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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영화 [더 길티]를 보고.. 오만과 편견, 죄의식 끝에 당도한 구원 (스포 포함)


'구스타브 몰러' 감독의 덴마크 영화
[더 길티 (The Guilty)]를 보았습니다.
30세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깊이를 가진 웰메이드 스릴러입니다.
배우들의 출연료를 제외한다면
몇 억 정도 밖에는 투자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비범함은 수 천억 짜리 영화들을 압도하네요.
주인공이 청각적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상의 설정에 있어서는
[폰 부스](2002), [더 콜](2013),
[더 테러 라이브](2013)를 떠올리게 하고,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베리드](2010), [로크](2013)를 연상시킵니다.
감독 스스로 설정한 영화적 제약에서 벗어나지 않음에도
시종 답답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점,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은
작년의 수작 [서치]와도 일맥상통하구요.
그러나 [더 길티]에게 위에 언급한 영화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 건
영화의 형식상 특징이나 개성이 아니라
영화가 궁극적으로 당도하고자 했던 지점에서의
통찰과 울림입니다.
재판 중인 사건으로 현장직에서 경질된 상태에서
긴급신고센터로 옮겨 근무 중인 경찰 ‘아스게르’.
다음 날 진행될 최종 재판에 대한 긴장감으로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하던 그는
심상치 않은 신고전화를 받게 됩니다.
전화를 건 '이벤'이 납치됐음을 직감한 아스게르는
피해자인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모든 절차를 무시한 채 사건에 뛰어드는데…
지금부터 모든 소리는 이 사건의 단서가 됩니다.
영화는 긴급신고센터의 상황실을 벗어나지 않고
등장인물도 몇 명의 동료 경찰들 뿐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아스게르의 전체 모습도
프레임 안에 온전히 담기지 않고
얼굴, 귀, 등의 신체가 부분적으로 클로즈업되죠.
배경음악도 일체 배제되고
영화를 지배하는 건 헤드셋 너머 들려오는
상대방의 음성과 소음들 뿐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 청각적 정보만으로
관객들은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상상력이 개입되겠죠.
정교하게 배치된 탁월한 사운드 디자인은
대사와 소리만으로도 전개되는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그러나 상상력 외에 또 한 가지가 개입합니다.
바로 개인적, 사회적 편견...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관객들의 처음 상상, 판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감각을 통한 인지를 실제의 현실과 다르게 하는 건
우리의 심리에 잠복하는 각종 편견들입니다.
아스게르가 왜 그렇게 이 사건에 집착하는 지가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겠죠.
근무시간을 넘기고
긴급전화센터 요원으로서의 권한을 넘어서까지
그는 사건에 개입하고 심지어 사건을 지휘하려 합니다.
영화의 중반부에서는 그 동력이
경찰로서의 직업적 정의로움과 열정으로 보이죠.
그러나...
그건 바로 아스게르의 죄의식 때문입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였던,
그의 감정적이며 신경질적인 반응과 태도는
다음 날 있을, 자신의 재판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감과 무관하지 않고
그 불안감의 근원은 죄책감입니다.
이벤의 말에서 언급된 뱀을 근거로 더 확장하자면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원죄의식.
그 죄책감과 원죄의식은 아스게르로 하여금
이벤의 구출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만들죠.
아스게르는 이벤을 무사하게 구출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아스게르는 기어이 스스로
자신이 유죄임을 고백합니다.
왜 사람을 죽였냐는 이벤의 질문에
아스게르는 "그럴 힘이 있어서"라고 답하죠.
자신의 판단이 전지전능하다 믿었던 오만,
악을 스스로 단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
그 오만이 야기했던 끔찍한 편견,
오만과 편견이 끝내 직면하게 된 무력감 앞에서
아스게르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제목은 비로소 납득되구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영화는
소리 못지않게 침묵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결국, [더 길티]는
형식상의 재치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범죄사건의 실체를 좇는 스릴러가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그의 심리와 양심이 어떻게 변화를 일으키는 지를
예리하게 조명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야곱 세데르그렌'.
[새디스트]라는 영화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스웨덴 국적의 이 배우는
그야말로 혼자만의 힘으로 영화를 끌어가면서
수렴하는 연기의 정석을 선보입니다.
특히, 엔딩에서의 그의 표정은 잊을 수 없네요.
온갖 감각적 정보들이 넘쳐나고
현란한 그래픽을 총동원해 눈을 호사시키는,
더 나아가 눈을 혹사시키는 영화들에게
짜증과 염증을 느끼던 시점에 찾아 온 이 영화는
보석과도 같은 희소함으로 만족감을 줍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영화의 힘은 우선적으로 각본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훌륭한 각본을 가능하게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심오한 탐구와 통찰이겠죠.
자살을 암시하던 이벤의 전화는 결국 끊기고
아스게르는 자신의 오만과 편견이 만들어낸,
죄의식이라는 이름의 지옥 속에 갇힙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이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기적적으로 찾아오는 구원...
비로소 마음 속의 짐 하나를 덜어내고
문 앞에 선 아스게르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역광으로 포착합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폰을 들고있는 그.
이제 문을 열면
모든 감각들이 다시 그를 맞을 것이고
환한 빛의 세계가 다시 그를 기다리겠죠.
그 감각이, 그 빛이
이전과 조금은 다르게 다가올 것임을 믿습니다.
더불어...
아스게르의 오만과 편견에
자기도 모르게, 또는 기꺼이 동참했던 우리들도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댓글
  • 나저씨 2019/04/02 02:33

