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한국인이 일본인을 죽였어? 사죄해야 해!

1909년 10월 26일 탕탕절, 자신을 독립군이라 소개한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다.

미래인 지금이야 어느 정도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합의된 상태이지만, 당연하게도 당시 사람들이 미래를 알 리는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개중에는 "이럴 수가! 동양평화에 각골난망 매진하시던 영웅 이토 공을 우리 조선놈이 살해했으니 전 조선 차원에서 사죄해야 한다!!"는 논자들도 있었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러일전쟁 직후의 당대 만평

뭐 사실 당대인 기준으로 완전 뜬금없는 반응은 아니었는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맞선 일본의 위대한 국제적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올린 상태였기 떄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아시아주의'라고 하여, 서구 열강의 압제와 침탈에 대응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잘 나가는 나라가 일본이었던 만큼, 자연히 이 아시아주의는 (특히 일본인들 자신을 중심으로) '일본을 맹주로 하여 동아시아 3국이 서로 도와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는 식으로 흘러갔다.

* 사실 일본 국내적으로는 흥아론(아시아 국가들과 단결하자) VS 탈아론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따위 버려버려)이 두 사상이 대립했지만, 나중에 가면 결국 둘 사이의 이상한 타협점인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이 지배해서(=강제로 단결시켜서) 서구의 압제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시키자!"는 대동아공영권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게 파시즘 + 백인 선민의식의 일본인 버전이라는 건 척 봐도 알거고.

 아무튼 당시 서구의 침탈을 온몸으로 느끼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세부적인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 아시아주의에 굉장히 열광했다. 중국의 쑨원, 조선의 김옥균,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본인조차도 '동양평화론'에서 이 아시아주의에 크게 동의한다. 다만, 안중근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했고, "한중일의 연합은 반드시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토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안중근은 이토가 동양평화를 해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개화 지식인'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일본의 일련의 행동들이 그저 '개화를 돕기 위한 조치'로 순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 중 일부는 "조선이라는 미개 상태의 나라가 빨리 깨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무력 사용이나 외세의 개입도 가능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만다. 이런 류의 지식인들은 한일합병조차도 일종의 합중국, 동군연합, 혹은 동맹국이나 연합국 정도로 생각했지, '정복당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연히 이들 중 대다수가 후에 친일파의 길을 걷는다.

자, 배경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그런 '개화 지식인'들의 모임 중에 저 유명한 극단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있었다(이 새1끼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꺼라위키나 위키백과를 찾아봐도 좋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사흘 후인 29일, 이들 일진회의 주도로 '도일사죄단' '국민사죄단', '사과대죄단' 등으로 불리는, 그냥 줄여서'사죄단' 이라고 불리는 단체를 조직한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의 독립과 개명진보는 모두 일본의 덕택”이며 이토는 “한국 중흥의 원훈”이자 "동양평화와황색인종 보호를 위해 노력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이토 살해가 결코 대한제국 국민 전체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덴노와 일본 정계, 일본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고 사죄하기 위해 조직이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발기회를 개최하였고, ‘도일사죄 13도 인민대표 임시회의소’라는 사무실을 열어서 전국에서 도 대표를 뽑아 일본에 파견될 도일사죄위원을 도별로 선정했다. 13도 대표로 13인이 선정되었으며 이들은 ‘도일사죄 십삼도 인민대표’로 불렸다.

여기서 조금 첨언하면, 일진회만이 "일본에 사죄해야 한다" 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일진회 회원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안중근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어, 이들도 전국 13도 사죄단을 결성하고 13도 대표들로 사죄단을 구성했다. 나중에서야 일진회가 사죄단의 배후라는게 드러나는 바람에(일진회는 이 당시에도 현재의 일1베급으로 이미지가 안 좋았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일진회 계열과 비일진회 계열의 내분이 생겼다.

그래서 서로 자기가 일본에 잘못했다고 사죄하겠다는 사죄단 주도권 병림픽이 벌어졌다!

이런 내분도 심했고, 또 덴노에 대한 상소도 허가를 받지 못하면서 일정은 사죄단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활동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천일은행이라는 민족주의계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으려 했으나, 민족계 은행이던 천일은행(나중에 한일합방 이후 민족계라서 미운털이 박히고 조선총독부에게 먹힌다)은 니네들 제정신이냐? 딴데가서 알아봐 라면서 안꿔줬다. 그래서 일반 민중에게서 모금하려 했으나....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일제의 수탈로 쪼들려 있었고, 당시 조선 민중들 입장에서는 서구의 침탈보다 일본의 수탈과 침략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던 터라 "꼴미운 일본놈들에게 사죄하는데 돈을 퍼달라고?"면서 씨알이 멕힐 리가 없었다. 

결국 이도저도 안되자 만만한 부자 10여 명에게 자기들이 '국민대표'이니 자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자 또 이 국민대표로 선정된 13도 대표중 한명이 탈퇴하는 등 아주 혼파망이 벌어졌다.
결국 당초 계획된 일정보다 매우 늦은 12월 19일에서야 8명의 대표들이 일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부산까지 도착했을때 여비가 떨어져서 6명이 여비없인 못가겠다고 도망가고(...)결국 일본에는 두 명만 겨우 도착한다. 이들은 이토의 무덤에서 사죄문을 읽고 대성통곡을 한 후, 유가족을 방문해 사죄했다.

문제는 귀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거창한 쇼에 들어간 각종 비용문제를 어찌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에 "우리가 정부를 대신해서 좋은 일 했으니 우리가 쓴 비용좀 보전해 주쇼"이란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상황은 당장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씹었고, 이후에도 사죄단 소속 위원들이 지출한 여비와 사무실 유지비 문제로 대한제국 내각에 조처를 취해 달라며 장서를 보내는 등 재정 마련을 둘러싼 잡음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합병 후엔 어떻게 되었냐고? 이 단체를 조직한 일진회부터가 일제가 해체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