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 가지 삶.
좀 이상한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그보다 속이 많이 불편하다.
“자 커피”
“아. 고맙습니다.”
언제나 바라던 것이다. 숙취로 힘겨운 아침에 눈뜨자마자 마시는 커피.
응?
“아이. 아직도 꿈이야?”
“아직도 꿈같아요?”
“.......여기 왜 있어요?”
“설명해 줄 게 있다니까요.”
지난밤 꿈에 자신이 선녀라고 주장했던 그 여자가 내 침대 위에 있다.
그럼 확인해야 할.......
“우리가.......혹시?”
“딱!”
“아악! 왜 때려요?”
“머릿속에 아주 그냥 음란마귀로 가득하시네요.”
“당신이 혼자 사는 남자 방에 있으니까 그렇죠! 아니? 그럼 진짜 선녀에요?”
“네. 선녀 맞으니까. 그 이상한 상상 좀 그만하시죠?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요?”
“아. 예”
아니. 이건 내 잘못이라기보다, 이 여자가 내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게 문제다.
멀찌감치 서서 말하던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녀를 다시 살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선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선녀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침착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건방져 보이는 반전몸매는 판타지 게임 같은 것에 많이 등장하는 엘프같다.
“지금 꿈 아니죠?”
“네. 깨기 전에 보았던 것들도 꿈이 아니에요.”
“잠에서 깨기 전에 본 것들을 꿈이라고 부르지 못하면 대체 꿈이 뭔가요?”
“꿈과 현실의 차이가 중요한가요? 어차피 당사자에겐 모두 현실이잖아요.”
“......아 어려운데요.”
부드럽게 웃어주는 이 여자의 미소가 보기 좋다. 설득당하기 쉬운 미소다.
스스로 선녀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간단히 설명할게요. 당신은 이제 두 가지 삶을 살게 됩니다. 기존의 야구선수로써의 삶과 나그랑이라는 영지의 영주 안타레스 3세 맥베어의 삶을 번갈아 살아가는 거죠.”
“아! 간단하네요.”
“네. 간단해요. 야구를 잘하면 당신의 영지 나그랑에 좋은 일이 생기고, 당신의 영지 나그랑을 잘 다스리면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반대의 경우가 궁금해지네요.”
“야구를 못하면 당신의 영지에 곤란한 일들이 생기고, 당신이 영지를 잘못 다스리면 당신의 삶이 곤란해지겠지요.”
“.......예를 들면요?”
“당신이 야구를 그만두면 나그랑은 망해요. 나그랑이 망하면 당신은 죽어요.”
“.......와. 엄청난 얘기를 되게 해맑게 말씀하시네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꼭 선수 생활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니까요. 야구는 계속 할 수 있잖아요? 나라도 그리 쉽게 망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딱 9년만 버티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성공한다면 연장전은 없을 거예요.”
“아니 왜 저한테 이러세요.......”
“왜요? 축복이잖아요. 두 가지 인생을 동시에 살 수 있다는 말이에요. 남들 두 배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즐겁지 않아요?”
“두 배로 힘들겠네요.”
“하기 나름이죠. 말했잖아요. 어느 쪽이든 잘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어느 쪽이든 잘하고 싶지 않다면 어쩌죠?”
“그럼 죽여 드릴까요?”
섬뜩하다.
선녀 같은 미소를 보이던 여자의 표정이 일순간 변하며 냉기가 흘렀다.
착각이겠지만, 잠깐 동안 아침이 밤으로 바뀌고 백옥 같던 선녀의 피부가 잿빛으로 변했던 것 같다.
놀라서 눈을 몇 번 껌벅이고 다시 봤더니, 그녀는 다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는 듯 호흡을 깊게 내쉬고,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놀랐죠? 미안해요. 잠깐이지만 정말 죽이고 싶었어요. 헤헤”
“.......살려주세요.”
“그럼 잘 해봐요.”
그녀가 사라졌다.
난 아직 커피를 들고 있었다.
아직 내가 침대에서 일어난 흔적이 없다. 아직도 이게 정말 꿈이 아니라고 믿긴 어려웠지만, 그녀와 함께 숙취도 사라졌다.
야구를 잘하라고?
그게 노력하면 되고 그런 것이었던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고, 난 출근을 해야 한다. 야구를 잘 하려면 일단 야구장에 가야겠지.