    이런류 영화는 처음봤을때만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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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dradio 2019/04/02 02:48

    누군가에게는 그저 괜찮다 정도로 느껴졌던 영화도 혁명전야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군요. 저도 이 영화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뺀 스타일을 좋아하는 제 취향 때문에 주인공의 연기는 약간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구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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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04/02 02:49

    나저씨// 그게 스릴러의 운명이겠죠. 반전과 결말을 알게 된 순간 극의 긴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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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04/02 02:51

    sadradio// 단순한 스릴러로서 머물기엔 아까운 작품인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상당히 깊고 무거운 드라마로 읽었거든요. 남주가 조금 더 힘을 빼주길 원하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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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루이지 2019/04/02 10:29

    유튜브로 소개영상 봤는데
    소개영상마저 몰입하면서 봤네요
    꼭 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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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lythew 2019/04/02 12:04

    잘봤습니다.
    새디스트 추천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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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04/02 12:46

    슈퍼루이지// 즐감하셨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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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04/02 12:46

    flythew// 영화는 망작입니다. ㅠㅠ (여주는 이쁘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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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투추추 2019/04/02 12:47

    초반 형식에 매료되고 후반 내용에 압도되는 영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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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04/02 12:48

    투투추추// 짧지만 아주 정확한 평가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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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어칸 2019/04/02 14:23

    오 저도 주말에 봤는데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정말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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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구 2019/04/02 18:13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들이 좀 있죠.. 전 이 영화가 전혀 신선하게 느껴지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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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타스틱전군 2019/04/02 18:54

    글쓴분 추천이라면 일단 감상부터 할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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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otify 2019/04/02 20:03

    악질경찰 이후로 믿고 거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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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기남 2019/04/02 20:07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저는 다 보이더군요ㅎㅎㅎ 상상속에서 모든 것들이 그려졌습니다. 러닝타임도 적당하고, 또 신기했던게 덴마크어인지 전혀 대사가 들리지 않아 몰입감도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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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요정 2019/04/02 20:49

    일단 다섯단락까지만 읽었는데...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진짜 넘나 땡기는 영화네요!!!!
    읽은 단락까지의 예로 들어주신 영화들을 다 엄청 잼나게 봤던지라...
    이 영화도 진짜 기대되네요
    과연 어떠한 내용의 스릴러인지 어떻게 기존의 영화들과 차별점을 두고 있는지 집중해서 봐야 될거 같네요
    요즘 스릴러 많이 못본거 같기도 한데 이 영화는 시간내서 얼른 봐야될거 같네요
    항상 좋은 영화 추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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