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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16~17세기 일본의 필리핀 침공 계획

 1592년, 전국통일이라는 과업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합니다.

목표는 조선이 아닌 명나라의 정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에피소드이며, 한일갈등의 원형이 된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히데요시의 구상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동남아의 큰 섬.... 필리핀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필리핀인가?
16세기 일본은 의외로 다수의 기독교 신자가 있던 나라였습니다. 극동의 예루살렘.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처음 포교를 시작한 이래, 일반 평민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이묘들이 기독교에 귀의하였습니다. 천하포무의 야심을 가졌던 오다 노부나가는 심지어 이들을 비호하고 불교세력의 대항마로 삼았을 정도였으며, 기독교의 위세는 점점 강력해졌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사후 히데요시는 외국인들과 결탁하는 기독교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오부나가와는 달리 정통성 측면에서도 부족하여 일본 토착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 불미스러운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스페인 상선이 일본에 내항하였을 때 당국은 그 배의 화물을 모두 압수하려고 하자, 선장은 스페인 제국의 위대함을 말하며 우리 화물 하나라도 건드리면 스페인 제국의 위력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이는 선장의 블러핑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노부나가가 선물받은 지구의를 통해 스페인 제국의 범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이는 꽤나 우려스러운 일이었고, 대부분의 스페인상선과 선교사들이 필리핀을 통해 건너온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화근을 없애려면, 필리핀을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스페인과 일본의 첩보활동
필리핀과 정기적으로 무역을 하던 일본인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라다 키에몬. 그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도요토미의 충직한 신하였고, 1591년 루손에서 돌아와 도요토미에게 필리핀에 대한 정세를 설명합니다. "필리핀의 방어태세는 보잘 것 없으니 손쉽게 취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필리핀 총독에 거만한 서신을 보내 조공단을 보내지 않으면 무력으로 섬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필리핀 주재 스페인인들도 일본의 정세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1580년대 후반부터 일본정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고, 나날이 증강하고 있는 일본의 무력을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1591년의 서신은 이 우려를 확증시켜주는 좋은 증거가 되었죠. 이에 따라 사절을 파견하고 현지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겸 1592년 수도사 후안 코보(Juan Cobo)와 귀화한 중국인 안토니오 로페스(Antonio Lopez)를 일본에 파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히데요시가 조선침공을 위해 축성한 나고야 성을 방문해 그곳의 일본측 관리들과 회담을 합니다. 일본 측은 이들 사절에게 필리핀의 군세는 얼마나 되는가 물어보았고, 스페인 측은 4,000에서 5,000 쯤 된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이는 블러핑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천명도 안되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일본 측은 비웃으면서, 일본인 100명이 스페인 측 2~300명은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절단은 곧 필리핀에 귀국하고 일본의 실상을 필리핀 총독에게 보고했습니다. "일본은 필리핀 침공을 하라다 키에몬에게 맡길 생각이다.", "일본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빈곤한 나라인 조선에는 관심이 없으며 필리핀에 가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 "일본은 최근 3척의 거대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일본은 필리핀을 공격했을 때 스페인 측의 원군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우리 병력이 4000~5000이라고 하니, 일본은 1만명을 파병할 계획이다"  안토니오 로페스는 일본의 침공의도를 가감없이 보고하였고, 여기에 더해 일본과 필리핀의 거리는 20일인데, 멕시코와 필리핀의 거리는 4개월이어서 원군이 오기 힘들다는 점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분명 류큐와 대만을 거쳐 필리핀에 올 것임을 예상하였고, 이 침공 루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대로 구현되었습니다. 필리핀 총독은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방비태세를 준비했습니다. 퇴역연령인 사람들까지 모아 가까스로 1,500명 정도의 수비병을 구성하였고, 기지를 요새화했으며 필리핀 거주 일본인들을 감시하고 별도의 구역에 집중시켰습니다 (소위 말하는 집단 수용소이죠...). 그리고 루손에 출입하는 모든 선박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특히 재화의 반출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임진왜란의 진행결과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군대는 장기전의 늪에 빠져버렸고, 해상보급에 철저히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큐슈에서 한반도까지의 보급도 제대로 못하는데, 필리핀까지는 더더욱 하지 못할 터. 스페인은 이 점을 명확히 보았습니다. 조선에서의 전장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부의 반란에 대해서도 겁을 먹었는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1597년 스페인 수도사들이 처형당했고, 그 중 한명은 필리핀에 편지를 보내 "신이 자비가 없다면, 도요토미는 반드시 류쿠와 대만을 병합하고 필리핀을 향해 진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는데, 신의 자비가 있었던 것인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었고 필리핌 침공계획도 백지화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정권의 필리핀 침공계획
