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집안의 세력지가 포함된 쌍성총관부
이성계의 고향은 한반도의 동북면인 함경도 영흥 입니다. 이성계에 앞서 그의 가문 몇대가 그곳에서 터전을 잡아 세력을 키웠고, 이 과정에서 외부인 출신으로서 현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런저런 통혼을 자주 했습니다. 기록 상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원나라의 장군인 산길대왕(散吉大王)과 가문 사람을 혼인시켜 이 영향력으로 몽골의 천호가 되었고, 혹은 이 지역에 있던 쌍성총관(雙城摠管)의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쌍성총관부는 그 지역의 고려 관리를 죽이고 몽골에 항복한 뒤, 대대로 이 지역에서 자치를 누리고 있던, 즉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에 항복한 군벌이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원나라의 직속령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이주민 출신으로 북방에 온 이성계의 조상들은 원나라의 장수라던지, 원나라에 투항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 네 집안 등과 열심히 끈을 맺으면서 세력을 키웠던 겁니다.
그런데 원래 고려의 땅이었던 쌍성총관부 지역이, 원나라에 투항하려고 마음 먹고 반란을 일으킨 몇 사람이 관리를 좀 죽이고 했다고 그토록 쉽게 '남의 나라 땅' 이 되었던 건, 물론 첫번째로는 고려에 대한 몽골의 영향력이 아주 막대한 시기였고 반란자들이 몽골에 재빨리 지역을 들여다 바쳐서 영리하게 줄을 산 건게 원인 입니다. 하지만 두번째로는, 애당초부터 이 지역이 조정에서 제대로 관리하기에 좀 어려움이 있는 지역이라는 측면도 어느정도는 있을 겁니다.
길공구님 자료. 저 위에 그인 빨간 선 부분이 본래 과거 윤관의 여진 정벌이 있기 직전 무렵, 원래 고려의 최동북면 경계 입니다. 윤관이 동북 9성을 쌓았다, 이건 저기를 넘어가서 성을 쌓았다는 말이구요. 저기서 얼마나 더 가서 성을 쌓았는가 하는게 논쟁이 되는 부분이고.
여하간에... 저 선 너머로는 말 그대로 '여진족들 땅' 이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이 그야말로 득실거리는 지역이었습니다. 쌍성총관부가 있던 화주 지역은 그나마 그 쪽 아래긴 한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여진족들과 지리하게 엮일 만한 곳이었구요.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의 행정력이 제대로 투시되기에 좀 애매모호한 변경 지대였고, 마침 몽골의 대두로 터진 혼란기에 반역자들 몇명이 현지 관리 몇몇 죽이고 몽골에 항복해 그 권위로 금칠을 하니 건드리기 뭐한 지역이 되어버렸던 겁니다.
참고로 이성계의 고향은(보통 저 빨간선 넘어 함흥으로 착각되는 경우가 잦지만) 실제로는 함경북도도 아닌 함경남도, 그 함경남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하던 지역 입니다. 즉 주위에 여진족들이 득실거리던 머나먼 한반도 동쪽 끝 여진족 땅에서 태어난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원래가 고려 땅이던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함흥이 이성계의 집안의 본거지처럼 인식되고 쓰여진건, 이성계가 태어나고 한참 뒤에 쌍성총관부 지역이 고려에 넘어간 뒤부터 입니다.
이성계의 최소 전전대부터 자리를 잡았던 의주(宜州) 지역은 현재 문천이라는 이름인데, 지금의 북한 지역 분류에서는 아예 강원도 지역 입니다. 원래는 함경남도였는데 남쪽을 떼서 어떻게 행정구역을 고쳤다고 하더군요.
또한 저 지도에 나오는 안변 지역은 당시에는 등주(登州)로 불렸는데, 의주보다도 남쪽인 저 등주도 이성계의 전전대 무렵부터 집안의 영향력이 있던 지역 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증조부가 자기 본래 부인이 죽자, 등주(안변)에서 가장 유력하던 호족인 최기열(崔基烈)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 집안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상당히 유명해진 사실이지만 이성계와 그 집안은 여진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또 이런 의문점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응? 이성계의 집안이 고려의 영역에서 좀 더 벗어난, 고려 땅과 그 경게 근처에서 있으면서 여진족과 계속 엮여서 여진족 인맥을 키운 줄 알았는데, 이성계의 증조 할아버지 무렵부터는 고려 땅 안쪽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그러면 어떻게 여진족과 계속 접촉하고 세력을 키운거지?'
자... 천천히 보도록 합시다.
