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는 건 꽤 힘든 일이에요. 특히나 세상이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면 더 그렇죠. 도무지 창의적이지 못한 세상은 사람에게 매번 비슷한 시련을 주는 편이에요. 특히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박해진을 또 만났습니다.
“송민아.”
“지독하다 우리 진짜.”
“걱정하지 마. 내가 뭘 하려는 건 아니니까.”
“오빠. 오빠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게 이미 뭘 한 거잖아.”
이 남자와 몇 번이나 헤어졌는지 다섯 번까지 세다가 그만뒀습니다. 이 남자로 얼룩진 제 삶을 닦아내려 호주까지 가서도 만났어요.
전 호주에서 결혼을 했었습니다. 과거형이죠. 지금은 이혼했으니까요.
괜찮은 남자를 만났었어요. 꽤 잘사는 집안의 그럭저럭 착한 남자였어요. 문제가 있었다면, 그에게 이미 결혼을 앞둔 애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했어요.
호주에서 소개받은 일자리는 너무 더럽고 힘든 일이었거든요. 돈은 좀 덜 벌더라도 편한 일자리를 찾았는데, 돈은 더 벌 수 있고 더 더러운 일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편하게 구사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죠.
한 달쯤 지났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외롭기도 했고 이런 삶이라면 차라리 한국의 지방에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울함을 달래려 찾아간 바닷가를 걷고 있다가 그를 만났어요.
한국 사람끼리 서로를 금방 알아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도 그랬고,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흔한 이야기에요. 서로의 외로움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함께 술을 마시고 나에게 반했다는 그와 잤어요.
나를 사랑한다며 어떤 도움이든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괜찮은 방도 얻어줬어요. 전 사실 그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몰랐는데, 그가 주는 편안함이 너무 좋았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에게 이미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았어요. 그런 걸 금방 눈치 채지 못할 여자는 별로 없을 거예요. 눈치 채고도 모른 척 하거나 아니라고 믿고 싶을 뿐일 겁니다. 그가 주는 안락함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그가 제게 청혼을 했을 때는 너무 놀랐어요. 그보다 그의 애인이 찾아왔을 때 더 놀랐습니다. 울면서 그를 제발 보내달라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결혼했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집에서도 황당해했지만,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결혼을 마치고 신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제가 호주에 온지 반년도 채 안돼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박해진이 호주에 나타날 줄은 정말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뭐 어쩌다 그런 놈이랑 결혼을 했냐?”
“무슨 상관이야.”
“그 자식 다른 여자 만나는 건 알아?”
“뭐?”
나와 결혼한 그가 또 다른 여자에게 반했다더라고요. 박해진이 저를 찾아온 건 제 주변을 상당히 관찰한 이후였습니다. 해진이 오빠가 왜 여태 내게 미련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말로는 내가 잘 지내는 걸 확인하고 싶었답니다. 그럼 그냥 사라져주는 게 가장 좋은 것 아닌가요?
덕분에 나는 그의 전 애인과 같은 처지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난 결혼을 했으니까, 다시 돌아 와주길 기다렸는데 그가 제게 이혼하자더군요.
해진이 오빠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싸움도 못하면서 그에게 덤볐어요. 해진이 오빠가 훨씬 많이 맞았는데 체포된 건 해진이 오빠였습니다. 주거침입죄도 있었고 먼저 공격한 건 해진이 오빠가 맞으니까요.
덕분에 저는 남편처럼 다른 애인이 있는 여자가 되었어요. 참 웃기는 일이죠. 내 남편이었던 작자에게 큰 소릴 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혼하자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죠. 단지 그가 박해진을 용서해주는 조건으로 이혼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 정말 마주치지 말자”
“내 덕에 그런 인간이랑 끝나게 된 줄 알아.”
“오빠.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어. 오빠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지?”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넌 남자 보는 눈 좀 길러야 해.”
“내가 누굴 제일 오래 만났었는지 몰라?”
