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한국지역 초토화 폭격[편집]
(6.25 전쟁)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
“we killed off … 20 percent of the population”
커티스 르메이 #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13]
한국지역 초토화 폭격의 핵심적인 주도자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 군 최고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과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rl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
위의 책, 43~44
워싱턴은 미 공군의 북한지역 폭격 시 국경지역 및 민간지역 폭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북한지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폭격하고자 하는 세력이 완전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초기부터 소이탄을 사용한 북한 도시지역 무차별폭격을 주장했다. 오도넬은 맥아더와의 첫만남에서 "북한 내 5개 산업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전쟁초기 르메이나 오도넬의 주장은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서 묻히고 말았을 뿐이다.
위의 책, 73
전략공군사령과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 초기부터 b-29기의 소이탄 활용을 주장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 미 극동공군은 b-29기의 주무기로 GP폭탄만을 사용했다.
위의 책, 76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이과짱짱맨2018/08/01 10:58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부터 벌어졌는데 1942년이 어떻게 미국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전임?
그리고 현재 완전히 장애국가 유사인종국 되버림
이제 몇년만 더 지나면 불량국가로 등록될듯 ?
응 나무위키 커티스 르메이 항목
2.3.1. 한국지역 초토화 폭격[편집]
(6.25 전쟁)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
“we killed off … 20 percent of the population”
커티스 르메이 #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13]
한국지역 초토화 폭격의 핵심적인 주도자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 군 최고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과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rl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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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43~44
워싱턴은 미 공군의 북한지역 폭격 시 국경지역 및 민간지역 폭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북한지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폭격하고자 하는 세력이 완전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초기부터 소이탄을 사용한 북한 도시지역 무차별폭격을 주장했다. 오도넬은 맥아더와의 첫만남에서 "북한 내 5개 산업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전쟁초기 르메이나 오도넬의 주장은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서 묻히고 말았을 뿐이다.
위의 책, 73
전략공군사령과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 초기부터 b-29기의 소이탄 활용을 주장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 미 극동공군은 b-29기의 주무기로 GP폭탄만을 사용했다.
위의 책, 76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부터 벌어졌는데 1942년이 어떻게 미국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전임?
뭐야 갑자기 글씨가 두꺼워졌네?
두꺼운 글씨 나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