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129646

[단편] 완벽한 추리소설 작가의 고뇌

전에 누군가, 그가 쓰는 소설의 단어 하나당 가격을 측정해본 적이 있었다.

그가 여태껏 소설로 벌어들인 총 수익을 나누어 대입해본 결과, 한 단어당 약 150만 원. 
그는 '안녕' 한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150만 원의 수익을 벌어들일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였다.

한데, 지금 노트북 위에 올려진 그의 손가락은 하나의 단어도 써내지 못하고 있었다.
슬럼프. 지독한 슬럼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에 1권을 강박적으로 지켜오던 그는, 올해 처음으로 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 하아- "

한숨을 내쉰 그는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역시, 억지로 쓴다고 써지는 게 아니었다.
멍한 얼굴로 책상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며칠 전 보았던 팬레터가 들어 있었다.

" ... "

전 세계에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팬레터가 하루에도 수백 개였다.
그래서 보통은 팬레터를 챙겨 보진 못했지만, 특이하게도 이 편지는 그의 별장으로 도착해 있었다.
머리를 식힐 겸 찾아온 별장에서 편지를 발견한 그는, 오랜만에 팬레터를 읽었다. 
한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 작가님의 소설에 나오는 방법으로 살인을 했습니다. ]

첫 줄부터 그를 어이없게 했던 것이다.
가만히 서랍 속 편지를 바라보던 그는, 편지를 꺼내 들고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 - - - -
작가님의 소설에 나오는 방법으로 살인을 했습니다.
전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점이 없었습니다. 8권 모두 말입니다!

역시 작가님은 완벽합니다. 이 세상에 작가님처럼 완벽한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덕분에 전 8번의 살인을 무사히 해낼 수 있었습니다.
불행하던 제 인생은, 작가님 덕분에 의미 있고 즐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걱정이 됩니다. 왜 올해는 책이 나오지 않는 겁니까? 
어서 새로운 책이 나와서 9번째 살인을 할 수 있는 그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 - - -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불쾌한 내용이었다.
분명 자신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비정상적인 팬심이었다.
보통 때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테지만, 지금 그는 슬럼프의 짜증을 배출하고 싶었다. 
그는 서랍에서 펜과 편지지를 꺼내어, 답장을 썼다.


- - - - -
당신의 편지 잘 보았습니다.
한데, 당신의 인생은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불행한 게 맞습니다.
그런 거짓말로 제 관심을 끌고 싶었다면, 실패했다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살인 타령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짜증 날 뿐입니다.
부디 불행한 당신의 삶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고, 그럴 시간에 정신병원에 가보는 것을 추천하겠습니다. 
- - - - -


거칠게 팬을 휘갈긴 그는, 편지를 밀봉했다.
이미 쓰는 행위를 끝낸 이상, 굳이 보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챙겨 일어났다.
그 정도로 그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 뭐야 이놈 진짜? "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 들린 새로운 답장에,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 - 
세상에!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작가님에게 바라는 것이 없기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는 정말로 작가님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8번의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짜릿한 경험이었고, 이제는 제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작가님께서 몇 권의 책을 쓰든, 저는 그 모든 살인을 재현할 것입니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어서 작가님께서 9번째 책을 출간하기를 바라봅니다.
- - - - -


그는 이 미친 자에게 다시 답장을 해야 함을 느꼈다. 


- - - - -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인생이 불행하기 때문이야!

왜 거짓말이냐고? 난 그런 살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당신이 정말로 8건의 살인을 했다면, 왜 한 번도 뉴스에 나지 않았지?
정말로 내 소설을 따라서 한 살인이라면, 벌써 매스컴이 난리가 나야 하지 않아?
사람들이 내 소설을 판매 중단해야 한다며 떠들어대지 않는 이유가 뭐지? 왜일까?

당신이 거짓말쟁이니까!! 
이런 실없는 거짓말로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길 바라봅니다. 낭비할 인생이 존재한다면! 
- - - - -

.
.
.