이성계 집안의 이주
원래 '전주 이씨' 인 이성계 집안이 어쩌다 동북면으로 가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의 '시작' 부분은 유명한 편입니다. 전주에 있던 이성계의 조상이 관청의 기생에 관련된 문제로 현지 관리와 트러블을 벌이다가, 열받은 관리가 중앙에 보고해서 군대까지 동원하려고 하자 기겁하여 전주를 떴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좀 아리송해 보이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무슨 싸우다가 군대까지 동원하고 가문 전부가 지역을 뜨나? 이거 순 구라 아님?"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에서 이야기고, 호족들이 알아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고려 때는 어느정도 무장을 갖춘 호족들도 있었으며, 보통은 지방 호족과 중앙 관리가 적당히 느슨하게 협의해서 일을 처리하겠지만 만약 관리와 이런 실력 있는 호족들의 트러블이 발생하면 관리 입장에서는 군사력을 가진 호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병력을 데려와서야 힘으로 이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즉 '관리가 열받아서 윗선에 보고를 해서 군사를 데려오려 했다' 어떤 의미로는 오히려 좀 리얼리티를 살려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쨌건 조금 세력이 있다하건 조정의 군사를 상대할 재간은 없고, 당시 고려는 무려 '여몽전쟁' 시기였지만 당시 고려 조정은 '몽골군은 안 막아도 반란군은 바로바로 진압했기에' 이성계의 조상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전주를 뜹니다. 그래서 이주한 지역이 현재 강원도의 삼척 입니다. 전주에서 따지자면 상당히 이동한 것이지만, 최소한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북쪽은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현재 남한 영토 내 정도니까요.
그런데 전날의 그 관리가 부임지가 바뀌어 이쪽으로 오게 된다는 정보를 얻자, 기겁한 이성계의 조상은 더 북쪽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의주로, 바로 이 의주에서부터 이성계의 조상들이 제대로 동북면에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겁니다. 일단 의주까지 가자 앞서 말했다시피 이 지역은 고려 땅이긴 하되 고려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더 이상 이성계의 조상들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의주 병마사' 라는 직위 하나 던져주고 '그 지역을 방비하면서 적을 막으라' 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아니...적이라니? 무슨 적이 있길래?
이 시기에 '적' 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몽골' 입니다.
이 시기는 한참 여몽전쟁이 펼쳐지고 있던 시기였고, 몽골군은 때만 되면 흡사 여름의 태풍 같은 자연재해처럼 와서 쓸어버린 후 다시 떄가 되면 떠났다가 다시 또 다음에 때가 되면 돌아오고... 를 반복하던 시기 였습니다. 한반도의 전역이 몽골군에게 노출 되어 있던 시기였는데, 하물며 북방인 의주는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조상들에게 병마사라는 직위를 주면서 "알아서 막아보라." 고 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성계의 조상들은 미치지 않고서야 몽골군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고, 몽고의 장군 야고(也古)가 이 근처에 오자 추종자들과 함께 산성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어 겨우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야고를 떠나보내고 한숨 돌리려고 하니 왠걸, 이번에는 산길(散吉)이라는 장수가 의주의 코 앞인 쌍성 지역에 아주 그냥 눌러 앉아버렸습니다.
보통의 몽골군이라면야 한번 쓸면 다른곳으로 이동하니 그때까지 몸을 피하면 되는데 아주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뭘 어떻게 할 방법도 없고 막막하던 차에, 뜻밖에 산길 쪽에서 먼저 "항복해라." 고 요구하자 이성계의 조상은 방법도 없는차에 미련없이 바로 항복을 했습니다. 산길이 굳이 항복을 요구한 것은 이성계의 조상들이 영향력이 상당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은 유력자라 그런듯 한데, 실제로 이성계의 조상이 항복할때 같이 따라온 사람들이 무려 1천 호나 되었습니다.
물론 1천 호가 전부 이성계의 조상의 관할에 있다기 보다는 자신들도 별 도리가 없어 항복하려던 차에 이성계의 조상을 대표로 삼았다는 거겠지만, 아무튼 그 정도의 영향력과 명망이 있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것 같습니다.
여하간에 항복하고 같이 술자리를 하게 된 이성계의 조상과 산길이었지만... 어찌된 것이 악착같은 생존력과 적응력을 가진 이성계의 조상은 산길과 술자리를 하면서 같이 '싸바싸바' 하는데 성공했고, 술자리가 끝날 무렵에는 이성계의 조상 집안 사람 중의 딸을 보내 숫제 '혼인 관계' 를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이성계의 집안과 몽골, 곧 원나라는 끈을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성계의 조상은 몽골의 천호장이 되어 몽골의 세력에 포함되었습니다. 좀 적나라하게 말하면 몽골 앞잡이가 된 셈입니다.
산길의 인맥으로 이성계의 조상은 몽골의 천호장이 되었고, 몽골 측에서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 라는 것을 설치하고 그 알동(斡東)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동한 알동의 위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두만강 하류로 추정 됩니다. 즉, 바로 이 시점에서 이성계의 조상들은 한반도의 최북방 - 여진족 소굴로 들어간 셈입니다.
