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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도 내게 누나라고 했었다.
“참. 아까 누나라고 부른 거 괜찮았어.”
“잘 자요. 누나~”
“......하지 마”
유성현 때문에 차준호와 결혼을 서둘렀다. 유성현이 그 아이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순수함 정도밖에 없었지만, 잊고 싶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마음을 울리게 했다. 우리는 순전히 스승과 제자의 사이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교적 관계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내 목적을 위해 그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필요해서 만났을 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아주 큰 차이겠는데, 나는 처음부터 유성현에게 호감이 있었다. 유성현은 나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고, 마치 친구처럼 대했다. 그 아이와는 전혀 다른 그런 유성현의 태도가 고마울 정도로, 유성현은 그 아이를 떠올리게 했었다.
그런 유성현이 내게 누나라고 불렀을 때, 마음이 긁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아파오는 게 힘들어서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시 누나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했다.
그날 유성현이 나를 붙잡아줬더라면. 아니, 한번만 더 누나라고 불러줬더라면 좋았겠다.
그럼 차준호와 결혼을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았겠고, 내가 또 다른 형제와 관계되었다는 기억을 떠올리지도 않았겠고, 유성현의 삶을 방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유성현이 민효정과 잘 되길 바랐다. 유성현을 향한 효정을 질투할 정도로 민효정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름 좋은 교사의 역할을 자처하며 조언을 건네기도 했지만, 사랑을 모르는 약사가 사랑을 처방한 격이었다.
“내 덕에 유성현을 안아봤잖아. 그렇게 차근차근 시작하는 거야. 급하겠지만 별로 급할 게 없다고 하면 믿을까. 이런 말 하면 너무 늙어 보이겠지. 천천히 따라가 봐 그러다보면 만날 날도 올 거야.”
“그럼 선생님은.......”
“나. 저런 어린애는 내 취향이 아니야.”
거짓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만, 난 그때 효정이를 위한 약을 처방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기다려본 적도 없고, 사랑하지도 못했으면서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유성현이 내 취향이 아니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창피했다.
차라리 모른 척 했어야 했다. 민효정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야 했다. 유성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해줘야 했었다.
난 효정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두려웠다. 어쩌면 또 예상치 못한 일들로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바뀌지 않지만, 죽음은 사람을 바꾸게도 한다는 걸 알았다.
유성현과 민효정의 관계가 급진전 될지도 몰랐다. 민효정은 유성현을 대학까지 따라 간 여자애였다. 게다가 유성현은 그런 민효정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둘 사이가 잘 되길 바랐으면서도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오니 두려웠다.
“효정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그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제가 왜요?”
“효정이가 널 좋아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런데도 너는 지금까지 효정이랑 아무런 발전이 없었잖아. 지금 효정이의 상황이 걱정되는 마음이랑 호감이랑 헷갈리지 말라는 얘기야. 네가 이럴 때 효정이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효정이를 걱정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너를 걱정하는 거야. 효정이는 지금까지 널 좋아하면서도 견딘 아이지만, 넌 누굴 좋아해본 적도 없잖아. 효정이가 뭘 원하는지 알게 되더라도 그게 네게 어떤 의미인지 잘 생각해보고 판단해”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데요?”
“괜찮아.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니까. 난. 단지....... 네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길 바라”
“뭘 하면 바보 같은 행동이 될까요?”
“아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면 되겠지.”
“선생님. 사람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살 수 있나요?”
내가 바보 같았다. 유치한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보였다. 너무 창피했는데, 유성현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고, 또 미안했다.
불편하더라도 내가 민효정의 곁에 있어주는 게 옳은 일이었지만, 미안함에 유성현에게 민효정을 돌봐주라고 했다. 내가 유성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스스로를 시험하고 싶었다. 유성현을 위한 것도 아니고, 민효정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었다.
난 효정이를 걱정했다. 효정이를 위한 걱정이 아니다. 효정이가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선택할까봐 걱정됐다. 따라가 보라는 내 말 때문에 평생을 망설이며 기다려야 했을 효정이가, 그날 밤 유성현을 선택할까 두려웠고, 내 그런 마음에 미안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만 가득한 술집을 찾은 건 오랜만이었다. 그 아이를 지우려 나이 많은 교사와 만나고, 또 더 나이가 많은 학생주임과 만났던 내가 쉴 수 있는 장소였다.
점잖은 중년의 남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 중에 한명을 고를 생각이었다. 내 유치하고 지저분한 선택을 반성하고 유성현을 지우고 싶었다.