" 얼씨구, 이 새끼 또 보냈네? "

현관문 앞에 새로 도착한 편지를 집어 든 그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봉투를 뜯었다.
문을 열고 거실로 걸어가며 또 무슨 거짓말을 해대는지 내용을 확인하던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 - - - -
오! 이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군요 작가님! 
이 세상에 셜록 홈즈는 없다고요! 

작가님이 만든 소설 속 살인은 너무나 완벽하여, 모두 다 '완전범죄'로 넘어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뉴스에 나오질 않는 것이죠!

감히 누가 있어, 작가님의 완벽한 트릭을 알아챌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명탐정은 작가님 소설 속에서나 있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제가 저지른 8번의 살인은 모두 사고사나 실종, 억울한 누명으로 처리됐습니다. 해결 부분이 빠진 소설처럼 말입니다!

하하. 완벽하신 작가님이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하실 리가 없는데... 혹시 제 편지가 작가님의 신경을 거슬린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제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서 작가님의 9번째 소설이 나오기를 바라니까요!
- - - - -


" 뭐야 이거...? "

편지를 읽고 난 그의 머리는 복잡했다. 특히,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그랬다.

" 이 새끼 진짜야 뭐야?? "

그동안 그는 당연히 편지가 거짓말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 편지 내용을 보니 어딘가 마음이 찜찜해졌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미간을 좁히며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걸음을 빨리해 노트북 앞으로 향했다.
곧장 인터넷에 접속한 그는 살인과 실종, 사고사에 맞춘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쓴 소설의 상황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찾아보았다.
1시간가량을 찾아다닌 결과-, 

" 설마...? "

그는 몇 건의 의심스러운 죽음을 찾아냈다.

" 이, 이거 '옥상 살인사건'인가? 이건 '펜션의 독버섯'이고? 그리고 이거는 혹시-. . . "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확신할 순 없지만, 너무나 의심 가는 죽음들이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무서워졌다.
자신의 소설이 실제 살인에 이용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들을 죽게 한 게 아닌가? 8명이나!

" ... "

그는 소설을 쓰는 게 무서워졌다. 이제는, 슬럼프를 극복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
.
.
.
.
.


" 그러니까... 이 편지들 때문에 다음 작품을 쓰시기가 힘들다, 이 말씀이신가요? "
" 솔직히 그렇습니다. "
" 하아... "

편집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차기작이 안 나오는 이유가 단순 슬럼프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문제라면 곤란하다.
그의 추리소설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면? 출판사가 입게 될 피해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 저기, 선생님... 제가 보기에는 이 편지는 역시 거짓말인 것 같은데... "

조심스럽게 설득하는 편집자의 모습에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저는 솔직히... 반반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 소설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면...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
" 하이고... "

편집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큰일이었다. 작가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서는 소설이 나올 수 없고, 나오더라도 졸작일 수밖에 없다.

" 저기 그럼... 이 편지의 주인을 찾아서 검증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거짓말이란 게 밝혀진다면야~ "
" 이미 흥신소에 의뢰를 해봤지만, 그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완벽한 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의심이 가는 겁니다.. "
" 하이고... "
" 죄송합니다만... 이제 더는 추리소설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제는 아예 은퇴를... "
" 아이고 선생님! 안 됩니다~! "

편집자는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시 글을 쓰게 만들 수 있을까?
한동안 골몰하던 편집자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아! 그래요 선생님!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치죠! 그러면, 가만히 계실 겁니까? "
" ? "
" 범인을 잡아야지요!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놈을 잡아야지요! "
" 으음... "

편집자는 그의 얼굴이 굳어가는 걸 놓치지 않고, 빠르게 외쳤다!