이성계의 조상들은 주위의 지형과 여진족들의 영향을 받아 이곳에서 말과 소를 키우며 방목도 하면서 농업 집단에서 점점 반유목 집단 비스무리하게 변모해갔습니다. 이렇게 현지화를 하며 적응 해갔지만, 어쩄거나 그들은 여진족이 아니라 고려인 집단이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갑자기 이 지역에 새롭게 나타난 이성계의 조상들은 탁월한 적응력과 생존력으로 이 지역에서도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사람을 끌어모으고 세력을 키워갔고, 여기에 대해 주위의 천호들, 즉 여진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 집단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자신들과 같은 동류가 아니니 그런 세력이 크는 건 좋을 게 없고, 때문에 같이 힘을 모아 쳐서 그 집안 사람들을 학살한다음 남은 재산은 붐빠이하자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조상 입장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미리 계획을 파악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또' 도주했고, 섬으로 숨어 한동안 눈치를 보다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간 곳이 바로 '의주' 입니다. 그 전날에 근거지를 마련했던 곳이니 익숙한 지역이기도 했으니... 여기서 의주에 자리를 잡은 이성계의 조상들은 계속 거기서 살았고, 이는 이성계가 태어날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의주에 정착한 이성계의 조상들은 여기서도 기민한 생존력과 적응력을 과시하며, 위에 언급했다시피 좀 더 남쪽인 안변의 호족인 최씨 집안과 사돈을 맺어 그 지역을 반쯤 자신들 쪽으로 끌어왔고, 쌍성총관부가 있는 화주 지역도 자주 다니면서 부지런히 그쪽 인맥을 신경 썼으며, 실제로 쌍성총관부 집안과도 인척이 됩니다. 그리고, 함흥에도 바로 이 무렵부터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익조가 안변(安邊)에 왕래하였는데, 또한 간혹 화주(和州)와 함주(咸州)에도 왕래하였다. (時翼祖往來安邊, 而亦或往來於和州、咸州
이성계의 조상들은 의주와 화주, 안변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동시에 자신처럼 저 북쪽에서 쫒겨오거나 이주해온 사람들(거의 대부분 여진족들)을 여차저차 키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함주 쪽에 정착하도록 도와줬고, 그 함주도 자주 왕래하며 관리하면서 사실상 자신들의 영지처럼 만들어갔습니다.
애당초 이성계의 조상들이 북방에서 일부 여진족들에게 두려움을 받아 견제 당하고 쫒겨 왔다는게, 그만큼 반대로 다른 사람들 눈에 위협적으로 보일 정도로 따르는 여진족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 그만큼 이성계의 조상들을 따르는 여진족들이 점점 많아졌고, 바로 이 무렵부터 여진족에 대한 이성계 집안의 영향력이 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성계의 조상들은 앞에서 보듯 여진족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했을 만큼 본래 여진족 출신이 아니었고, 이성계의 직계 부모들도 여진족 보다는 현지의 고려인 유력자들과 결혼했지만, 실제로 이성계 집안에서 여진족과 결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고모가 여진족과 결혼해서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라는 자식을 낳았고, 여진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여진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중에 이성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리를 규합해 함주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성계 앞에서는 쪽도 못 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다루가치(達魯花赤) 김방괘(金方卦)가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낳으니, 태조에게 고종형제[外兄弟]가 되었다. 여진(女眞)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 팔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서 북쪽 변방에 거리낌 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대대로 함주(咸州)에서 생장하여 은혜와 위력(威力)이 본디부터 쌓여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우러러보았으며, 여진족(女眞族)들도 또한 위력을 두려워하고 은정(恩情)을 사모하여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성계는 고향은 의주 근처긴 해도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라기는 거의 함주에서 자랐습니다. 함주가 이씨 집안이 여진족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청년 시절에는 거의 여진족들과 부대끼고 말타고 사냥하면서 살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삼선과 삼개도 나름대로 힘 쎄고 재주 좋기로 유명해서 할거 없는 여진족 불량배를 모아서 북쪽에서 돌아다니며 방귀를 끼고 다녔지만, 함주에서 여진족들과 돌아다니며 은혜와 더불어 '위력' 으로 명망을 떨치던 청년 이성계를 두려워해서 알아서 몸을 사리고 다녔습니다. 나중에 고려의 장수가 된 이성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보긴 했지만...
조선왕조실록 1423년 6월24일 맹가첩목아의 서신中내가 직업이 없어서 젊었을 때에 태조(太祖)의 부르심을 받아 농우(農牛)·농기(農器)·양료(糧料)·의복(衣服)을 주며, ‘아목하(阿木河)에서 거주하라.’ 하였으므로
[출처] 누르하치의 선조 먼터무가 이성계 부하질하던 년도 추정 (『역개루』대한민국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길공구
이렇게 여진족들에게 생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은 최소로 잡아도 이성계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해서, 이성계 본인이 가독(家督)을 이어 받은 뒤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누르하치의 조상이 되는 먼터무도 이성계에게 도움을 받아 먹고 살 장소, 농기구, 옷가지를 받아서 생활을 했을 정도니....
여말 선초 무렵 이성계의 영향력에 있는 북방의 여진족 부족 분포도. 마크가 된 곳의 위쪽이 여진족 부족 이름. 아래쪽이 그 부족의 추장 이름입니다. 앨런비님 자료.
