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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관저 식탁에서의 2시간 강의
-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2003년 3월 중순, 대통령이 4월에 있을 국회 연설문을 준비할 사람을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늘 ‘직접 쓸 사람’을 보자고 했다.
윤태영 연설비서관과 함께 관저로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과 독대하다시피 하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다니.
이전 대통령은 비서실장 혹은 공보수석과 얘기하고, 그 지시내용을 비서실장이 수석에게, 수석은 비서관에게, 비서관은 행정관에게 줄줄이 내려 보내면, 그 내용을 들은 행정관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를 원했다.
“앞으로 자네와 연설문 작업을 해야 한다 이거지? 당신 고생 좀 하겠네. 연설문에 관한한 내가 좀 눈이 높거든.”
식사까지 하면서 2시간 가까이 ‘연설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특강이 이어졌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이후에도 연설문 관련 회의 도중에 간간이 글쓰기에 관한 지침을 줬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자네 글이 아닌 내 글을 써주게. 나만의 표현방식이 있네. 그걸 존중해주게. 그런 표현방식은 차차 알게 될 걸세.
2. 자신 없고 힘이 빠지는 말투는 싫네.
‘~ 같다’는 표현은 삼가 해주게.
3. ‘부족한 제가’와 같이 형식적이고 과도한 겸양도 예의가 아니네.
4. 굳이 다 말하려고 할 필요 없네. 경우에 따라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연설문이 될 수 있네.
5. 비유는 너무 많아도 좋지 않네.
6. 쉽고 친근하게 쓰게.
7.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쓰게. 설득인지, 설명인지, 반박인지, 감동인지
8. 연설문에는 ‘~등’이란 표현은 쓰지 말게. 연설의 힘을 떨어뜨리네.
9. 때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방법이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킹 목사의 연설처럼.
10.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
11. 수식어는 최대한 줄이게. 진정성을 해칠 수 있네.
12. 기왕이면 스케일 크게 그리게.
13. 일반론은 싫네. 누구나 하는 얘기 말고 내 얘기를 하고 싶네.
14. 추켜세울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추켜세우게. 돈 드는 거 아니네.
15.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대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16.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17. 통계 수치는 글을 신뢰를 높일 수 있네.
18.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머리에 콕 박히는 말을 찾아보게.
19. 글은 자연스러운 게 좋네.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게.
20. 중언부언하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하네.
21. 반복은 좋지만 중복은 안 되네.
22.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넣지 말게.
23.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하게. 뒤는 잘 안 보네. 문단의 맨 앞에 명제를 던지고, 그 뒤에 설명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좋아하네.
24. 사례는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25.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주게. 헷갈리네.
26. 나열을 하는 것도 방법이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대선자금 수사…’ 나열만으로도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전달할 수 있지 않나?
27. 같은 메시지는 한 곳으로 몰아주게. 이곳저곳에 출몰하지 않도록
28. 백화점식 나열보다는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줄일 것은 과감히 줄여서 입체적으로 구성했으면 좋겠네.
29.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이 쓰는 것이 좋네. 영토 보다는 땅, 치하 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30. 글은 논리가 기본이네. 좋은 쓰려다가 논리가 틀어지면 아무 것도 안 되네.
31. 이전에 한 말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네.
32.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은 쓰지 말게. 모호한 것은 때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가는 방향과 맞지 않네.;
33.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대통령은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지만, 이 얘기 속에 글쓰기의 모든 답이 들어있다.
지금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음식에 비유해서 글쓰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1. 요리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너무 욕심 부려서도 안 되겠지만.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2.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재료가 좋아야 하지. 싱싱하고 색다르고 풍성할수록 좋지. 글쓰기도 재료가 좋아야 해.
3. 먹지도 않는 음식이 상만 채우지 않도록 군더더기는 다 빼도록 하게.
4. 글의 시작은 에피타이저, 글의 끝은 디저트에 해당하지. 이게 중요해.
5. 핵심 요리는 앞에 나와야 해. 두괄식으로 써야 한단 말이지. 다른 요리로 미리 배를 불려놓으면 정작 메인 요리는 맛있게 못 먹는 법이거든.
6. 메인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해. 해장국이면 해장국, 아구찜이면 아구찜. 한정식 같이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하지.
7. 양념이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잖아. 과다한 수식어나 현학적 표현은 피하는 게 좋지.
8. 음식 서빙에도 순서가 있잖아. 글도 오락가락, 중구난방으로 쓰면 안 돼. 다 순서가 있지.
9. 음식 먹으러 갈 때 식당 분위기 파악이 필수이듯이, 그 글의 대상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해. 사람들이 일식당인줄 알고 갔는데 짜장면이 나오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10 요리마다 다른 요리법이 있듯이 글마다 다른 전개방식이 있는 법이지.
11. 요리사가 장식이나 기교로 승부하려고 하면 곤란하지. 글도 진정성 있는 내용으로 승부해야 해.
12. 간이 맞는지 보는 게 글로 치면 퇴고의 과정이라 할 수 있지.
13.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최고지 않나? 글도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해.
이날 대통령의 얘기를 들으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분을 어떻게 모시나.
실제로 대통령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또한 스스로 그런 글을 써서 모범답안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다짐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배우는 학생이 되겠다고.
대통령은 깐깐한 선생님처럼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설비서실에서 쓴 초안에 대해 단번에 오케이 한 적이 없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김대중 대통령,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 하신분