먼저 들고 있는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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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님! 저 변화구 좀 던져 주실래요?”
“.......난 투수코치잖아. 투수 조 미팅 가야지”
“아! 그럼 다녀오셔서 괜찮을까요?”
“어? 그래”
난 야수 조 미팅에 참석해야 했는데, 타격 코치님이 내게 말했다.
“야. 오민우! 넌 변화구 타격 연습 한다며? 먼저 가서 그거나 해”
“저 오늘 라인업에서 빠지나요?”
“아니~ 네가 투수코치한테 변화구 좀 던져 달라고 했다며?”
“네!”
“우리 팀 투수들이 그 얘기 듣고 다 같이 박수 쳤단다. 네가 타격 연습을 하겠다는 말에 다들 감동했어!”
“아.......제가 그 정도 인가요?”
“더 심각하지”
다 같이 몸을 풀기도 전에, 나는 투수코치님이 던져주는 변화구 타격 연습을 시작했다.
상대팀 선수들은 아직 더그아웃에 보이지 않았지만, 몇몇 상대팀코치들과 전력분석관들을 나와 있었다.
“어? 오민우 아니야? 쟤 지금 뭐하는 거야?”
“쟤가 변화구를 치고 싶단다. 어제 연장에서 변화구 세 개에 헛스윙 세 번으로 삼구 삼진 당했잖아. 사람이면 오기가 생기기도 하는 거겠지.”
“아! 쟤 사람이었어?”
“사람이었나 봐. 난 쟤 보면서 야구도 축구처럼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니까?”
우리 팀 코치와 상대팀 코치가 나누는 대화로는 적절치 못하다.
대놓고 내가 변화구 타격연습을 한다는 정보를 상대에게 알리다니.......
난 오늘도 9번 타자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유격수로 경기를 시작했다.
어제 연장경기 덕분인지, 타자들은 맥없이 물러났고 양 팀 선발투수들은 긴 이닝을 던질 욕심을 내는 것 같다.
아! 어제였구나. 왜 그제 같지?
3회 말에 9번 타자인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내가 경기 전에 변화구 타격 연습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상대 팀 투수는.......
여전히 변화구를 던진다.
나도 그럴 줄 알고 휘두르지 않았다. 낙차 큰 변화구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볼이었다.
내가 이 정도의 변화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올지 아닐지는 어차피 알 수 없다.
연속으로 볼을 두 개 던지고 나서야, 상대 투수가 빠른 공을 던졌지만 또 볼이었다.
3볼 노 스트라이크.
누구라도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가운데 들어온 빠른 공을 노리고 크게 휘둘렀는데 파울이 되었다.
내가 아쉬운 몸짓을 하니까, 상대 팀 더그아웃에서 조금 비웃는 것 같다. 우리 팀 더그아웃은....... 말하고 싶지 않다.
공수교대를 준비하고 있다.
3볼 1스트라이크.
아직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라고 보겠지만, 내겐 여기가 승부처다.
상대 투수가 이번엔 변화구를 던질 것이다. 조금 전에 내가 빠른 공 타이밍을 맞췄으니까, 분명히 변화구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빠른 공이다.
풀카운트.
우리 팀 투수가 공수교대를 위해 일어나 있다.
내 타격 능력으로 변화구를 대비하면, 빠른 공은 전혀 칠 수 없다. 하지만 상대투수는 내게 변화구를 던질 것이다.
나도 고교시절 까지는 잘나가는 투수였다.
이런 순간에 가장 강력한 빠른 공으로 타자를 제압하려는 건, 상대타자가 중심타자일 때나 그러는 것이다.
괜히 빠른 공 던지다가 나 같은 타자에게 한 방 맞으면 창피하기만 하다.
상대 투수는 분명히 변화구를 던질 것이다. 그것도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변화구일 것이다.
타자를 볼넷으로 걸어 보내더라도, 제구에 실패했다는 표정을 보여주면 된다.
상대 투수가 와인드업을 끝내고 크게 휘둘러진 팔에서 튀어나온 공은 빠른 공이었다.
젠장. 아. 아닌가?
내가 어떤 공에 대비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상대 투수가 던진 공도 뭐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크게 휘둘러진 내 배트에 맞은 야구공이 멋지게 날아갔다.
