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생각난 죽창 3백만론..
이오지마 동남쪽에 위치한 타마나(玉名)산은 이오지마 비행장 인근에 위치하고 스리바치(摺鉢) 산에 이어 이오지마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점이었기에 일찌감치 일본군은 이곳에 수많은 철근 콘크리트 벙커와 연락 터널을 건설, 요새화에 착수한 곳이었다.
암벽에 위치한 각 진지들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으며, 기관총 총좌들이 줄 지어 늘어서 있었고, 각 진지들은 서로를 엄호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타마나 산은 북부로 이동하기 직전까지 쿠리바야시 중장의 사령부가 놓여 있던 장소이기도 하였는데 비행장 공략과 병행하여 벌어진 처절한 전투로 인하여 미군은 이곳을 “고기 분쇄기(미트 그라인더)”라고 불렀다(미군은 382고지라고 불렀다..)
당시 이곳은 일본 육군의 센다타 다스에(千田貞季) 소장이 이끄는 혼성 제 2 여단과 해군의 이노우에 사마지(井上左馬) 대좌가 지휘하는 이오지마 해군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오지마 상륙 작전이 개시된 지 18일 후인 1945년 3월 7일, 미 제 3 해병 사단은 해안선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고, 제 5 해병 사단은 북서쪽 해안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타마나(玉名)산 방면을 담당한 제 4 해병 사단도 고기 분쇄기 지역의 일본군 저항을 진압하는데 거의 성공하고 있었다.
마침내 타마나 산 지하 깊숙이 짱 박힌 일본군들은 물도 식량도 없이 죽은 자와 부상자로 넘쳐났고, 악취는 상상을 초월하였으며 대량으로 발생하는 벼룩과 이질과의 또 다른 전쟁에 몸부림 쳤는데, 여기에 더해 지상의 미군은 구멍을 찾는 즉시 화염 방사기로 불기둥을 사정없이 퍼붓거나 폭약을 사용하여 입구를 막아버려 숨어있는 일본군 병사들을 생매장시켰다.
그렇다면 일본군 지휘부는 이미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져버린 이상, 땅굴 안에 가만히 앉아서 무의미하게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낭비하느니 명예로운 항복을 선택했느냐 하면, 지극히 황군스럽게도 이것들은 당연히 엉뚱한 짓을 선택했다.
“타마나 산 수비대는 잔존 병력을 결집하여 비행장을 향해 총돌격을 감행한다.”
말이 총공격이지 이들이 말하는 총공격이란 일본군의 유구한 전통인 총검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이었고 혼성 제 2 여단장 센다타 소장은 사령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 중장에게 이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총공격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중하라” 즉,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고 이 회신을 받은 일본 육군(혼성 제 2 여단)은 공격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골 때리는 건 일본 해군(이오지마 해군 경비대)의 반응이었는데 역시 한 나라 안의 두 군대답게 이들은 지네끼리만 튀어나가기로 결정했고 이노우에 사마지 대좌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드디어 내일 결행이다. 18시 출발이다. 정식으로 명령이 있었으니까 틀림없다,”라며 야부리를 깠다(죽을 때까지도 사기 치는..생존한 당시 해군 통신병의 증언에 따르면 쿠리바야시의 공격 중지 명령을 분명히 보고했다고..)
하여간 말 안 듣는다..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니넨 육군이쟈나!!)
어쨌든 남아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은 해군의 총 반격은 약 1,000명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대부분이 개인 화기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남방제도(南方諸島) 해군 항공대 소속 정비병들과 제 204 설영대대(공병대..여기엔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다..) 소속 인원들이어서 이들이 소지한 무기란 건 대부분이 수류탄뿐이었다.
대검마저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결국 대부분이 민가의 울타리를 뽑아온 나무 막대기 한 개씩을 지급받았고 끝을 뾰족하게 깎았는데 이것이 죽창이라고 알려졌다(
언제나 기득권의 기득권지키기는 상상을 초월하네요....
흥미로운 주제에 완벽한 결말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정신론'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을 보고 생각나서 적어봤습니다. 너무 읽기 길다 싶으시면 다른 분들은 넘어가주세요.ㅜ
정신론
요즘은 정신론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론이 뭐냐면 한국의 노력 신봉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론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한국의 초중고 교장들이 전교생을 광장에 세워놓고 하는 얘기다.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개인의 노력과 정신을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제시한다. 문제가 있어도 정신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얘기. 또 다른 예로 독립운동가 신화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심 고취 스토리는 정신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일제의 폭압(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애국심(개인의 정신)으로 독립을 위해 싸운다.(결과:희생) 이 도식은 개인의 정신을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내세우는 정신론의 전형이다. 독립운동가의 훌륭함은 문제가 없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애국 독립운동가들이 기록에 남는 이유에 있다. 왜 이런 이야기만 기록, 전승될까. 이들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거의 초인 수준으로. 역사적으로 고문당한 사람들의 성공, 실패 비율을 따져보면 압도적인 다수가 고문에 저항하는 것에 실패한다.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반증의 방법으로 알려준다.
정신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인간의 정신을 과대평가한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도 인간의 정신이 환경의 혹독함을 이긴다는 것. 하지만 인간이 어떤 녀석인지를 조금만 알면 그런 소리를 쉽게 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은 몸에 지배받는다. 그리고 몸을 지배하는 것은 환경이다. 모든 역사의 '고문'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고문은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문 대상의 환경을 혹독하게 교란한다.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옷을 벗기거나 무서운 사람을 여럿 배치한다. 정서적 안정감을 위한 어떠한 소품(꽃, 풍경 그림)도 고문실에선 찾아볼 수 없다. 고문자는 고문 대상이 평소에 어떤 정신을 가졌든 그 사람의 평소 행실에 미뤄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엉뚱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무신론자나 기독교 경멸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쉽다.
그래서 정신론은 위험하다. 그리고 터무니없다.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없냐면 인간을 환경에 저항할 수 있는 초인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모든 잘못은 잘못을 저지른 본인만의 문제라는 뜻, 환경이 고되어도 닥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조까) 모든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정신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정신론은 단체의 시스템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물론 개인의 정신이 문제 해결의 일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잘못의 원인이 개인의 정신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론이 채택하는 일부의 사실이다. 이 일부의 사실이 정신론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하는 대다수의 사실들은 여기서 채택되지 않는다. 애초에 정신론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인간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성찰을 할리가 없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정신론은 확실히 개소리다.
나는 초.중.고.대.회사에서 이 정신론 신봉자들을 만났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더라. 지금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