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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117)

 


 



 겨울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거리의 성급한 몇몇 총각들은 벌써 반바지에 멋진 운동화를 뽐내기 시작했고, 지난주 봄 신상품 쇼핑을 마친 처녀들은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었다.


 아직 일교차가 크다는 게 문제다. 도무지 어울리기 힘든 외투도 함께 어울려야했다. 봄 치마에 겨울스웨터를 걸치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반바지에 점퍼를 걸친 친구들이나 샌들에 코트를 걸친 아가씨들이 거리에 다양성을 부여했다.


 포근해지는 햇살과 차가운 바람이 어울려 겨울을 지우고 봄날을 가져온다. 길가에 개나리꽃이 피기 시작하고 목련꽃이 눈송이처럼 가지사이에 맺히며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럭저럭 설레는 마음과 상관없이 또 올해도 이만큼이나 왔다는 생각에 바빠지기도 하고, 지루한 일상에 어울릴만한 새로운 구상을 하며, 혹시라도 내게 찾아올지 모를 인연을 기대하기도 한다.


 축복받은 봄날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유성현에게는 매우 바쁜 아침이었다. 주거래 업체에서 신규유통업체와의 계약 전에 검토해야할 독점계약확인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주거래 업체에서 독점결정을 반대할 경우와 찬성할 경우에 대한 모든 대비가 되어있긴 했지만, 어떤 결정이라도 나와야 유성현 측에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곧 회신하겠다는 대답을 두 번쯤 들었는데, 거기에 대고 독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거래 업체를 압박할 수도 없고, 그런 기분이 들게 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신상품의 품질에 꽤나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디자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라 제조과정에 앞선 모든 순서를 되짚어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디자인팀의 팀장이 과도한 업무로 인해 쓰러져버렸다. 당장 대체할 책임자를 구할 수는 없더라도, 진행하던 일을 맡길 사람은 결정해야 했다. 


 유성현이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린 건, 일련이 업무적 과정들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은 작은 회사의 임원이라기보다는 책임자들과 정신없는 회의를 방금 끝냈기 때문도 아니다. 



 “아흑! 바쁘다며?”


 “응. 정말 바쁘니까 빨리 할게요”


 “미쳤어. 정말. 누구 오면 어쩌려고~”


 “다들 바쁘다니까? 바쁜데 누가 오겠어?”



 좁은 비품창고에서 유성현은, 그와 공동사업자인 김은진의 비서이자 매니저인 강보람의 속옷을 벗겼다. 유성현은 걷어 올리기 힘든 강보람의 보수적이고 깐깐한 치마가 마음에 들었다. 무릎근처까지 오는 스커트를 강보람의 허리까지 말아 올린 유성현이 강보람을 엎드리게 했다.


 회의를 진행하는 와중에 강보람이 서류를 건네기도 하고 자료화면을 여느라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그럴 때마다 유성현은 강보람의 치마에 가려진 엉덩이를 바라봤다. 무릎까지 내려오지만 타이트한 강보람의 스커트는 훌륭한 몸매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강보람이 매우 굉장한 가슴의 소유자라는 사실보다 당장에 보이는 저 커다란 골반과 엉덩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강보람의 타이트하고 긴 스커트에 불평할 수 없었다. 되레 그 긴 스커트를 걷어 올리는 과정이 전희가 되었고, 유성현은 회의시간 내내 바라보던 강보람의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강보람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지만, 유성현은 그런 강보람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장의 욕구보다 부끄러움과 불편함에 투덜거리는 강보람이 너무 귀여웠다. 다시 안아줄 시간이 없다는 게 괴로울 지경이었다.


 유성현이 차림새를 다듬는 강보람에게 말했다.



 “미안. 나머진 밤에 채워줄게요”


 “뭐야. 반말했다 안했다 그래? 그리고 우리 너무 이러는 거 좀 그렇잖아요.”


 “내가 보람 씨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시는구나.”


 “어떻게 알아”


 “그렇다면, 그게 더 미안하네요. 제가 보람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꼭 확인시켜 드릴게요.”


 “그러지 마요. 요즘 너무 자주해서 좀 힘들어요.”


 “네? 아뇨!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제 마음을 전할 거예요.”



 창고에서 더 오래 있긴 어려웠다. 유성현은 지금 당장 많은 얘기들을 해주고 싶었지만, 해결해야 할 많은 일거리들이 있다. 오늘밤 유성현은 강보람에게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사랑한다는 고백은 여러 번 해왔다. 오늘밤 유성현은 강보람에게 결혼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다. 


