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키 케이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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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싸운 우스키 케이코씨
우스키 씨는 1984년 배옥수 위안부 피해자를 인터뷰해 일본 언론에 소개한 1세대 위안부 저널리스트다.
당시 우스키 씨는 ‘실록·비극의 위안부 정신대’ 기사에 일본인 위안소 경영자, 일본인 해군 견습사관의 인터뷰를 실었다. 신동아는 기사 전문을 통해 우스키 씨를 ‘일본의 시사지와 방송사의 프리랜서로 일하며 한국 전쟁피해자들의 진상을 일본에 알리고 소송문제를 돕는 민간단체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 대표’로 설명했다.
“1990년 한국 전쟁피해자들을 취재하면서 이들의 생사 확인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시민단체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를 만들었다. 시민에게 모금해 한국 유족들의 재판비용과 일본 체류 비용을 마련했다. 지원활동은 재판이 시작된 1992년부터 재판이 끝난 2004년까지 이어졌다.
우스키 일행은 1년에 4, 5차례 30여 명의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며 용돈, 약값(초기 10만 원, 후기 20만 원)과 선물(약, 과자 등)을 건넸다. 할머니 20여 명이 사망해 근래는 10여 명을 만났다. 이들은 할머니들과 안면도, 제주도로 1박2일, 2박3일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평소에는 할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했으며, 할머니가 사망한 경우 장례식에 참석해 화환이나 부의금(20만 원)으로 성의를 표했다.
이 활동을 이끌어온 한국 언론에는 신동아 1992년 3월호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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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키 케이코씨는 일본에서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헌신하고 일본 현지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정부에 항의시위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과 당시 일본총리 사과편지 받아냄
"일본 정부는 직접 할머니들에게는 1엔이라도 보상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당시 나는 국회 앞에서 보름간 시위했어요. 결국 정부는 할머니들의 의료·복지 지원 사업비 명목으로 '아시아여성기금'에 300억엔을 내놓았어요. 국민 모금 200억엔보다 많은 액수였죠. 사실상 정부 돈이 할머니 보상금에 들어갔던 셈이지요. 당시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총리도 성금을 냈고 보상금을 받은 할머니들에게 사과 편지를 전했어요."
3.
정대협(정의연 전신)에서 이것은 받아서는 안된다 주장.
이 기금을 받으면 다시 더러운 돈에 몸을 파는 것이라고 주장.
(받고 안받고는 시각에 따라서 바뀌는 복잡한 문제임. 하지만 당사자 위안부 할머니중엔 받으려는 분도 있었고 받은 사람들은 정대협에서 소외되었다 추측)
논란이 부분은 당시 한국 기사에도 많이 나왔음
「그(우스키 케이코)가 한국 단체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건 아시아여성기금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죄한 뒤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조성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기금과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전달했다. 우스키 씨는 ‘전쟁에 책임을 느끼는 국민과 정부 모두 기금을 내는 이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단체들은 생각이 달랐다.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일본의 보상금 지급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4.
여성기금 받으면 XXX이다 폭언 및
여성기금 만들어낸 우스키 케이코 할머니를 입국금지 정부에 건의하고 정부가 받아들임
「入国拒否になる前に、韓国大使館から接触があった。訴訟の打ち合わせもあるし、韓国のためにやっている人間をどうして入国拒否するのかと聞いたら、挺対協が法務省と外交通商省に、臼杵は基金を受け取れと言って動いているから入国させるなと申し入れたという返事だった」
입국 거부가 되기 전에 한국대사관에서 접촉이 있었다.소송 협의도 있고 한국을 위해 하는 사람을 왜 입국 거부하느냐고 물었더니 정대협이 법무성과 외교통상부에 우스키는 기금을 받으라며 움직이고 있으니 입국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대답이었다.
5.
이 사건에 대한 일본측 기사 일부 발췌
"정대협의 사람들은 200년 전쟁이다, 또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반일 운동을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할머니들이 점점 죽어 만일 국가 배상이 20, 30 년 만에 잡힌해도 무엇합니까 모두 죽은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할머니가 죽든 살려고하지만 우리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이 속죄금을 받아 버리면, 그들은 운동은 끝나 버리기 때문 인권이나 존엄 라든지는 말로만 할머니를 위하고 반일 운동의 간판으로 이용하고있을 뿐이다 "
「挺対協の人たちは、200年戦争だ、とも言っていた。彼らが反日運動をやるのは自由だけど、おばあさんたちがどんどん死んで、仮に国家賠償が20、30年後に取れたとしても何なのですか、みんな死んでいるでしょうと、いくらいっても、おばあさんが死のうが生きようが、我々には関係ないと言っていた。おばあさんたちに償い金をもらわれてしまったら、彼らの運動は終わってしまうから、人権とか尊厳とかは口先だけでおばあさんのことを反日運動の看板として利用しているだけだ」
오누마 교수는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억압을 없애고 여성의 권리 확대를 목표로 세계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고조가 정대협 의한 국제적인 운동의 전개에 때의 이익을 준 것으로보고있다. 확실할지모른다.
大沼教授は、性差別や女性への抑圧をなくし、女性の権利拡大を目指す世界的なフェミニズム運動の高まりが、挺対協による国際的な運動の展開に時の利を与えたと見ている。それは確かかもしれない。
오 누마 교수는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을 행복하게하기 위해 해결한다 '는 관점이 아니라"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반일 문제로 가져 갔다 "모두 지적하고있다.
일본측 얘기라서 걸러들을 것도 있지만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네요.
이번 사건의 맥락과도 충분히이어진다고 봅니다.
이념이 우선인가 개인의 행복이 우선인가부터
정치와 현실의 차이, 당사자와 대리인의 시각 차이,
많은 것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가 되어버렸네요.
위안부 할머니의 개인의 선택과 행복이 우선이다 vs 개인이 아니라 사건집단에 내재된 대의성의 유지와 확장이 우선이다.
두가지 선택에서 많이들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정대협에 관한 일본 시각이라 우리랑 다를 수 있지만 궁금하면 번역기로 읽어보세요.
이게 진짜 기가 막힌 일이죠
이 분이 정대협 모두를 합친거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진짜로 싸워오신 일본인입니다.
할머님들이 제일 고마워하는 분이 이 분이에요.
ㅠㅠ
인류과 일제군국주의자들의 싸움을 양국 민족주의 싸움으로 변질시켰죠.
과연 일본의 사과를 진심으로 원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분쟁꺼리가 먹거리니.
운동권 2000년대 초에 죽창들고 설치다 맛이갔는데 최근엔 한일갈등이랑 성별갈등을 먹거리로 삼은 것 같아요
[리플수정]진보쓰레기들... 20대 민주화운동조차도 이젠 의심하게 만들어요 갈라치기로 권력과 돈을 버는 더러운 사기꾼들이었어요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누가 하면 거부하라고 강요하고 결국 자기가 피 빨나먹는 거에 지장이 생겨서.. 어휴
정대협 정의연 말로만 할머니들을 위한다면서 사실은 갈등을 조장해서 먹고 사는 단체였네요
일본 총리의 사과도 받아내고 성금까지 전달하며 진정으로 할머니들을 돕는 사람을 입국금지 시키고
좌파의 저런 모습을 보면 지금 정권과도 닮은 점이 참 많아요
갈라치기 선동 갈등조장 지금 정권을 포함한 586 운동권들의 주특기
재개발// 입국금지 시킨 건 정말 이해 안가더라구요.
진즉에 끝났을 일을 지들 이익을 위해 훼방만 놓았군요
자기들이 해처먹을려고 방해라니.. 억마 정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