이렇게 장장 4~5대에 걸쳐, 누대에 걸쳐 쌓인 은혜와 권위로 여진족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고려에 귀부하며 이 지역의 군사 세력인 쌍성총관부로 사라졌으며, 원나라 마저도 망국으로 향해 근처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씨 집안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진족들, 특히 동북면의 여진족들은 이성계에게 거의 복종 했습니다.
이들에게 이성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성계 역시 자신의 군사 실력으로써 이들이 필요 했습니다. 이성계의 고려의 영웅으로 만들어준 수 많은 전투에서 여진족 기병들이 활약 했고, 심지어 위화도 회군 당시에도 위화도에서 회군한 군대 외에도 동북면에서 도착한 병력들이 전력이 되어주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겨졌을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 더 나아가 동북면에 대해 심대한 위협을 끼친 존재가 있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그 평생에 걸쳐 전장에서 수 많은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 상대는 북방 지역에 웅크린 원나라의 군벌일떄도 있었고, 원나라 조정에서 보낸 정규군일 때고 있었고, 멀리서 온 홍건적 잔당일떄도 있었고, 인척관계에 있던 여진족 무리일때도 있었고, 왜구일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위화도 회군 당시에는 고려군과 싸우기도 했었구요.
따라서 맞상대한 인물들 역시 많습니다. 북방의 나하추가 있었고, 외종 형제 관계였던 여진족 삼선 - 삼개도 있었고, 요동을 지나서는 기사인티무르 일당과 싸웠고 반란을 일으킨 고려의 만호 박의도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아지발도와 싸우기도 했었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최영을 상대했었지요.
그런데 이런 숱한 적들 중에서도 당대 북방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가진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좀 덜 유명한 적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진족 추장인 호바투(胡拔都 호발도)라는 인물입니다.
호바투의 이미지 자료가 아예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테레오 타입의 여진족 초상으로 대체.
호바투는 여말 선초 시기에 활약하던 여진족 입니다. 당대에 상당한 기간에 걸쳐, 상당한 존재감을 보였던 인물인데, 그런데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대의 왠만한 여진족들인 이성계 가문에게 복속 되어 있고, 설사 삼선 삼개처럼 객기로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가 있다 한들 따지고 보면 다들 이성계 가문과 엮여있는 존재이며, 그 외에 아마도 이성계 가문에 신속 하지 않았을 나머지 여진족들은 존재감도 없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그런 여진족들이 무슨 난리를 일으켰다는 기록도 달리 없구요. '호바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호바투에 대한 기록은 1372년에 처음 나타납니다. 고려의 전 국토가 왜구에게 쑥대밭이 되어가던 1372년 2월 무렵,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호발도(胡拔都) · 장해마(張海馬) 등이 와서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 침입하니,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3인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고려사절요
이때 호바투는 현재의 평안북도 창성군과 강계군 지역인 이성 - 강계 지역에 침입 했습니다. 이 곳은 한반도의 서북면으로, 이성계 가문의 세력이 제대로 미치는 지역이 아닙니다. 이 습격은 이성의 만호가 나서서 물리치고 3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데, 전면전이 펼쳐졌는데 3명을 죽였다면 너무 적은 숫자기 때문에 제대로 물리쳤다기 보다는 때가 되서 상대 쪽에서 적당히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호바투는 이 해 2월 말고 1월에도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당시 공민왕이 명나라에 보낸 보고를 보면,
○ "홍무(洪武) 5년 정월에 동녕부의 잔당인 호발도(胡拔都) 등이 파아구자(波兒口子)에 잠입해 수어관(守禦官) 김천기(金天奇) 등을 살해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으며 2월에는 산양회구자(山羊會口子)를 급습했으나 수어관(守禦官) 장원려(張元呂) 등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 고려사
이런 기록이 있는데, 1372년 1월에도 호바투가 침입해 관리 김천기를 죽이고 사람을 납치해 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공민왕은 호바투에 대해 동녕부여당(東寧府餘黨), 즉 동녕부의 잔당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원래 동녕부
여기서 기사인티무르의 지배지역이라고 써진 곳이 나중의 동녕부 지역.
동녕부는 쌍성총관부가 한반도의 동북 지역에 설치되고 나서, 거기서 배웠는지 아닌지 몰라도 이번엔 서쪽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그 땅을 원나라에 바치자 원나라가 옳다구나 하고 쌍성총관부처럼 만든 곳 입니다. 하지만 고려는 이 지역에 대해 끊임없이 "돌려줘요 잉잉" 을 시전했고, 결국 원나라는 1290년 경 한반도 내부에 있는 동녕부를 폐지하는 대신 북쪽의 요양에 이를 옮겼습니다.
고려의 반역자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티무르는 아버지가 제거 당하자 요동의 동녕부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기도 했고, 이때문에 호바투의 침입 직전인 1370년 경, 공민왕은 이성계와 지용수 등을 보내 요동 원정을 감행, 요동 동녕부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잠시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잠시여서 그렇지...
