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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영화 [시월애]를 보고.. 시간이 안기는 미련과 무력 앞에서... (스포 포함)


[시월애]를 20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이현승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영어 제목은 [A Love Story].
2000년 9월 9일에 개봉해서
30만 관객을 동원해 흥행은 실패했습니다.
그 30만 명의 관객들 중 한 사람이 저입니다.
[시월애]는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로도 유명합니다.
키아누 리브스, 산드라 블록을 주연으로
[레이크 하우스]가 2006년에 만들어졌죠.
꽤 많은 분들이 이 영화의 제목이
10월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오인하는데,
실제는 10월의 사랑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 [時越愛]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멜로 장르의 황금기입니다.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거의 모든 멜로 영화들이
이 때 만들어졌죠.
2000년 5월에 개봉한 [동감]과 함께
[시월애]는 그 황금기의 한 부분을 장식합니다.
[시월애]와 [동감]은 또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멜로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워낙 많아서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20년 전 당시엔 신선한 매력을 끌었습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타임슬립,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루프로
다시 세분화됩니다.
타임슬립(Time Slip)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나 미래로 여행하는 장르.
타임리프(Time Leap)는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현재를 바꾸는 장르.
타임워프(Time Warp)는
시간이 왜곡되는 현상으로 인해
과거나 미래의 일이 현재에 뒤섞여 나타나는 장르.
타임루프(Time Loop)는
같은 시간대가 무한하게 반복되는 장르.
이 분류법을 따랐을 때
[시월애]와 [동감]은 둘 다
타임워프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죠.
또한 [시월애]의 엔딩에는
평행우주의 세계관까지 수용하고 있습니다.
20년 전 이 영화는 제게
촬영과 음악이 뛰어날 뿐
서사와 연기에 있어서는 특별한 점이 없는,
그렇고 그런 수준의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정재 배우, 전지현 배우라는
두 명의 라이징 스타를 주인공으로 찍은
장편의 뮤직비디오라고 비난하기도 했죠.
인물들의 국어책을 읽는 듯한 대사 처리도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산이 두 번 변한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시월애]는 과거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영화로 느껴지니,
그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제 자신 스스로에 근원함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인상적으로 교차하는
바닷가 바로 위에 새로 지어진 한 건물에
건축학과 졸업을 미루고 이주한 성현(이정재)은
집 앞의 우체통에서
이 집에서 살았다고 주장하는 은주(전지현)가 쓴
편지를 발견합니다.
1999년 12월을 사는 성현과
2001년 12월을 사는 은주는 그 때부터
우체통을 매개로 편지와 물건들을 주고 받으며
점점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사랑보다 선행하는 주제는
고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닷가의 집 자체가 절대적 고독을 상징하니까요.
은주의 고독이 유학을 간 애인의 빈 자리에서
비롯됨에 비해
성현의 고독은 유년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건,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계속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이 끝난 후에도..." 라는 은주의 대사는
끝내야 할 사랑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고독이 야기하는 미련이며,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나
볼 수 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라는 성현의 말은
고독에 길들여진 사람의 체념입니다.
[시월애]를 이야기함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홍경표 촬영감독.
대한민국의 모든 촬영감독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입니다.
[지구를 지켜라], [태극기 휘날리며], [마더],
[설국열차], [곡성], [버닝], [기생충]...
새벽의 밤하늘, 그 검푸른 빛의 아름다움을
황홀하게 담아내는 솜씨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감독은 없습니다.
그 검푸른 빛은 바로 고독의 색입니다.
강화 석모도, 제주 우도 산호해변(서빈백사)은
그의 카메라를 거치면서
극상의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바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일 마레(il mare)도
그의 카메라 속에서 고독을 품어 치유합니다.
시간의 뒤틀림을 알고있는 성현이
그것을 모르는 은주에게 실제로 다가가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장면은
흥미로우면서도 안타깝고,
2년 후의 약속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은주가 느끼는 슬픔은 아련하고 애틋합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과거는 무력하며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는 미래는 슬픕니다.
성현과 은주의 고독이 사랑으로 바뀌면서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개입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성현은 미래의 은주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려 하고,
미래의 은주는 성현의 그런 도움이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필사적으로 고쳐 쓴 편지를 부치려 합니다.
우체통 앞에 주저앉은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은주의 기도는
끝내 하늘에 닿고
만나야 할 운명의 두 사람은
마침내 조심스레 서로의 앞에 서며
그들의 사랑은 결국 시간을 초월합니다.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일회적, 선형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때문입니다.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의 운명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20년 전의 저는
그 어떤 선택도 후회하지 않는다 말했으며
그 어떤 운명도 두렵지 않다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
고쳐 쓰고 싶은 역사는 계속 후회스럽고
미래의 한 시점으로 앞서가
미리 대비하고 싶은 불행은 조바심을 안깁니다.
영화는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같은 영화를 대하는 저의 태도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월애]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메시지는
과거가 후회스럽고 미래가 두려운 딱 그 만큼
지금의 사랑과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삶의 진실입니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기에...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
그 경계인 현재의 시점에 당당히 서서
시간이 안기는 미련과 무력을 초월할 수 있는 삶이
가장 아름답기에...
댓글
  • 나탄돌라 2020/05/06 04:52

    30만명중 한명의 동지 입니다 ㅎㅎ 당시 이 영화의 팬 페이지를 나모웹에디터로 밤새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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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20/05/06 04:54

    나탄돌라// 아... 그러셨군요 ㄷㄷㄷ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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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자이라라 2020/05/06 05:01

    이 영화 보고서 도둑들이랑 암살보면 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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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ewalsh 2020/05/06 05:07

    감동깊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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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20/05/06 05:22

    안자이라라// 전지현 스무 살 때 찍은 영화죠. 엽기적인 그녀보다도 더 빠른 영화니. 이 영화 속 연기는 솔직히 지못미 수준이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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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20/05/06 05:22

    joewalsh//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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