 유성현이 먼저 창고에서 나왔다가 김은진과 마주쳤다. 김은진은 눈짓으로 창고 문을 가리켰고 유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진은 창고 안의 강보람이 들으라는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현. 지금 당장 봐야 할 서류가 있으니까 나 좀 따라와!”


 “네!”



 김은진은 강보람이 창고에서 편히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일부러 유성현을 데리고 사무실로 향하며 말했다. 창고 안의 강보람은 두 사람이 멀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김은진이 유성현에게 말했다.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네게는 잘 된 것 같네.”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공동대표가 사귀는 것보다 사내연애가 차라리 낫겠지. 단지 네가 일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러는 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아?”


 “주의할게요.”


 “나하고 이러지는 않았잖아? 보람 씨랑 얼마나 깊은 사이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좋은 일이네.”


 “우리 사이의 일들은.......”


 “당연히 비밀이지. 나보다 네가 더 지켜줘야 할 일 아니겠니. 나도 괜찮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내 기준에 넌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


 “다행인건가요?”


 “아쉬운 일이지. 아무튼 입 조심하고, 충분히 괜찮은 거짓말들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봐. 보람 씨는 좋은 사람 같으니까. 사실. 나도 네게 괜찮은 여자가 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고 일을 좀 해라. 지금 상황이 많이 바쁘잖아? 디자인 쪽 일은 내가 해결 할 테니까, 독점계약확인서를 어서 받아와”



 유성현이 사무실을 나오다 돌아오는 강보람과 마주쳤다. 긴장해서 창백해진 강보람의 얼굴을 보니까 다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뒤통수가 간질거려서 그럴 수 없었다. 그저 가볍게 인사하며 지나치려던 유성현이 결국 참지 못했다. 강보람의 손을 잡아당겨 입술에 키스했다. 강보람의 부끄러움이 입술로 전해지는 게 좋았다. 


 뒤에서 김은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보람 씨. 일 좀 합시다. 오전 회의 정리 되는대로 제게 좀 주세요.”


 “네!”



 강보람이 유성현을 째려보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유성현은 기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가 되겠지만, 어쩐지 모든 일들이 잘 될 것 같았다. 차에 걸리는 시동 소리도 경쾌하게 들렸다. 햇살이 눈부셔 강보람이 사준 선글라스를 끼고 차를 출발 시켰다. 



 주거래 업체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더니, 경비가 유성현을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유성현이 한숨을 내쉬고 경비에게 말했다.



 “누굴 두들겨 패러 온 게 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왔어요.”


 “키 맡기고 올라가세요. 누굴 패려면 회사 안에서 하세요. 경찰 출동하면 귀찮으니까”


 “넵!”



 유성현이 차를 주차시키고 로비로 올라오다 한수진을 만났다. 서로를 발견한 유성현과 한수진은 한숨을 내쉬며 서로의 끈질긴 인연을 지겨워했다. 서로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보내던 두 사람 중에 유성현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제 선생님 아니야. 그만뒀어.”


 “아. 얘기 들었어요. 아니, 뉴스에서 봤어요. 외모만으로도 두 분 잘 어울리더군요.”


 “시끄러워.”


 “그런데 그 분이랑은 나이 차이가 좀 나는 거 아닌가요?”


 “시끄럽다고 했잖아. 여긴 웬일이야.”


 “조용히 하라니까. 여전히 선생님 같네요. 전 일이 있어서 왔어요. 선생님은요? 참. 주차장에서 못 봤는데, 택시 타고 왔어요?”


 “난 그냥 정문에다 차를 두고 내려도 괜찮아. 나도 일이 있어서 왔어. 넌 무슨 일인데?”


 “아~ 좀 복잡한 일인데, 저희가 진행하는 일에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요. 빨리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 좀 늦어지네요. 선생님은요?”


 “이제 선생님 아니라고 했잖아. 난 여기 사장으로 취임해도 괜찮은 상황인지 살피러 왔어.”


 “아. 네. 사장님? 예? 아니 왜요?”


 “돈 많고 늙은 영화배우와 결혼하려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 뭐 실제로 돈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지만.”



 유성현의 턱이 빠질 듯 튀어나왔다. 한수진은 그런 유성현을 무시하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탔다.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유성현의 모습에 한수진이 한숨을 내쉬고 손짓했다.



 “안 타니.”


 “아. 네. 예. 뭐. 그 분이 그 정도로 늙어 보이지는 않는데요.”