공민왕은 요동 원정으로부터 2년 뒤에 있던 호바투의 두 차례 침입을 '동녕부의 잔당들이 쳐들어온거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만, 그게 진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호바투의 갑작스런 출현과 침입이 워낙 뜬금없고, 이들이 공격한 서북면에서 얼마전에 있던 군사적 위협이 동녕부에 관련된 일이며, 동녕부 문제는 공민왕이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니만큼 "서북면에 뭐가 나타났다고? 그럼 동녕부 놈들인가 보네! 동녕부 이 간나 놈들, 내가 그떄 쓸어버릴때 한놈도 남겨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식의 사고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에 쳐들어온 호바투는 동녕부 잔당임." 이라는 이 공민왕의 보고의 결론은 "내가 동녕부 잔당들을 이렇게 잘 처리하고 있으니, 명나라 쪽에서도 혹시 기사인티무르 놈을 발견하면 나에게 바로 보내주셈." 이라는, 동녕부 잔당 처리에 관련된 말이기 떄문입니다. 어쨌거나 이 당시의 공민왕에게 있어 서북면에서의 소란은 죄다 동녕부 관련 문제로 보였을 겁니다.
이렇게 공민왕이 얼마전에 무찌른 동녕부 잔당으로 치부한 호바투는, 이때부터 무려 10년 뒤 갑자기 다시 기록에 등장합니다.
○요동(遼東)의 호발도(胡拔都)가 병사 1,000명을 이끌고 압록강[鴨江]을 몰래 건너 돌연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만호(上萬戶) 장려(張侶)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려가 아들 장사길(張思吉)·장사충(張思冲)과 더불어 힘껏 막아냈으나, 장려는 창에 찔리고 두 아들도 모두 화살에 맞았다. 호발도가 장려의 재산과 말 15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부만호(副萬戶) 최원지(崔元沚)가 추격하여 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 고려사절요
1382년 1월, 호바투는 갑자기 천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압록강 도하에 있어 주요 길목인 의주를 쳤습니다. 이에 상만호였던 장려가 두 아들과 함께 나서서 싸웠으나 속절없이 부상 당했고, 오히려 재산과 말을 빼앗기고 약탈 당했습니다.
이미 공민왕의 동녕부 원정으로부터 장장 12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동녕부의 주요 관계자들도 죽고 난 뒤였는데, 그때 동녕부의 일개 잔당 정도로 치부한 호바투는 갑자기 천 단위가 넘는 병사를 끌고 대규모로 북쪽을 활보하던 것입니다.
한편, 호바투는 이제 서북을 넘어서 동북면에도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동북면은 이성계의 세력지 입니다. 1382년 7월,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파견했습니다.
○가을 7월. 우리 태조를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을 노략질하여 인민들이 떠났는데, 태조가 대대로 그 도의 군무를 관할하면서 위신이 평소 드러났기 때문에 그를 파견하여 위무하였던 것이다. - 고려사절요
이 인사 조치는 이성계 본인이 명성을 날린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고려한 인사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기록으로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동북면이 관여된 만큼 이성계 본인이 출정을 자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성계와 호바투의 싸움 결과를 따지기 전에 미리 살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만산군인(漫散軍人) 문제입니다.
이 시기로부터 몇십년이 훌쩍 지난 조선 태종 시기, 조선은 난데없이 명나라와 관련해서 외교적 문제를 겪게 됩니다. 바로 만산군인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앞서 호바투의 1372년 침입에 관한 공민왕의 말을 보면, 한 가지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호바투가 '사람을 잡아갔다' 는 것입니다. 호바투는 고려의 국경에 쳐들어올때마다 약탈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잡아갔다는 사람이, 동네의 반반한 처녀 몇사람 좀 잡아갔다,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만산군인은 바로 고려 말기 호바투에 의하여 붙잡혀 끌려갔던 동북면과 서북면의 주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400년 초, 명나라는 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황제 '건문제' 와 미래의 '영락제' 인 주체가 전중국을 무대로 해서 벌이는 내전인 '정난의 변' 에 휩싸입니다. 장장 수십만 대군이 동원되어 수년간 맞붙은 이 대혼란 동안, 과거 호바투에게 잡혀가 요동으로 끌려갔던 '만산군' 들은 대규모로 고려에 무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몇명일까요? 무려 최소한(왜 최소인지는 아래 설명) 17,414명 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정난의 변이라는 혼란을 틈타 굳이 고려로 돌아오려고 한 사람들의 숫자뿐입니다. 요동에는 고려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의 연간(年間)에 3만여 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일(임오) 2번째기사
조선 세조 무렵의 인물인 양성지의 상소를 보면, 영락제 연간 요동의 만산군이 무려 4만여명에 달했다고 보고 하고 있습니다. 이 4만 명이 전부 고려 말 때 온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나중에 불어난 숫자지만, 그 이전인 홍무제 주원장 시기에도 3만 명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일부는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자신의 의지로 국경을 넘어 명나라 사람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앞서 보았듯이 돌아오고 싶어서 고려에 왔던 사람이 최소 1만 7천명 정도는 되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고려 말에 수십년에 걸쳐 호바투가 잡아간 사람의 숫자가 1만 명 단위는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정난의 변이 영락제의 승리로 끝난 뒤, 명나라에서는 이 만산군인을 다시 명으로 되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인구가 국가의 재산이며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되던 시대에 한두명도 아니고 만명이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타국으로 가는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수십년 전의 고국을 찾아 돌아온 사람을 되돌려 보내야 하는가?" "그렇다고 명나라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에 대한 문제로 논쟁이 펼쳐졌지만, 여러모로 딱한 일이긴 하지만 결국은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돌려보낸 사람이 1만 7천 명입니다. 1만 7천명이라는 숫자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기록에 남지도 않은 - 즉 조선 조정에서 파악하고 돌려보내지도 못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 왔을 겁니다.
