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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너무 많이 봤나봐~~
음성지원 되는듯 ㅋ
화내실만 하네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화내실만 하네요
영조나 세조같았으면 뒈졌다
사극을 너무 많이 봤나봐~~
음성지원 되는듯 ㅋ
222
역시
철학이 글러먹은 관리는 사직시켜야
지금 대통령하고 비슷한듯하네요
저때도 자한당이.....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것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구만
그당시 휴대폰도 없는데 뭔 문자를 사용해
ㅅㅂ 또라이네 ㅋㅋㅋ
ㅋㅋㅋ 낚시
임기x
재위o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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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의 나이까지 장수한 충정공(忠貞公) 동산(東山) 정창손(鄭昌孫).
그는 1426년 25세 때부터 1485년 84세의 나이로 사직할 때까지 60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시며 세 번의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초 격동의 시기에 60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 관직생활을 했던 정창손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조선 초기의 역사였다.
정창손은 관직생활 초기 25년간은 대부분 집현전 학자로 정3품 부제학까지 지냈다. 그의 첫 번째 굴절은 1444년 2월 20일이었다. 종4품 응교로 있으면서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죄로 파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꼭 넉달 뒤인 6월 21일 다시 집현전 응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종 때 대사헌, 병조판서, 단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종1품인 우찬성에 올랐다.
이즈음 그의 운명을 바꿀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육신 등은 단종 복위가 성공하면 김질의 장인인 정창손을 영의정으로 삼으려 했다. 1차 거사가 실패한 날 밤 김질은 불안한 마음에 정창손에게 계획을 알렸다. 정창손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사위와 함께 세조에게 역모를 고변했다. 사육신을 비롯한 가담자들의 일족은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정창손은 수충경절좌익공신 2등으로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2년 후인 1458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영의정이 되었다. 관직생활 32년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창손 역시 유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정창손은 어이없는 죄로 1462년 5월 10일 파직되고 12일 전라도 여산으로 부처(付處)되고 만 것이다. 이틀 전인 5월 8일 사정전에서 주연이 벌어졌다. 취흥이 무르익을 쯤 양녕대군이 연풍온천에서 돌아와 연회 자리에서 열세 살 된 세자의 학문에 대해 논했다. 정창손은 세자의 학문이 대성했다고 칭찬했다.
"세자가 크게 통달한 뒤에 국사(國事)를 돌려줄까 하오", "진실로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의심병이 도지고 있던 세조는 영의정 정창손의 당연한 듯한 대답을 세자에게 선위해도 좋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임금으로서 세자가 크게 통달하면 훗날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말에 무심코 답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2008년에 제작된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나왔던 대화내용이군요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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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선위하겠다는 말이 아니었기에 별 뜻 없이 나온 말이었다. 양녕대군은 정창손에게 실수했다며 나무라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임금이 재위 중 선위하겠다는 말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신하로서 그 말을 수용하면 대죄를 짓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사망하기 전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에 동의한 셈이었던 것이다.
"조정이 나를 미워한 까닭으로 정창손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다. 내 무슨 미련이 있어 머무르겠는가?"
세조는 정창손의 악의 없는 말을 꼬투리 삼아 선위를 고집했다. 좌의정 신숙주, 우의정 권남을 비롯한 중신들도 세조의 선위를 제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창손을 국문하라고 주청했다. 결국 정창손은 파직되고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정창손의 유배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5개월 후인 11월 20일 석방되어 12월 7일에는 임금의 장인이나 정1품 공신에게 내리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정창손은 예종 때 남이와 강순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에 올랐고, 성종 즉위와 함께 원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 후 1475년 7월 1일 74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올라 1485년 3월 27일 사직할 때까지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 어머니 윤씨의 폐비논의에 참가했다고 하여 한명회, 윤필상 등과 함께 12간(奸)으로 몰려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