술은 후회할 일을 쉽게 선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유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하니.]
[친구랑 술 마시고 있어요. 어쩐 일이세요?]
[나도 술 마시고 있어. 도움이 필요해]
정말 도움이 필요했다. 난 이제 곧 수렁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내가 그러기 전에 제발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아가씨의 친구시군요? 생각보다 어린 분이라 놀랐습니다. 같이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 아뇨. 전.......음. 누나를 데리러 왔어요.”
내가 선택한 수렁이 되어줄 중년의 남자가 성현이에게 우리의 관계를 물었고, 유성현은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때 난 유성현도 내 수렁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꽤 취했던 모양이다. 내가 유성현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했었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재잘거리던 그 아이가 떠올라서 한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던 아이스크림이었다. 그 아이의 입술에선 아이스크림 맛이 났었다.
“아이스크림 먹자.”
“선생님 집에서요?”
“음. 너라면 괜찮겠지만, 내가 문제가 될 거 같아.”
거짓이 일상이 되면, 솔직함은 농담이 된다. 유성현은 내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고, 난 그런 유성현의 어깨에 기댔다.
놀랄 만큼 마음이 아팠다. 내 몸에 흐르는 모든 피를 뽑아내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엄마는 아빠의 동생과 만났고, 아빠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애인이 있다. 그런 내가 제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사람의 운명이 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내 선택들은 죄다 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 나를 향한 사람들의 선택은 또 뭐가 될까.
“그럼 어제 효정이랑 잤겠네.”
“네? 아~ 뭐 같이 잔 건 맞는데. 에이~ 무슨 어제 효정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래. 수십 수백 년 동안 변함없던 산도.......단 한 번의 폭우로 산사태가 나기도 하고 그러면 없던 계곡이 생기고 또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하잖아. 큰 변화는 또 다른 새로운 변화들을 가져다주니까. 오히려 어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에이~ 저 그런 애 아니에요. 선생님이 그런 말 하니까 웃기네요.”
“그래서 다행이야. 내가 아직 네 선생님이구나.”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잖아요.”
“그럼. 이 아이스크림도 먹어라. 난 다 못 먹겠어.”
유성현은 그런 애가 아니었고, 난 유성현의 영원한 스승인 주제에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유성현이 내 아이스크림도 먹는 동안 어깨에 기대 기다렸다. 유성현의 입술에서도 아이스크림 맛이 나겠지.
나도 모르게 유성현의 품으로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유성현이 움츠리기에 다시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나 잠든 거 아니야. 그냥 좀 이러고 있을게”
“네.”
“일일이 대답하지 마.”
유성현이 대답하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성현은 살아 있는 아이라는 걸 느끼고 싶었다. 조금 더 그렇게 있고 싶었는데, 유성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마 민아일 거예요. 아까 민아랑 있었거든요.”
“아. 또 헤어졌구나. 그 애랑 있다고 했으면 부르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또 자주 만나겠죠. 지가 심심하면 날 부를 거예요.”
“부르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그 애가 부러워.”
“어? 전 민아랑 있다가도 선생님이 부르니까 왔는데요?”
“그래. 조금 죄책감이 드네.”
“아뇨~ 진짜 괜찮아요. 민아랑 선생님이 동시에 절 부르면 전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거예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힘들다. 이제 들어가야겠어.”
술이 깼다. 유성현이 민효정과 별일이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송민아가 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유성현과 만난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미련하게 다시 속내를 비쳤다.
“참. 아까 누나라고 부른 거 괜찮았어.”
“잘 자요. 누나~”
“......하지 마”
그래. 수십 수백 년 동안 변함없던 산도 단 한 번의 폭우로 산사태가 나기도 하고, 그러면 없던 계곡이 생기고 또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한다. 큰 변화는 또 다른 새로운 변화들을 가져다준다.
효정이 엄마가 돌아가신 건, 효정이보다 내게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던 것 같다. 유성현이 누나라고 한 번 더 불러줬더라면, 혹시라도 나를 붙잡아줬더라면 그 자리에서 내 몸에 흐르는 피를 인정했겠다.
유성현은 그러지 않았다. 난 내 삶에 산사태를 만들고, 없던 계곡을 만들기로 했다.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유성현의 삶에 맥을 짚어주는 침이 될 수 있길 바랐다.
차준호와 결혼을 서둘렀다.
