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방어선
국군 9, 3사단이 국군 3군단
미2사단, 국군 5,7사단이 미 10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951년 5월 현리전투
지휘관 도주의 유언비어, 혼란한 상황 속에서의 명령체계 혼란,
사단장들의 지휘미흡, 아군의 사기저하, 미10군단의 실책과 오판 등 여러가지 복합적 사유로 인해
국군 3군단이,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자신들보다는 비교적 훨씬 적은 수의 중공군 9병단에게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패배한 전투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와해된 3군단은 무분별하게 패주하여,
중장비는 물론 대부분의 개인화기도 잃어버렸으며 병력 약 2만이 사상하였다
이때 미공군은 3군단이 포기한 중장비를 파기하기 위해 중공군이 아닌 3군단 주둔지들을 폭격해야만 했으며,
3군단이 무너지자 미 10군단 소속의 국군 5,7사단 역시 큰 피해를 입고 후퇴를 시작했다
바로 양옆 미 2사단과 국군 수도사단이 방어선 유지에 실패하였다면 동부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을 위기였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은 국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국군1군단 사령부를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작전지휘권을 박탈했다
아래는 당시의 유명한 대화
칠천량 전투와 더불어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꼽는 전투 중 하나
애초에 막 창설된 군대+전쟁경험 적은 지휘관들vs산전수전 다 겪은 중공군
뻔하긴함
게다가 저당시 한국군은 M1918 브라우닝 소총을 기관총으로 사용했음
방어고 뭐고 한방에 쭉 밀림
발암
와 ㄷㄷ 나 3군단 예하 부대였는데 ㄷㄷ
발암
와 ㄷㄷ 나 3군단 예하 부대였는데 ㄷㄷ
애초에 막 창설된 군대+전쟁경험 적은 지휘관들vs산전수전 다 겪은 중공군
뻔하긴함
칠천량 전투와 더불어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꼽는 전투 중 하나
이거 유명해서 아직도 12사단 현리 쪽은.
게다가 저당시 한국군은 M1918 브라우닝 소총을 기관총으로 사용했음
방어고 뭐고 한방에 쭉 밀림
유재흥 쟤 한국어 잘 못하던 걔 아니냐
한국군도 문제였지만 미군도 책임이 상당히 컸음.
유재흥, 일본군 대위 출신.
전작권 미군으로 넘어간 게 저게 결정적.
그래 놓고 전작권 환수하려던 노무현 깠음.
독립군으로 있던 사람들하고 일본군에 있던놈들도 있었을텐데 지휘미흡이라고?
그런데 당시 국군 장비가 중공군보다 허잡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