1622년,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이에 스페인은 또 한차례의 공격에 대비하여 1624년 증원군을 파견하길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직된 증원군은 마카오의 수비보다는 사적은 노략질 활동에 치중하였고 그 와중 시암왕국(태국)으로 향하던 일본 무역선을 공격했습니다. 해당 무역선은 쇼군의 인장을 득한 선박으로, 이에 대한 공격은 쇼군의 존엄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스페인 측은 곧 해당 사건에 대한 배상을 했고, 문제를 더 확대시키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려면서도 자체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를 4가지로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독교를 이유로 일본과의 무역에서 스페인을 배제시킨 점 (2) 스페인의 대사파견을 거부한 점 (3) 과거 필리핀 침공을 공공연히 위협한 점 (4) 일본은 필리핀을 꼭 확보해야 하는 미래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이 당시 필리핀 주재 스페인 총독은 일본을 진정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열렬한 반기독교주의자이며, 필리핀침공 옹호론자였던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로주들(막부의 중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습니다.
"루손은 서양국가(스페인)에 의해 통치되고 있고, 남만(포르투갈)과 함께 우리나라를 침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일본으로 건너오는 모든 이들은 루손을 경유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루손을 정복하여, 서양인들의 본거지를 파괴할 계획이니 이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쇼군은 이를 완전히 윤허하지 않았지만, 그의 논지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였는지 일단 군사계획을 수립하고 잠재적 목표물과 방법 등을 알아보라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시게마사는 10명의 스파이를 상인으로 위장하여 마닐라로 파견했습니다. 그동안 시게마사는 군사준비를 지속하였고, 대략 6천명에 달하는 군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귀국한 스파이들은 어떤 보고를 남겼는지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스페인 측 자료는 남아있습니다. 그 결과 알고보니 스페인은 스파이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유력자들은 우리를 공격할 모의를 하였고, 지난 1월 두 척의 배를 무역선으로 위장하여 우리에게 보냈다. (중략) 우리는 그들을 화려하게 환대하여 선물을 주었고 동시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모든 준비를 하였다"
이는 스페인이 의도적으로 이들에게 마닐라의 무력과 방비태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필리핀 침공의 가장 열렬한 제창자였던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의 침공계획 역시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네덜란드의 협조와 시마바라의 난
시게마사의 사후 5년 간 필리핀 침공계획은 보류되었으나 일본의 기독교도들이 계속 마닐라로 탈주하고 있었고, 이들이 일본본국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문제를 근원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다시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고, 다른 서양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구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 말이죠. 스페인/포르투갈에 대한 적대감은 네덜란드와 일본이 공유하던 것으로 일본의 당국자들은 마닐라 침공계획에 네덜란드의 선박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마닐라가 1637년 이미 동아시아에서 가장 요새화된 요충지임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무모한 공격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본 측에 네덜란드인들은 군인이 아니라 상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어필했습니다. 그러자 나가사키의 부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의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불응할 시 일본과의 무역도 끝난다는 점을 암시하였습니다. 당연 현지의 네덜란드 상관은 이런 어마어마한 요청을 바로 수락할 수 없었고, 상부측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보고서가 VOC의 결정권자들에게 도달하였고, VOC는 결국 6척의 선박을 제공하기로 약조했습니다. 
네덜란드의 협조가 확실해지자 쇼군은 필리핀 침공계획을 윤허하였습니다. 그런데....
1637년 말,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근세 일본사상 최대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 유명한 시마바라의 난입니다. 그 난을 진압하는 데 무려 1년이나 걸렸고, 네덜란드의 포격에도 하라성을 쉽게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도쿠가와 정권에게 큰 충격을 남긴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학살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침공을 완전히 단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국내난을 진압하지 못했는데, 해외원정은 더더욱 힘들 터. 
그 대신 도쿠가와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통해 포르투갈/스페인의 선박의 입항을 완전히 금지하였고, 그 이후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스페인의 사신들을 오는 족족 처형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역체제를 다시 정비하여 나가사키에 데지마를 건설하였 네덜란드와의 통상만을 허용하고, 네덜란드를 통해 포르투갈/스페인의 동향을 계속 보고받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필리핀 진출계획은 결국 300년 후 태평양전쟁 때 구현되었으나, 그 기원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출처: Stephen Turnbull, Wars and Rumours of Wars: Japanese Plans to Invade the Philippines, 1593~1637
댓글
  • 갈마아재 2020/01/15 12:54