신이 내게 선물하지 않은 평범함을 스스로 개척하려 했다. 차준호의 형과 내가 관계되었던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운명 따위 여전히 믿고 싶지 않지만, 어디엔가 존재하는 신이 나를 시험한다는 건 알겠다.
유성현을 차에 태우고 강릉으로 향했다.
그 아이와는 하지 못했던 걸 유성현과 했다.
유성현에게 내가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특별하진 않았다. 오히려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다. 어쩌면 유성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는 운명처럼 느껴지는 게 싫었다. 유성현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마치 내가 처음 겪는 것처럼 힘들었다. 유성현이 다음날 변기에 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했다.
“그럼 이제 처음이 아니네요.”
고마웠다. 유성현은 마치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말하며 다시 하려고 했다. 너무 기뻤다. 정말 기뻤지만 그런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유성현이 그런 나를 배려하는 듯, 뒤에서 나를 안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마웠다. 그 아이 때문에 유성현의 키스를 피했었는데, 이제 피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유성현이 다시 내게 들어왔을 때. 키스를 허락했다. 유성현의 입술에선 파도소리가 났다. 유성현을 느꼈다.
얼마 전 유성현이 송민아와 경포대에 왔었다는 걸 알았고, 둘이 당일치기로 다녀왔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딱히 그런 이유로 나도 유성현을 경포대로 데려온 건 아니지만, 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 된다.
유성현의 삶을 맥을 짚어주는 침이 되어주진 못했어도, 혈을 뚫어주는 침이 되긴 했다.
우리가 송민아를 마주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운명이 아니다.
많은 일들을 벌이진 않았다. 유성현이 송민아와 경포대에 와서 이 모텔 앞을 지났다는 얘기를 들었고, 송민아가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송민아라는 애가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게 된 시점과 유성현과 경포대에 왔었다는 시점을 더하고, 나라면 어쨌을지 간단히 섞어봤다.
내가 그 아이 대신에 유성현을 대하는 방식과 송민아의 방식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꾸준히 유성현을 만났던 송민아가 어떤 방법을 찾을까.
특별한 선택을 한 게 아니다. 유성현이 말한 그 모텔에 가는 것으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단지 서로의 시점이 문제였는데, 송민아나 내가 평일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침착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모텔 앞이 될 줄은 몰랐다.
난 유성현의 독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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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00부까지 왔습니다. 내일부터는 연휴입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100화 축하
란제리//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헬렐레교관// 감사합니다!
올려주시는 글이 오후의 청량제가 되고 있네요.
연재하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G.Torres// 제게는 댓글을 읽는 게 청량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편에서 느낀 점은 여자 주인공들의 케릭터의 깊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ㄷㄷㄷ
100화 축하드립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과 더불어 ㅎㅎㅎㅎㅎㅎ
100화 축하드립니다!
100화 내내 재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거의 6개월 정도 되었네요 작년 9월에 시작하셨으니~ 이 긴시간 동안 연중없이 꾸준히 올려주셔서 지루하고 따분한 워크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진주인공인 성현이가 작중 등장하는 모든 그녀들과 엔딩신을 찍고, 누구를 선택해 연애를 거쳐 결혼하고 얘까지 낳을 때까지 연재해주시기를 바랄게요 ㅎㅎ
물론 이럼 넘 힘드니 시즌제로 가죠 ㅋㅋ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우연이 우연이 아니었군요. 무서운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늘 잘 읽고 있습니다.
4Justice// 앗 3.1절은 제 이야기 성격과 어울리지 않아서 ㅎㅎ 모든 건 우연입니다!
마음속 심리묘사가 나오니 좀 더 이해가 되네요~
100화 축하 드립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노마왈라// 감사합니다!
배불러용// 감사합니다!
EulersN// 감사합니다!
한량// 감사합니다!
백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반 년 동안 연재했네요. 진심으로 여러분 덕분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100회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어린왕자73// 감사합니다!
바쁜 회사 일로 100화 축하인사가 늦었습니다~
3.1절 100주년 기념에 100화를 딱 맞춰서 연재하시는 북풍님의 치밀함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
오늘도 잘 읽겠습니다.
평안한 연휴 되십시요~! ^^
워니유니31// 감사합니다. 세상은 예견된 실수와 준비된 우연으로 가득하죠. 서로 모른 척 할뿐입니다. ㅎㅎ
기념비적인 100화의 주인공은 한선생님이 되었네요. 효정이나 성현이가 되길 바랬었는데...
100화 축하드립니다
항상 북풍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100회 연재 축하드리며 맛깔난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철리Fe// 감사합니다.
순수// 저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