍이 달려있어 반드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
몇일간 미세먼지때문에 호흡을 못 하던 아파트는 이 날 비로소 호흡했다.
푸른 하늘, 라일락 향이 나는 보랏빛 하늘을 오롯이 담아내었다.
L1000345.jpg
'벚꽃엔딩' Leica M-P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 날
마지막 벚꽃은 태양과 함께 저물어버렸다.
그러나 떨어진 벚꽃 너머 푸른 여름이 다가온다.
L1000358.jpg
'도레미파솔라시' Leica M-P
나무건반 위에 목련꽃이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도 는 첫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소리
시는 마지막 끝을 알리는 죽음의 소리
건반 위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생명은 변화한다.
생각건데, 과연 M-P를 들인게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세상을 원고지에 담아내는 펜으로써, 그를 잘 다룰 수 있을지.
분명 지난날 다루던 솜씨가 아직은 남아있어 어느정도는 하리라 생각하지만 아직 근본적인 의문은 남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것인가?'
그제, 이어령 선생의 기사를 다시 읽다가, 선생께서 마지막에 남긴 말이 나에게 다시 큰 울림을 주었다.
"창조 뒤에는 늘 외로움과 정적, 그리고 암흑이 온다. 한밤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어둠이 있다. 딱 한 번밖에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벤트는 아름답고 절실하다. 사람들은 일회성 행사에 왜 그 많은 돈을 낭비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질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태어날 때, 죽을 때에도 한순간이다. 되풀이되지 않는 시간이요 다시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있지 않은가."

댓글
  • AllanKim 2017/04/21 20:51

    글처럼 사진이 멋있습니다. 제 원고지에 M10으로 어떤 글을 써야할지 저도 진진하게 고민해 보아야 겠습니다.

    (mklNyn)

  • 도일케이 2017/04/21 21:06

    감사합니다! M10과 항상 즐거운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mklNyn)

  • Echelon 2017/04/21 21:07

    너무 마음 속에 와 닿는 구구 절절한 말씀 이시네요!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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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llowㆍCandle 2017/04/21 21:11

    좋은 말씀과 멋진 사진으로..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네요~~!^^
    좋은 사진들 많이 보여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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