호바투의 침공에 관한 기록이 고려 말에 드문드문 있지만, 사람을 한 두명도 아니고 무려 1만명을 넘게 잡아간 만큼 이는 어디까지나 '대규모 침공' 인 경우만 기록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변경 지역에서 수시로, 병사들이 제대로 대응하러 나오지도 못한 사이에 벌어지는 인간 약탈은 당시 국경의 사람들에게 있어선 '생활' 그 자체였다고 봐도 무방 합니다.
태종 18년인 1418년, 명나라 사신의 수행원이었던 소이옹불화(所伊雍不花)라는 사람이, 공무를 수행하는 도중 북청에 사는 자신의 숙부 아이불화(阿伊不花)에게 사사롭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 이 편지가 조정에 올라와 논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 논의의 대상이 되었냐면, 국가간의 정보가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그만큼 저쪽에서 뭘 요구하면 이쪽에선 서로 모른다는걸 이용해서 구라를 쳐서 대응도 하고 하던 시대에 "이렇게 편지가 왕래되는것은 기밀을 누설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문제 떄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의의 대상이 된 소이옹불화의 편지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갑인년에 호파두(胡波豆)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여직(女直) 대인(大人)을 배종(陪從)하여 백두산 북쪽의 새 목책성(木柵城)에 왔는데, 내가 소문을 들으니, 숙부께서 종제(從弟) 강길(康吉) 등과 사이 좋게 잘 지낸다니, 내가 나가서 서로 만나 보고자 하나……" ─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2월 20일(신축) 2번째기사
여기서 말하는 호파두는 당연히 호바투를 가리킵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이 소이옹불화라는 사람은 갑인년 무렵에 호바투에게 사로잡혀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갑인년이라고 하면 1374년인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1374년의 침입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기록에 남지는 않았을 호바투의 약탈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동북면(함길도)의 인구 숫자는 14,739호, 66,978명에 이릅니다. 평안도의 경우, 호수가 4만 1천 1백 67호, 인구가 105,444명에 달합니다. 이를 합치면 172,422명 입니다. 다만 실제로는 이 기록을 남긴 사람조차 "진짜 정확히 따지면 10명 중에 2명 정도만 잡아도 다행인 숫자인데, 인구 조사 너무 열심히 하면 인심을 잃어서 이 정도만 해둠." 이라고 해둔 거리 실제로는 더 많다고 봐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저 숫자는, 세종 때 몇차례나 이어진 북방 사민을 더한 숫자 입니다. 사민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수 만명은 되기 때문에, 그걸 감안하고 (엄청 거칠게 계산해서)보면 조사 가능한 북방의 인구 숫자 중에 6분의 1, 혹은 5분의 1은 호바투에게 잡혀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의 인간 약탈이었습니다.
호바투가 사람을 잡아가는 만큼, 이성계에게도 인적 자원은 중요했습니다. 어쩄거나 나중에 사민 정책을 할 정도로 이 지역은 노동력이 귀하기도 하고, 북방에 자신의 광활한 농장과 황무지를 소유하고 있느니 만큼 이를 다루기 위한 노동력도 필요했습니다. 이 무렵의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같은 식의 기록이 많이 있는데, 이성계가 사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식의 전형적인 묘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세력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서 강조하는 측면도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동북면의 자원에 관한 문제도 있고, 호바투가 여진족이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실록에 '덕망' 과 '위력' 으로 완곡하게 기록된 것처럼 이성계의 여진족에 대한 입지는 '먹을것' 과 '주먹' 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여기서 호바투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그 수 많은 여진족의 입지에 관한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려 사람 수만 명 잡아가는 호바투가 다른 부족의 여진족 안 잡아갈리는 없으므로, 여진족의 수장이나 다름 없는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측면도 있구요.
계속해서 주가를 올리던 호바투는 1383년 1월 서북 지역인 이성 지역을 다시 한번 치더니, 그 해 8월에는 다시 동북면으로 와서 현재의 단천시 지역인 단주(端州)를 공격 했습니다. 이때 고려의 부만호 였던 김동불화(金同不花)는 아예 그냥 대놓고 투항했고, 상만호 육려, 황희석 등은 호바투와 여러번 싸웠지만 상대도 되지 않고 계속해서 패퇴했습니다.