    재밋네요..ㅎ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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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A_V12 2020/01/15 12:58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확실히 힘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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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rnish 2020/01/15 12:59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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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今春花如雪 2020/01/15 12:59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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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쟁이 2020/01/15 13:18

    [리플수정]충무공이 전세계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셨군요..만약 조선이 쉽게 쓸렸다면...일본넘들 스페인이랑 한판 했었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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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반다인 2020/01/15 15:14

    조선 침공 하지말고 필리핀부터 갔다면 역사가 크게 요동쳤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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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데쿠 2020/01/15 20:23

    우리나라와 일본이 최인접국으로 분쟁의 역사가 길지만, 한일문제 역시 한일간의 관계만으로 보기보다 보다 더 넓은 시각과 변수들을 고려할 때서야 보이는게 많은 거 같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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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니라니 2020/01/15 21:33

    당시 유럽 열강들도
    일본을 함부로 못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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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썸핫 2020/01/15 21:4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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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부세 2020/01/15 22:39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과 왜의 국력 차이가 엄청 벌어졌군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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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ㅊㄹㄹ 2020/01/15 22:48

    [리플수정]라니라니// 만리타향이라 그렇지 실제로 스페인 식민지군이랑 일본 정규군은 아니지만 왜구랑 맞붙은적 있는데 20배가 넘는 숫적우세에도 압도적 격차로 왜구가 쳐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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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ㅊㄹㄹ 2020/01/15 22:52

    [리플수정]비슷한 시기에 카가얀 전투라고 스페인 식민지 주둔군 40명이 1000명 단위의 왜구를 말그대로 개박살낸 전투가 있지요 100년뒤 정성공이 이끄는 2만명의 철기군도 네덜란드 식민지군 2000명이 지키는 잘란디아 요새를 화포전력을 보유했음에도 무려 1년동안이나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동서양의 군사력 격차라는게 이미 16세기면 상당히 벌어져 있었어요. 실제로 필리핀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아퀘부스총 외에는 제대로 된 화기는 구경도 하기 힘든 당시 일본군으로는 말그대로 압도적인 화력차이에 참교육 당하고 망신만 당할 공산이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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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ㅊㄹㄹ 2020/01/15 22:59

    [리플수정]18세기즈음 가면 서구물 먹기 시작한 동남아 국가들의 군대가 10만 20만의 청나라 대군을 쥐락펴락 하면서 가지고 놉니다. 당대 청나라가 아편전쟁때의 막장국가도 아니고 한끗발 날리던 건륭제 시절임에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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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ㅊㄹㄹ 2020/01/15 23:04

    [리플수정]카가얀전투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 외에도 전국시대에 모리가문의 정규군이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에 탈탈 털린 기록도 있지요. 당대 일본군이 100년의 내전으로 단련됬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전국시대를 로마제국 멸망부터 베스트팔렌 조약전까지 경험 했던 서구국가 군대의 전투역량에는 한참 못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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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복방 2020/01/15 23:47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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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ㅊㄹㄹ 2020/01/15 23:47

    [리플수정]이외에도 1609년에 도쿠가와의 명에 따라 포르투갈 무장상선 한대를 나포시키기 위해 나가사키 지방관이 3000명 가량의 사무라이를 대동하여 2차례에 걸쳐 공격한적 있는데 1차는 화포에 일본 선박들이 박살이 나 실패하고 2차공격은 치열한 총격전 끝에 몇명의 사무라이가 선내진입에 성공했지만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칼부림 한번 못하고 서양검술에 밀려 도륙나버린 사건도 있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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