내 홈런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상대 투수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4회를 버티지 못했다.
3타수 1안타 1홈런.
마지막 타석은 신인 내야수의 몫이었고, 녀석이 안타를 치긴 했는데, 2이닝 동안 에러를 두 개 했다.
당분간 내 주전자리는 지켜지겠다.
경기가 끝나고, 내가 때린 홈런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길 기대했지만.
“야. 민우가 때린 공이 뭐였냐? 변화구는 아니었지?”
“빠른 공도 아니었는데요?”
“그렇지? 그냥 실투였지?”
“손에서 빠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간 거죠”
“그래도 우리 민우가 잘 때린 거야? 그렇지?”
“변화구 타격 연습을 했으니까 그런 실투를 홈런으로 때린 거겠죠”
별로 위로가 되진 않았다.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서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어쨌든 난 이번 시즌 첫 홈런을 때렸고, 팀도 승리를 거뒀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돌아간 내 집에는, 선녀가 있다.
“아. 또 오셨군요.”
“뭐 이제 종종 보게 될 텐데요.”
“.......그렇군요. 그럼 우리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 전 안소희라고 해요. 직업은 선녀고요. 가끔은 구미호로 일하기도 해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만두죠.......피곤해지는군요.”
“본인 소개는 안하세요?”
“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요?”
“오민우. 27세. 프로야구선수. 외아들. 지금 만나는 이성은 없고, 인생에 목표도 없고, 술 마시는 게 유일한 취미에다가.......”
“그만하시죠.”
본인이 안소희라는 선녀가 배시시 웃으며 또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도무지 현실적인 기분이 들지 않아서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더니,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씻지 않아요?”
“남자 혼자 사는 방에서 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어서 빨리 자야 당신의 왕국으로 갈 수 있잖아요. 오늘 홈런도 쳤으니까 기대되지 않아요?”
“......제 침대에 앉아서 하는 그런 대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지 알아요?”
“당연히 알죠. 재미있잖아요?”
“.......혹시 왕국을 잘 다스리면~ 흠. 뭐랄까. 그~ 특별한 보상 같은 거 말입니다.”
“없어요.”
“단호하시네요.”
“맞을래요?”
“씻겠습니다.”
씻으면서도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내가 무척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욕탕을 나가면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내 방과 마주치게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제 그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경찰에 신고를 해볼까 고민했다.
씻고 나왔더니, 선녀가 내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어이.”
“어머! 미안해요. 깜빡 졸았네요. 이제 자야죠?”
“저기요. 제 침대에 누워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요.”
“아아. 참 귀찮네요.”
“왜! 왜요? 악!”
“딱!”
손버릇이 나쁜 선녀다.
게다가 프로운동선수인 내가 당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공격력을 갖고 있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소용없겠다.
그녀가 침대에서 뛰어오르며 주먹을 휘두르려는 것 까지만 기억난다.
“아으~”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아. 예~”
“전하 저 브라이튼입니다. 전하! 알아보시겠습니까?”
“네. 네~ 소리 좀 치지 말아요.”
그다지 좋은 신하는 아닌 모양이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계속 소릴 질러댄다.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계속.
와 재밌을 것 같은데 퇴근후 읽어보겠습니다
불펜의역습// 부디 읽을만 하시길 바랍니다.
일단 선추천 후정독
재밌네요 야구커뮤니티 정체성에 맞는 이야기랄까.. 드라마화하면 재미있을꺼같아요
잘보고 있습니다.
저도 두가지 삶을 살아보고 싶네요 ㅎ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랜만이시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오아 잼있게 잘 보고있어요 ㅋㅋ
북풍님.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 부탁드립니다~
웹소설 연재 사이트에 올려보세요!
오랜만에 뵙는 글이네요~ ^^
항상 기대가 큽니다~
재밌습니다 ㅎㅎ야구선수 소설은 처음읽어보네요
와 북풍님이다... 뵙고 싶었습니다 ㅜㅜ
오..
오 이번건 첫회부터 빡 오네요~ 잼있겠다
앗. 모두 감사합니다. 매일 이렇게 댓글이 많이 달리면 정말 좋겠습니다. ㅎㅎ
오랜만에 뵌 분들도 모두 아직 불펜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계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