 “메이크업 하지 않은 얼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아니, 그보다 참. 여기 사장이 되시겠다고요? 뭐든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건가요? 대통령이 되는 건 어때요. 선생님? 아니, 사장님?”


 “귀찮을 것 같아.”


 “그렇군요? 와. 굉장하네요.”


 “난 11층으로 가는데, 넌 어디로 가니. 아직 층을 누르지도 않았잖아.”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5층을 지나고 있었다. 그제야 유성현이 아직 담당자에게 전화도 걸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한수진이 이번엔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됐어. 난 시간이 충분하니까. 내가 도와줄게. 무슨 서륜데?”


 “아.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니까 무서운데요. 선생님의 도움은 위험하잖아요.”


 “......종알거리는 건 여전하구나. 널 삼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독점계약확인서인데요. 이미 서류는 준비 되어 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저희에게 넘겨주질 않네요.”


 “흠. 차준호가 아직 네게 감정이 남아있는 모양이네.”


 “아. 그쪽을 차준호 과장이 담당하고 있나요? 제가 아는 담당자는 다른 사람인데요? 아~ 일부러? 그럼 그럴 만도 하네요.”


 “아니. 네 잘못은 아니야. 역시 내가 도와야 할 일이었나 보다. 따라와.”



 한수진이 11층을 취소하고 다른 층의 버튼을 눌렀다. 유성현은 한수진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입까지 반쯤 벌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수진은 그런 유성현을 발견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입술을 깨문 한수진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어요?”


 “.......백여 개 원소면 만들 수 있어.”


 “아~ 역시 누군가 창조한 거군요?”


 “시끄러워.”


 “선생님이 만들었어요?”


 “.......됐다. 여기에 문서보관소가 있으니까. 찾아서 복사해가면 돼.”


 “아무나 가능해요?”


 “당연히 아니지. 나한테 출입증이 있으니까 내가 같이 가서 찾아줄게”


 “고마워요.”



 한수진과 유성현이 문서보관소의 문 앞에 섰는데, 갑자기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뭐죠?”


 “지진인가?”



 이번엔 조금 더 강한 진동이 왔다. 천장에 등이 깜박일 정도로 흔들거렸다. 유성현이 불안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니, 한수진이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이런 빌딩이 오히려 지진에 잘 견딜 수 있어.”


 “역시. 선생님이 저를 도운 다니까 지진까지 생기는 군요?”


 “시끄러워.”



 한수진이 출입증을 스캐너에 가져다 대서 문을 열었다. 한수진과 유성현이 입장하고 두 번째 문을 열려는데, 문이 닫히며 다시 진동이 왔다. 이번엔 훨씬 큰 진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고 천장의 등들이 꺼져버렸다. 한수진과 유성현이 서 있기 힘들 정도의 진동이었다.


 유성현이 한수진을 부축하며 물었다.



 “대피 알람인가요?”


 “아니야. 이건 도난 알람인데?”



 곧이어 건물 내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건물 내 중요 도난발생. 도난발생. 건물 내 모든 인원들은 현 위치를 지켜주십시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인원들은 보안인원들의 명령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현 위치를 지키십시오. 이건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반복합니다. 건물 내 중요 도난발생. 도난발생........]



 한수진이 문서보관소의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폐쇄되었다. 



 “아.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시끄러워”


 “우리 갇힌 건가요?”


 “아마도”







 계속.


댓글
  • 워니유니31 2019/03/27 13:15

    오랫만에 1등~!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오후 시간 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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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3/27 13:16

    워니유니31// 저도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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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불러용 2019/03/27 13:44

    재밌게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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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량 2019/03/27 14:12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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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살 2019/03/27 14:23

    또다른 이야기로 가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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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lersN 2019/03/27 14:30

    시점이 바뀌었네요. 재밌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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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3/27 14:34

    여러가지로 실험적인 이야기입니다. 제 실험이 쓸모있길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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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3/27 15:26

    아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점으로 읽는 게 편안한 것 같네요 ㅎㅎㅎ
    저는 유성현의 저 깐죽거림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구요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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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제리 2019/03/27 18:32

    다들 해피엔딩이 되는건가요?
    한수진은 정○○랑 성현이는 강보람이랑 차준호는 간호샘이랑 효정이는 선교사랑 쏭은 이대리랑 해진이는 수녀랑? 함지혜는 상준이랑 준호형은 누구랑?
    해피엔딩일리 없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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