이때 호바투의 병력 숫자에 대해서는,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이때 호바투가 이끌던 병력은 무려 4만! 그것도 4만 기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전력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건 과장이 있을거라고 보지만, 여지껏 서북면의 국경에서 국지적인 도발을 거듭하거나, 혹은 치고 빠지는 약탈을 주특기로 하던 호바투가 갑자기 동북면 깊숙히 들어와 고려 정규군과 정면 승부를 펼치고, 수차례 박살내고 이후 대응하러 오는 이성계와 좋다구나 하고 회전을 벌이는 등의 작태를 보면, 당시 자신의 전력과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떄문에 4만 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만단위가 넘었을 개연성은 있어 보입니다.
한편, 호바투의 이번 침공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건 이성계의 대응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시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가장 믿음직한 부장이며, 뭇엇보다 여진족을 상대하는 문제에 있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지란은 모친상을 당해서 장례식을 치루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왠만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부모님의 상을 제껴둘수가 없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급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이지란을 불렀습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갈 짬도 나지 않아 사람을 보내 서둘러 오라고 재촉 했던 겁니다.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國家事急, 子不可持服在家, 其脫衰從我
이에 어쩔 수 없이 이지란은 상복을 벗고 곡하며 하늘에 절을 올린 다음, 활과 화살만 챙겨서 서둘러 집을 떠나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때의 싸움이 끝나고 이성계는 이 싸움이 끝나고 생각에 잠기다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이라는 안변책(安邊策)을 제시하여 조정에 바칩니다. 여기서 이성계의 군사 조련과 보급, 병참에 대한 생각, 국경 수비에 관한 정책 등의 면모를 피상적으로 살필 수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성계에게 있어 호바투가 위험천만 했던것은 호바투가 강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북면을 위협했다는 점이 클겁니다. 그리고 호바투가 동북면을 굳이 가까운 서북을 내버려 두고 동북면까지 깊숙히 들어와 위협한 이유도 이 지역이 그 시점에서는 이성계의 영지로서 서북보다 비교적 부유했던 점을 노린 것도 있을 것이고. 서북 내버려두고 자신의 영지인 동북까지 적이 들어오자 이성계가 열받은 모습도 이 글을 보면 눈에 좀 선하긴 한데..
이성계의 말에 의하면 호바투는 서북면에서 빙 돌아와 '더 큰 이익을 노리고' 오읍초, 갑주, 해양, 단주, 독로올을 공격하고 사람과 가축을 약탈했는데, 저 지역은 모두 동북면입니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정말로 그 어느때보다도 식은 땀이 흐르는 전투였을 겁니다.
이리하여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당도하자, 그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나곤 했던 호바투는 되려 이번에는 자신만만하여 정면 승부를 계획 했습니다. 호바투는 단주에서 약간 후방으로 물러나 길주의 평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본인의 군대가 대군이니 만큼, 대군을 운용하기에 적절한 자리를 선점했던 겁니다.
이성계 군은 길주까지 이를 추격헀는데, 일단 본대는 이성계의 지휘 아래 뒤를 따라 가고 이지란이 선봉군을 맡아 길주 평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바투와 먼저 전투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이지란은 되려 패전 했습니다. 그냥 패전도 아니고, 엄청나게 크게 패전 했습니다.(先與戰大敗而還) 그렇게 이지란이 호바투 군단의 강력함에 맥을 못추고 다시 되돌아갔고, 이윽고 이성계의 본대가 전장에 도달 했습니다. 호바투는 이성계 군단을 맞아 횡진을 치고 대응 했습니다. (橫陣待之)
이성계의 전투를 기록한 사가들은 대체로 전투에서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해 전략 전술을 다루기보다는, 이성계가 신묘한 무력을 부려 쳐부셨다는 '영웅 일대기' 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한반도의 최북단의 평야에서 펼쳐진 이 고려+여진 혼성군 vs 여진 기병 대군단의 회전의 전개 양상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다른 전투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투도 군대의 움직임보다는 이성계의 무용을 묘사하는데 많은 부분이 할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그랬다고 합니다' 라고 제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그런 무용을 묘사하는데 중점이 된 것은 이성계 vs 나하추의 대결이나 이성계 vs 아지발도, 이성계 vs 조무 등의 다른 전투들과 마찬가지지만, 이성계 vs 호바투의 대결은 좀 양상이 다른 면이 있습니다. 다른 전투가 겁에 질려 발악하는 적장을 상대로 이성계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파-괘 하는 내용이라면, 이 싸움은 오히려 호바투 쪽에서 저돌적으로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군단을 이끌고 당도할때, 호바투는 두꺼운 갑옷을 세겹으로 겹쳐 입고, 그 위에 붉은 털옷을 입었으며, 심지어 타고 있는 말도 붉은 빛이 보이는 암말을 탄 채 완전히 적(赤)의 기사 같은 포스를 풍기며 유유히 기다리고 있었다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호바투는 이성계 따위는 대수로울것도 없다는듯 아주 같잖게 여기며(意輕太祖), 스스로 군사는 내버려 두고 혼자 칼 뽑고 덤비라고 달려들었고, 저쪽에서 저렇게 가오를 부리자 이성계도 대응 안 할 수가 없어 역시 단기필마로 나섰다 합니다. 