읽고 감탄함.



댓글
  • notme 2017/03/07 21:10

    전에도 보고 감탄했던 적 있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다시 보고 스크랩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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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숭아씨 2017/03/07 21:17

    이 책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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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HILIST 2017/03/07 21:28

    제 기준으로 노무현이란 사람은 한국에서 소설가 제외하고 가장 글 잘쓰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정치인이라는 이름에 가려져서 그렇지 글의 담겨있는 지식의 폭이며 깊이며 흐름까지..
    무엇보다 문장의 구조가 아주 간결하면서도 진실합니다 정말 매력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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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브액츄얼리 2017/03/07 21:43

    파파이스에서 저도 봤어요!! 노대통령님 일화 들으며 유쾌하고 또 유익했어여 저자분 진짜 재밌으시다능~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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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wch 2017/03/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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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위의바다 2017/03/07 2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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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깨이불 2017/03/07 22:58

    스크랩합니다
    필요한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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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요리사 2017/03/07 2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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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발뒤에서 2017/03/07 2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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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심믹스 2017/03/07 23:12

    스크랩하고 내려왔더니 님들맘이 내맘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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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톤이스탁흐 2017/03/07 23:12

    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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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레♥ 2017/03/07 23:13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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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의물결 2017/03/07 2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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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RangNolJa 2017/03/07 23:28

    글과 목표에 대한 신념과 생각의 깊이까지.. 좋은 말씀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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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놔라놔놔 2017/03/07 23:28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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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호학과 2017/03/07 23:29

    스크랩했어요..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을 짧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었어요
    정확하되, 분명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쉽게
    무심코 클릭한 게시글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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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타구피 2017/03/07 23:38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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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모수 2017/03/07 2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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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스트리퍼 2017/03/07 23:52

    제가 저 연설비서관이었다면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을 겁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아마도 '좃됐다'.
    그래도 즐거웠을 겁니다.
    뭐뭐 같아요. 이런 용법을 저 어렸을 적 아부지가 티비 보시다가 누가 얘기하는 걸 보고선 한말씀 하신 적도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2번에 지적하신 것 같이요. 말을 하되 책임감 없는 어법인 거죠.
    난 말을 했으나 누군가의 생각을 조금 가져왔을 뿐 내 책임은 아님. 이런 의미가 내제돼 있다는 걸 울아부지는 아셨는가 봅니다.
    그 덕분에 간단한 댓글 달 때도 아직도 좀 부드럽게 쓸라치면 그런 거 같아요라고 쓸 때 굉장히 그슥합니다. 아우 아부지.
    본문 읽다보니 갑자기 욱한 기억이 올라와서요 ㅋㅋㅋㅋ
    그래서 고맙습니다. 아부지도 노무현 대통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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