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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아.
민아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유년의 기억이 남아있는 시점부터 친구였으니, 거의 20년 가까이 지낸 여자애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항상 붙어 다녔고, 여자애랑 붙어 다닌다고 놀리던 친구들도 인정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틈틈이 서로를 찾았다. 민아는 다른 애들과 친해지면 내게 소개했고, 나도 내 친구들을 민아에게 소개하면서 우리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중학교에 가면서 학교를 따로 다니게 되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서로 조금 어색해지긴 했어도 부모님들이 친하고 한 동네에 살았기에 자주 만났다. 민아에게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생기기 전까지는 마냥 어린애처럼 친구로 남을 줄 알았다.
민아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좀 불편해졌다. 부모님들이 민아네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민아가 우리 집에 놀러오곤 했었는데, 남자친구가 있는 민아와 단 둘이 있는 게 불편했다.
어쩐지 섭섭했다. 나는 잘 모르는 것을 민아만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런 민아가 내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게 섭섭했다. 민아 혼자만 먼저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실제로 민아는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상당히 어른스러워졌었다.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내가 알던 동네친구 민아와는 달랐다.
길을 가다 우연히 앞서가는 민아를 발견하면, 몰래 다가가서 목을 조르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달아나는 짓거리는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먼저 그러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아닌데, 서로가 그런 장난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서로 술을 좋아하시는 부모님들 덕분에 민아가 우리 집에 올 일이 있었고, 내가 민아네 집에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어릴 때처럼 장난을 치고 노는 대신에 마주보고 앉아서 공부를 같이 했다. 어른들처럼 서로의 근황정도는 이야기했다.
난 편집부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었고, 민아는 남자친구와 싸운 얘기를 많이 했다. 민아의 얘기를 듣다보면 남자친구라는 형과는 항상 싸우는 것 같은데, 왜 헤어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아가 그랬다.
“넌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힘들다는 얘기는 최대한 자제해라. 서로가 힘든데 자꾸 힘들다는 걸 확인시킬 필요는 없잖아.”
“그 형이 자꾸 그러면 헤어지는 게 낫지 않아? 왜 계속 만나?”
“좋아하는데 어떻게 헤어지니? 힘든 것도 좋아하니까 힘든 거잖아.”
“그~ 게 힘든 거야? 왜 힘들게 좋아해?”
“음....... 너도 나중에 누굴 좋아하면 알게 될 거야”
잘은 몰라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굴 좋아하면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동화책이나 소설책으로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조금은 힘들어봤었다.
민아 때문에 이성에 대한 관심이 덜하긴 했어도 마음에 들었던 여자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사춘기를 겪으면서 좋아하게 된 여자애가 있었고, 한 번 말을 걸었다가 소문이 나버렸다. 모르는 여자애와 가까워지는 일자체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민아가 내 여자친구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도 했었다.
내가 어떤 여자애를 좋아했다는 걸 민아가 좀 놀리긴 했어도, 전보다는 서로 편해진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민아가 이런 말을 가끔 했다.
“뭘 봐?”
시선을 느꼈더라도 좀 모른 척 해줬으면 좋으련만, 민아는 딱 꼬집어서 내 본능적인 시선을 나무랐다. ‘깊게 파인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네 도도하고 음란한 가슴골을 보고 있었다.’라고 솔직히 말하거나 ‘너무 짧은 반바지를 입고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네 팬티가 혹시 보이지 않을까 관찰했다.’라고 대답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모른척하며 시선을 거두고 다른 얘기를 꺼내며, 또 내 눈알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제어했다. 그래도 민아가 계속 나무라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민아도 조금 부끄러워하고 차림새를 단정하게 하려는 듯 했었지만, 나중에는 말로만 나무랄 뿐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비웃었다.
민아를 점점 이성으로 느끼면서 민아와 사귄다는 그 형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민아가 그 형과 싸웠다는 얘기를 들으면 좋았었는데, 민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었다. 그러나 곧 다시 만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야했었고, 또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었다.
이런 민아에 대해 한수진 선생님께 몇 번 했었다. 물론, 민아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쏙 빼고 얘기 했었다.
“또 헤어졌다더라고요.”
“또.”
“네 그런데 이번엔 좀 심각한 거 같아요. 전처럼 그 형 욕을 하지도 않고요. 뭐랄까 씁쓸해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아뇨. 이번엔 좀 달랐어요. 별로 화내지도 않더라고요. 전에는 짜증도 내고 그랬는데”
“좀 성장했을지도 모르지. 그럴 나이잖아.”
그 정도였다. 한수진 선생님과는 우연한 잡담을 나누는 정도였다. 서로의 시간을 따로 내어서 대화를 나눈 일도 없었다. 어쩌다 한수진 선생님과 단둘이 있게 될 기회가 있으면 민아 얘기를 꺼내곤 했다. 민아에 대한 얘기를 할 만한 사람이 한수진 선생님 말고는 없었다. 그뿐이었다.
민아가 정말로 헤어진 것 같았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을 때였다. 편집부 졸업생 회식에서 만난 선생님이 내게 먼저 민아의 근황을 물어봤다.
“지금 걔는 헤어진 상태야. 아니면 또.”