이성계가 적장과 싸웠다는 식의 기록은 몇차례 있지만, 이런식으로 서로 부하를 물리고 정식 대결 같은 식으로 싸웠다고 나오는 것은 호바투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태조총서의 대체적인 서술을 감안하면) 놀라운 장면이 나오는데, 이성계와 호바투는 서로를 노리며 칼을 휘둘렀는데 둘 모두 워낙 움직임이 빨라 번쩍하며 피해가는지라 서로 맞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兩皆閃過不能中) 태조총서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아지발도는 원샷 투샷에 끝나고 나하추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며 그 외 무리들은 적인 이성계의 무용에 탄복해 감복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런 묘사로 점철 되어 있는것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빗겨나간 뒤에 호바투가 타고 있는 말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고, 이성계는 (치사하게도) 칼 대신 활을 꺼내 칼을 들었던 호바투에게 멀리서 화살을 날렸습니다. 화살은 호바투의 갑옷을 맞췄지만, 갑옷이 워낙 두꺼워 완벽하게 꽂혀 들어가지 못했고, 그러자 이성계는 다시 한번 활을 쏘아 이번에는 타고 있는 말을 맞췄습니다. 호바투가 고꾸라지자 이성계는 이번에야말로 상대를 끝장내려 했지만 승부를 망치는 비겁한 술수에 분개했는지 호바투의 부하들이 대거 달려와 호바투를 구해내며 이성계를 죽이려 했고, 이성계의 부하들 역시 대장을 구하러 나와 싸움을 펼쳐 승부는 여기서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황급히 다시 아군의 진형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곧바로 군사를 크게 풀어 정면 승부에 나섰고, 이후 벌어진 회전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호바투는 결국 대패하고 간신히 자신의 목숨만 건져 달아났으며,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는 묘연하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흠좀무한 포스를 뿜어내는 호바투와의 승부에 대한 이야기는 거르고 보면, 횡진을 펼치고 있던 호바투를 상대로 이성계가 정면 승부를 펼쳐 이겼다, 는 정도만 남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이성계는 (이지란신도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지란을 불러 "우리 이 아무개가 적을 상대로 가장 용감했다. 실로 참된 명장이다!" 하고 다독였고, 이지란은 다시 돌아가서 못 다한 장례를 끝마쳤습니다.
그야말로 동북면의 여진족 인베이전, 여진 시빌 워라고 할 수 있는 싸움이 끝났습니다. 이성계는 귀환했고, 호바투는 당장의 목숨은 건졌다지만 이후 역사속에서 기록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실제 전투의 전개 양상이 어떠했던 간에 분명 호바투의 문제는 여말의 변방에 있어서 정말로 엄청나게 큰 문제였고, 그 증거는 호바투의 침공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정치 문제로 남았던 만산군인의 존재입니다. 아지발도도, 나하추도,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도 죽고 난 이후 수십년이 지나서는 다들 먼지같이 사라진 신화 속의 존재 비스무리했지만, 호바투가 남긴 여파는 무려 세조 시절에도 "큰 문제다" 라고 조정에서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신불해님은 항상 선추 후 정독이죠.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국사능력시험 만점 받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늘 지식 얻고 갑니다
이성계와 호바투의 일기토,잘 봤습니다.
잘보았습니다. 신불해님 쪽지 보냈습니다
성계형은 괜히 나라 세워서 무력치가 까김.
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구독신청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네요 ㅎㅎ
간만에 신불해님 글 보는 느낌이네요 ㅋㅋ
양질의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너무 재밌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엠팍도 자주 들러주세요.
좋은글 감사 합니다 호바투의 존제가 이성계 한태는 원소 같은 존제 였군요 가장 빡신 상대..
놀랍네요....이런 해박한 역사학 전문가가 불펜에 있다는게 ㄷㄷ
[리플수정]지라이 날래 튀오라우.
성니메 그래도 장례는 치러야지 않겠슴메.
간나새.끼.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는데 장례가 중함? 잔말말고 날래 튀오라우.
하~참. 성니메.
지식이 늘었다.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고도 내밀한 역사적 팩트를 쓰실수가 있나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신 것인지..... 정말 부럽고 대단하십니다.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세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중 한가지 이유가
명이 이성계에 대해 경계한 것도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안그랬으면 명이 고려 쳐들어 왔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고려말에 고려인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몽골인 앞잡이질과 패악질을 하도 많이 하고 다녀서...
근데 역사라는게 승자의 기록이다보니 당시의 사관들이 이성계를 백전무패의 명장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은 없는가요? 재밌게 읽다가 문득 궁금해서리...
이성계와 무력으로 비비다니 ㄷㄷㄷ
첫번째는 빼박 국사 교과서 지도 ㅋㅋ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조선 건국 후 여진족을 다 포옹했다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혹시라도 오해하시는 분 계실까봐....
피쟐 신불해님은 불펜 신불해님과 동일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