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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586을 위한 변명 (6)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87년 민주화혁명의 기억은 강렬했다. 이 강렬함은 민주주의에 대한 86세대의 오도된 집착을 초래했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들을 ‘민주진보진영’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네 이름을 부른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했고, 안희정의 좌우명은 ‘민주주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다. 제2항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는 유승민이
자주 강조하는 바이고, 심지어 김제동도 자주 인용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1948년의 제헌헌법에서 기원한다.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유진오가
작성한 제헌헌법 초안부터 포함된 조항인 것이다. 김제동을 비롯한 자들이 페티쉬처럼 집착하는 이 조항은 사실
1918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의 제1조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법제에 있어서는 독일의 것을 모방한 것이고,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모방이 나쁜 것은 아니다.
선행자의 시행착오를 생략하거나 압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효율적이다. 조선의
엘리트 유진오가 독일 법제에 친숙함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헌법의 역사가 없는 조선에서 유진오가
바이마르 헌법을 모방한 것은 욕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이 조항의 발생지인
독일에서 이 조항은 진작에 사라졌다. 1949년 서독 기본법이 제정될 당시 사라진 것이다. 이 조항 대신 독일 기본법 제1조 제1항을 차지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라는 조항이다.


 


기본법 제20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이 질서의 제거를 감행하는 이에 대해, 다른 대응수단이 없다면 모든
독일 국민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저항권을 명문으로 규정했다. 선거를 통해 히틀러 같은 자들이 당선되고, 탄핵 등의 방법이 되지 않을 경우 독일 국민은 이런
자를 총으로 쏘아 죽일 헌법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라진 바이마르 헌법 제1조는 민주주의에 관한 조항이고, 독일 기본법 제1조는
자유주의에 관한 조항이다. 민주주의가 인간을 파괴하는 질서로 가는 문을 연 것에 대한 반성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1조의 주어는 ‘모든 권력’인데, 독일 기본법의 제1조의 주어는 ‘인간의 존엄성’인 것이다. 유진오가 바이마르 헌법을 베낄 때에, 그는
자신이 금과옥조처럼 차용한 그 제1조가 불과 1년 후 흔적도 없이 삭제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토인 독일에서 진작에 사라진 조항이 한국에서는 개그맨이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것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고,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중이 염불하듯 습관처럼 되뇌이고 있다.


 


전후 서독이 위 조항을 삭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그 자리에 넣은 이유는 나찌즘에 대한 잔혹한 기억 때문이다.
1918년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헌법이었다. 제2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자랑스럽게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 제1조는 마땅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조항에 근거하여 히틀러의 나찌당이 선거로 집권했고, 히틀러는 직접선거로 총통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규정한 바이마르 헌법 제1조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연 것이다.


 


민주주의의는 좋은 것이다. 자유주의(법의 지배)도 좋은 것이다. 자유주의가 법의 지배인 것은 개인의 자유는 인간이 아닌 법이 지배할 때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규정된 헌법과 법률에 의해 기본권이 보장될 때 개인의 자유는 확보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윤석렬의 ‘법의 지배’ 운운에 대해 운동권 출신의 더민당 신정훈 국회의원이 섬찟하다며 ‘양심의 지배’ 운운한 것은 법의 지배에 대한 그의 천박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한 법의 지배와 권력분립, 법치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인데, 신정훈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헌법상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체제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고, 자유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형성에 관한
것이고, 자유주의는 형성된 질서에 관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헤겔의
표현을 빌면 ‘1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로 확대’되는 과정이다.
권력의 형성에 있어서의 민주화와 형성된 질서의 자유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이 인류사의 진보인 것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상태는 다양한 조합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비민주주의)와 자유주의(비자유주의)는 대략 4가지의 조합으로 귀결된다.


 


첫번째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이다. 한국이나 미국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두번째는 비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이다.
근대 영국의 입헌군주제나 싱가폴이 이에 해당한다. 세번째는 민주주의와 비자유주의의
결합이다. 나찌의 지배가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비민주주의와
비자유주의의 결합이다. 중국, 북한이 여기에 해당한다.


 


조선은 일제강점기 시절 네번째 유형이었다. 해방 후 남한은 수십년에 걸쳐 첫번째로 이행했고, 북한은 형태는 다르되 네번째 유형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 비서구사회에서 첫번째 유형은 한국과 일본이 거이 유이한 예이다. 일본의 정치적 후진성을 고려하면 남한의 성취는 더더욱 예외적이다. 홍콩은 두번째 유형에서 네번째
유형으로 이행하고 있다.


 


홍콩민주화 운동에 관해 대륙 출신 어떤 이는 홍콩인들에게 준엄히 ‘왜 너희들은 영국식민지배에는 저항하지 않다가 중국공산당 지배에 저항하느냐…매국노 아니냐…”라고 꾸짖었다. 영국의 홍콩 지배는 두번째
유형이었고, 지금 홍콩인들은 네번째 유형으로 전화하는 위기에 맞서, 자유의 복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홍콩 빈과일보의 지미 라이 회장은 중국 당국이 제정한
홍콩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그 죄명이 외국과의 결탁(collusion with
foreign countries)이다. 그는 외신과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와 독재를 대립항으로 둔다. 김부겸이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싸웠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부정확하다. 독재(dictatorship)는 지배자가 임의와 재량으로 법과 무관하게 모든 것을 뒤흔드는
체제이고 이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대체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이다. 독재의 보다 정확한 대립항은 자유주의인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민주주의와 독재가 오히려 잘 어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색의 마오 어록을 저마다 손에
쥐고 흔드는 100만명의 홍위병이 천안문광장에서 열광할 때 이들의 가슴은 민주주의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마오는 이 민주적 열정으로 자신을 비판한 항미원조전쟁의 영웅 팽덕회와 주자파 등소평 등을 숙청하는
것이다. 재판은 민주적 열정으로 가득 찬 인민재판이었다.


 


윤석렬이 최근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독재’ 운운했을 때, 많은 더민당 의원들이 분노했으나,
윤석렬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상충될 수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더민당에서
소위 검찰개혁을 논할 때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운운하는데,
이는 한국의 헌법, 법률 그 어디에도 나오는지 않는 용어이다. 소위 민주진보진영은 그 뜻도 잘 모르는 채 ‘민주’를
여기저기 갖다 붙이고 있다.


 


검찰수사권의 대통령, 법무장관으로부터의 독립성은 권력분립과 법의 지배의 일환이다. 마치, 육참총장의 작전지휘권이 대통령, 국방장관으로부터 독립된 것과 유사하다. 이 검찰의 독립성을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해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이 ‘민주적 통제’라면 이는 비겁하거나 무식한 것이다.


 


나찌즘의 고통을 겪은 독일은 민주주의가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경로적, 수단적 가치이고, 자유주의/법의 지배는 목표적 가치이다. 홍콩 시민들이
중국 반환 전 영국 지배에 대항하지 않은 것은 비록 선거는 없었으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유신과 5공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모두를 억압하던 체제에서 기적과도 같이 민주화와 자유화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것을 직접 경험한 독일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택했다. 이 방어적
민주주의가 방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이고, 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주적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과 이로 인한 자유의 침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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