“민아요? 헤어진 지 꽤 오래됐어요.”
“그래. 그럼 너랑은 어떻게 지내.”
“신입생들답게 서로 바빠요.”
한수진 선생님께 그렇게 대답하긴 했어도 민아랑 많이 가까워졌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대학생 민아는 나랑 영화도 같이 보고 딱히 약속하지 않고도 만나서 밥도 먹고 그랬다. 그러던 중에 민아가 바다를 보러가고 싶다고 했었다.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에 갔다. 경포대 해수욕장 근처를 같이 걷다가 커피도 마시고 또 나와서 산책로를 걷다가 민아의 손을 잡았다.
민아는 조금도 놀라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내 잡은 손을 그대로 뒀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걷다가, 바닷가에 해변이 보이는 모텔 앞을 지나게 됐었다. 내가 별로 음흉한 생각은 아니었는데 음흉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을 했다.
“저런데서 자면 밤새도록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말을 하자마자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민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조금 더 걷다가 슬며시 내 손을 놓았다. 민아가 웃으며 배가 고프다고 했었다. 우리는 근처의 초당순두부집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탔다.
서울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 민아가 그 형이랑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많이 고민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면서 이제 나를 자주 만나기 힘들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랑 여행을 오고 싶었다는데, 난 그런 민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었다.
몇 주 전에 민아와 같이 걸었던 경포대 바닷가를 한수진 선생님과 걷게 되었다. 내가 손을 잡을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선생님과 손을 잡는다는 게 어색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나보다 8살이나 많은 선생님이지만, 우리를 보는 그 누구도 교사와 제자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늙어 보인다기보다 한수진 선생님이 나이를 분간하기 힘들만큼 미인이었다. 다들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이슬만 먹고 산다고 해도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다, 뭔가 먹고 배설한다는 게 상상하기 어려운 한수진 선생님이 배가 고프다고 했다.
“뭘 먹을까? 회 좋아하니?”
“아뇨. 전 별로 상관없어요.”
회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근처에 다른 종류의 식당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냥 아무 횟집이나 들어가 회를 주문했다. 선생님이 이슬을 주문했을 때, 상황이 예상 밖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난 건강한 남자애였고, 미모의 한수진 선생님을 상대로 부적절한 상상을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되레 친해지고 나서야 죄책감 때문에 상상을 자제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순진하게 강릉에서 서울까지의 대리 비용을 걱정했었지만, 쓸데없는 수많은 걱정거리들과 마찬가지로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한수진 선생님과 나는 소주 한 병만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다시 바닷가를 조금 걸어서 선생님의 차가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 차에서 가방을 꺼낸 선생님과 나는 다시 경포대 바닷가를 걸었다.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파도 소리가 있어서 괜찮았다.
바로 몇 주 전에 민아와 함께 걷다가 발견했던 바닷가의 모텔을 만났다. 나도 모르게 모텔의 간판을 바라보다가 한수진 선생님의 시선을 뒤늦게 발견했다. 선생님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앞장서서 모텔로 향했다.
경포대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모텔 방에 한수진 선생님과 함께 들어갔다. 이제부터 뭘 하게 될지 상상하느라 머릿속이 굉장히 분주했고,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 앞에 편의점 있더라. 난 씻고 있을 테니까. 맥주 좀 사와.”
맥주를 사러 나가면서 내 머릿속에는 한수진 선생님이 씻고 있겠다는 말만 맴돌았다. 맥주를 사왔을 때도 선생님은 씻고 계셨고, 욕탕에서 나온 선생님은 실망스럽게도 옷을 전부 입고 있었다. 상상과는 달랐다.
선생님이 맥주 캔을 따려는 내게 손이라도 씻으라고 했고, 나도 샤워를 하고 나왔다.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려는데, 선생님이 남은 맥주를 마시고는 일어나 침대위에 드러누워서 말했다.
“운전도 하고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다. 나 먼저 잘게”
“저는요?”
“알아서 해”
같이 침대에 누워도 괜찮은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지만, 한수진 선생님이 누워있는 침대에 같이 누워도 괜찮은지 고민하느라 tv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당히 길었던 고민을 마치고 일어나 한수진 선생님의 곁에 누웠고, 선생님을 안으며 가슴을 만졌다. 내 심장이 박살날 것처럼 뛰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파”
한수진 선생님은 차분히 일어나 앉아서 옷을 벗었다.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던 것들보다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었고, 난 그 아름다운 것을 만지고 사랑하고 싶었다.
이런 관계에 문제가 없는지 아주 잠깐 갈등했지만, 이런 순간에 멈출 수 있는 자제력 따윈 없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도 걱정했는데, 본능 앞에 사랑은 사소한 걸림돌이었다. 스승과 제자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이라 애를 조금 먹긴 했어도 할 수는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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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내일 쓰겠습니다.
선추 후감
경포대 추억돋네요
생각이 마음을 거치지 않고 자판을 누르는 이야기입니다. 읽을만 하길 바랍니다.
ㄷㄷ 역대급.
좋은글입니다
북쪽바람님 오랜만이네요 ㅎㅎ
선추천 후감상
북풍님 자주 올려주세요~!!^^
명불허전 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