한국에 돌아와서는 박해진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호주에서 범죄자가 된 해진이 오빠에게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사정이 더 곤란해졌습니다. 전 호주에서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대학생이었으니까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나 찝쩍대더군요. 꽤나 불편한 시선들을 감수하며 살아야할 줄 알았는데, 되레 제가 원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일이죠. 아무도 절 사랑할 생각은 없는데 만나고는 싶어 하더라고요.
그런 녀석들에게 철벽을 쳤냐고요? 아니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제게 접근하는 녀석들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거나 혹은 완벽한 비밀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요. 아무도 모르게 몇몇 녀석들을 만났습니다.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어렵지 않았어요.
집안 사정은 그럭저럭 나아졌지만, 독립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어요. 학교에선 호주에서 돌아온 이혼녀가 독하게 공부한다는 평가를 받고, 주말 밤이면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외로움을 지워냈습니다.
박해진만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았어요.
“헉헉. 쏭! 너 왜 이렇게 잘하냐? 외국물 먹은 애라 확실히 다르네?”
“야. 너 나한테 쏭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쏭쏭쏭! 지금 네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들리지 않아?”
내 위에서 열심히 움직이던 녀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데다 몸 관리도 잘하는 녀석으로 보여서 만났는데, 잠자리 매너가 영 아니었어요. 다시 만나자고 조르는 녀석에게, 자꾸 그러면 네 신입생 여친에게 나랑 만났다는 얘길 해주겠다며 손절했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각오가 되어 있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어느새 과거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는 여자애가 되었거든요. 보통의 친구들은 제가 주말 밤마다 어떤 녀석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
괜찮은 회사에 취직하며 저를 바꿀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좀 멀쩡히 살아갈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민효정을 만났어요.
밉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민효정을 싫어했어요. 유성현에게 꼬릴 치더니, 제 첫 직장에서 만난 상사에게도 꼬릴 치더군요. 내 친구를 빼앗아간 민효정에게서 그를 뺏고 싶었어요. 민효정도 제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정말 미운 여자애에요.
“민아 씨. 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아뇨. 오늘 저녁에는 일이 있어요.”
상준 선배가 제게 밥을 먹자더군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냥 좋은 사람일뿐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사람입니다. 몇 번 같이 어울려 줬더니 저랑 꽤 진지해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차라리 상준 선배가 단 한번이라도 고백을 하던가, 아니면 술에 취한 척 모텔에 가자고 했었더라면 나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확신이 서기 전에 고백 같은 걸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제가 술을 많이 마시면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전 오늘 저녁에 차 과장님을 만나러 갑니다. 민효정 때문에 유성현에게 박살난 차 과장님이 내일 퇴원하거든요. 그 끔찍한 민효정에게서 이제 벗어날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전에도 병문안을 가서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이 모든 일들이 민효정이 아니라 한수진이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건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차 과장님이 유성현의 선생님인 한수진 씨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런 한수진 씨가 해진이 오빠를 알고, 또 민효정과 차 과장님이 엮였다는 건 아무래도 웃기잖아요.
택시에서 내려 병실에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이 대리님을 만났습니다.
“어? 송민아 씨? 차 과장님 면회 가?”
“네”
“내일 퇴원인데 무슨 면회야?”
“내일 퇴원이니까요.”
“아~ 아직 면회 한 번도 오지 않았구나? 어쩌지 늦었어.”
“왜요?”
“지금 차 과장님 다른 손님 만나느라 바쁘거든.”
“기다리죠.”
“흠. 이런 얘기 해줘야 하나? 차 과장님이 바람둥이로 유명한 건 알지?”
“그래서요? 지금 여자랑 있나요? 혹시 민효정인가요?”
“무슨 소리야. 민효정 씨가 차 과장님을 만나겠어?”
“그럼 혹시 한수진? 키 크고 서양인처럼 생긴 여자 아니에요?”
“아니야. 다 틀렸어. 간호사야.”
“네?”