" 제게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선생님! "
" 무슨? "
" 9번째 추리소설을 쓰시는 겁니다! "
" ? "
" 이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그놈은 분명히 또 따라 하겠죠? 그러니까 9번째 소설의 살인에는, 일부러 허점을 만들어놓는 겁니다! 이놈 말대로 너무나 완벽한 방법으로 인한 '완전범죄'가 되지 않도록, 구멍이 있는 트릭을 짜는 거죠! "
" ... "
" 그럼, 그놈이 살인을 저질러도 그 허점 때문에 경찰에 잡히지 않겠습니까? 네?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
" 으음... "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또다시 사람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런 허점이 있는 소설은...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 아... "

편집자는 씁쓸하게 탄식했다. 생각해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소설을 쓸 위인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런 인기가 있었겠는가?
다시 골몰하던 편집자는 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굳었다.

" 선생님...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 ? "
" 9번째 추리소설에... '완벽한 자살'을 넣는 겁니다. "
" ! "

그의 눈이 흔들렸다! 편집자는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 탐정이 밝혀낸 완벽한 살인 트릭의 진실이, 범인의 자살이었다면? 그런 내용의 추리소설이라면... 이놈이 과연 따라 할까요? "
" 으음... "
" 그리고 만약 따라서 자살을 한다면...그야말로 그것은 천벌이 아닙니까? 억울하게 희생된 8명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천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 완벽한 자살... 완벽한 자살... "

완벽한 자살을 되뇌이던 그는 점점,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편집자는 그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슬럼프를 극복한 천재작가의 9번째 추리소설은 크게 흥행했다.
기다려온 전 세계의 팬들은 역시를 연발했고, 출판사는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 엘리베이터 연쇄살인마의 6번째 희생자가 나타났습니다! 경찰은 특유의 살해방식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는데요, 여전히 연쇄살인마의 정체는 오리무중인-. . . ]

" ... "

그의 추리소설은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하여, 현실에는 트릭을 밝혀낼 명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 속 살인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자신의 소설에 빠진 자들이 한둘이 아닐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완벽한 소설은, 완벽한 연쇄살인마를 탄생시켰다. 영원히 잡힐 수 없는, 연쇄살인마를.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3/03 12:45

    어디서 보니까 셜록 홈즈 작가가 홈즈를 죽였다가, 광팬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에 급! 떠올라서...흐하하하
    모든 분들, 행복하세요. 저도요!

    (DJenGl)

  • 닉넴진짜대충 2017/03/03 13:14

    옥상사건과 팬션사건 모두 예전에 복날님이 쓰셨던거죠? ㅋㅋㅋ
    저 천재작가는 복날님이군요 ~_~ 이렇게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시다니....좋아요 ㅋㅋㅋ

    (DJenGl)

  • 불변인 2017/03/03 14:29

    연쇄 살인처럼 보이는 완벽한 자살들.....ㄷㄷㄷ

    (DJenGl)

  • 밤하늘새벽비 2017/03/03 14:30

    아... 완벽한 자살이기 때문에,
    홈즈같은 소설 속의 명탐정이 아니면 밝혀낼 수 없는 완벽한 자살이기에,
    그 모든게 "타살"인걸로 생각되는 거군요.
    그래서 영원히 잡힐 수 없는 연쇄살인마...

    (DJenGl)

  • 댓글한땀 2017/03/03 15:15

    한두 명이 아니었단 건가요?
    와~~~ 정말 인상 깊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DJenGl)

  • 매일매일먹방 2017/03/03 16:27

    와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DJenGl)

  • Bisu[Shield] 2017/03/03 18:39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DJenGl)

  • 구링구링ㅇ 2017/03/03 19:58

    복날님 따로 작품활동은 안하시는건가요? 오유에서만 활동하시나요?

    (DJenGl)

  • 론고 2017/03/04 19:27


    우웨에엑

    (DJenGl)

  • 노가다김모씨 2017/03/04 19:50

    10번째 작품은 왠지 주인공이 박ㄱ......

    (DJenGl)

  • 알콜중도옥 2017/03/04 20:03

    천재작가 복날님!
    사망자는 김남우!!

    (DJenGl)

(DJenG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