“이거 비밀이다? 바람둥이끼리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으니까”
황당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이 대리님이 웃으며 저녁 먹지 않았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차 과장님이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이 대리님의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거든요. 대리가 팀장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이 대리는 딱히 곤란해 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과장이 되겠다는 정도의 소감을 밝히는 정도였어요.
제 새로운 상사와 저녁이나 같이 먹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딱히 성공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적당히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미혼의 상사가 불편 할 일은 없습니다. 단지 이 대리님이 차 과장님 못지않은 카사노바로 소문이 나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제가 그런 남자를 만나서 부끄러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차 과장님이 병원의 간호사와 병실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얘기죠?”
“내 팀원으로 일하려면 그렇게 이미 아는 사실을 반복확인 하는 버릇은 고쳐줘”
“제가 잘 이해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요.”
“왜? 차 과장님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전혀 아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네요.”
“괜찮아. 난 송민아 씨가 팀장을 사랑할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좋겠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이제 팀장이니까 팀장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
“네?”
“농담이야 밥 먹어”
이 대리님이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확실히 과장되지 않은 모양이네요. 처음으로 저와 단둘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팀장이라니,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자신 있으면 이럴 수 있을까요?
속으로 비웃어주는 대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더군요. 내가 어떻게 보였기에 이 남자가 이럴 수 있을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난 차 과장님을 박살낸 유성현을 만나고 해진이 오빠를 다시 만났어도 견딘 여자니까요.
사랑 따윈 모르겠으니까.
“팀장님. 그럼 밥 먹고 호텔에 갈래요?”
그가 먹던 음식을 뿜었어요. 내 얼굴까지 튀는 바람에 냅킨으로 좀 닦아야 했습니다. 이 대리님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난 묵묵히 그가 뿜은 흔적들을 치우며 다시 말했습니다.
“식욕이 별로 없으면, 지금 당장 가도 괜찮아요.”
“아니. 송민아 씨. 난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그럼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어요?”
“미안해. 민아 씨는 지금 상준이랑 진지해지고 있는 중이지?”
“전혀 아닌데요.”
“그런 것 같더라. 그래도 심술이 났어. 오랜만에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든 여자였는데, 다른 상사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른 직원과 놀이공원도 다녀오는 게 싫더라고”
“바람둥이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전혀 감동적이지 않네요.”
“응. 알아 그래서 나도 좀 창피해. 그럼 우리 놀이공원에 갈래?”
“네?”
“뭐~ 전혀 믿지 않겠지만, 난 그냥 민아 씨랑 같이 놀이공원에도 가고 진심으로 서로를 알아갔으면 좋겠거든.”
“네. 전혀 믿기지 않아요.”
“그렇겠지. 그럼 뭐~ 어때? 호텔에 가는 대신 놀이공원에 갈래?”
처음엔 이 대리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정말로 같이 야간 개장하는 놀이공원에 가서 함께 솜사탕을 사먹고 놀이기구를 타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민아 씨. 나 저 롤러코스터 타고 싶은데, 같이 타줄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팀장님이요?”
“응. 여자들이 나 같은 바람둥이에게 기대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니까. 놀이공원에 오자고 하는 말도 좀 웃기잖아.”
“저는 저거 타봤어요.”
“그래? 그럼 같이 탈래?”
롤러코스터가 정상에 다다르고 이제 추락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이 대리님이 내 손을 잡았습니다. 저도 이 대리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어요.
어쩌면 처음 겪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잖아요? 독이 될 건 없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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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바쁜 일이 있어서 좀 급하게 작성해서 올리고 갑니다
아하 호주에서 저런 일이 있었군요 ㅎㅎㅎ 재미있네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상준이같은 좋은남자 보다 이대리같은 카사노바가 여자들에게 먹힌다는 거네요.. 하하 이 좋은 불페너들아~ ㅠ.
잘 읽었습니다!
좋고 나쁨이라는 건 상대적인 게 아닐까요. 자신과 잘 통하고 맞으면 좋은 거겠죠;
저번화부터 2부라고 봐도 되는건가요..? 아니면 종장..?
여태 읽던 문체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