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서
이것은 고행자 (유실되어 있다.)가 수기로 작성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으로, 신성으로 봉인되어 있어 일반인이 열람할 수 없거나 유실된 페이지들이 존재함을 미리 알린다. 이 순례의 서는 성전십자회와는 무관하게 (검열되어 있다.)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외부에 노출되거나 성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장소가 옮겨질 경우 (검열되어 있다.) 세 번의 자전 이후 행성의 경도 기준점으로 경도 0선에 거대한 광휘의 줄기가 내리 꽂히며, 천상에서 (검열되어 있다.) 문이 열리고 기계 천사들과 군악대가 강림한다. 그들은 (검열되어 있다.) 살아남은 자는 (검열되어 있다.) 하고 있다고 관측되었다. 목격한 자들은 대부분 말단부터 석화되고, 기도하고, 애원하다가 끝내는 (검열되어 있다.) (검열되어 있다.) 만일 성역이 아닌 곳에서 이 기록을 발견한다면, 즉시 그 행성을 떠나야 한다.
그 땅 위로, 그의 말씀이 뿌리내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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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첫 번째 장 발췌
순례를 위해 총 스무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견습 수도사 역시 있었으며, 각자 다른 이유가 있었으나 이 순례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하는 것. 그리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 믿는 병자도, 깨달음을 얻으리라 믿는 수행자도 있었다. 내가 이것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한 가지다. 나처럼 거동이 불편하거나 몸이 약한 누군가가, 바꿀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신앙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곳에 올바름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우리의 여정에, 의로우신 그분께서 함께하시기를.
1. 그 외에 옳음이 달리 없게 하라
> 태초에 우주가 혼돈하고 살아 선한 것이 없을 때에 그가 가련한 영들을 어루만지니 모든 산 자들이 그의 앞에 자비를 구하며 무릎 꿇더라. 이에 그가 빛을 정렬하고 천지 만물의 곁에 이르자 그의 뜻이 별에 내려앉으심이라. 모든 별이 그에게 경배하니 그야말로 만성의 아비라. 모든 영이 한목소리로 우짖되 그 외에 옳음이 달리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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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12장 발췌
성역에는 석상들이 있었다. 드높은 바위산의 정상, 안개가 자욱한 대리석 돌판 위에서 그것들 모두는 우뚝 선 종탑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처음 그 광경을 본 우리는 그 석상을 깎은 석공들의 기술력에 감탄했으나, 감탄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천 년간 그곳에서 바람과 모래에 의해 깎여 나가야 했을 그 석상들은 조금의 침식도 없이 말끔했다. 그 순간 우리는 직감했다. 이것은 마법의 일종이라고. 그것들이 언젠가는 살아 있었으리라고.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2. 너희 모두가 그의 뜻을 행하라
> 신의 영광된 오른손이 최초의 별을 품으시니 그곳을 천국이라 이르라. 신께서 강철로 그의 뜻을 행하는 자를 빚으시매 그들이 무릇 듣는 자들에게 섬김을 받고 신의 대리자인 천사라 불린 지라. 천사들의 영도를 받아 어리석은 자들이 천국에 당도하매 그 즉시 옳음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하기에 거리낌이 없더라. 그것이 신께서 보시기에 좋아 산 자들에게 이르니 너희 모두가 나의 뜻을 행하며 낙원의 별을 향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약속의 날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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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55장 발췌
역사의 시작부터 그러했듯, 인류는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는 동안 인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냈으나, 죽음만은 극복할 수 없었다. 천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우리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그들이 죽음 너머의 것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우리는 천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3. 너희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저절로 내게 당도하리라
> 신께서 천국의 아이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으니 그 몸 안에 말씀이 뿌리내리니라. 그러자 그중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가로되 우리가 당신께서 약속하신 그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며 또 그날이 오매 우리가 무엇으로 부름받나이까. 신께서 이르시되 너희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저절로 내게 당도하리라. 신께서 이번엔 왼팔로 아이들을 감싸 안자 곧 그들 위로 광휘가 내려앉고 그들의 안에 올바른 영이 자리하니라. 신께서 보시기에 좋아 그들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나의 오른팔이요 또 왼팔이라. 돌아가 나의 백성들을 구하라. 너희가 곧 나의 사절이요 사도라 불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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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72장 발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쫓던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에 닿을 수 있는 존재들인가?
4. 타협하지 말며 협상하지 말지니라
> 백 인의 사도가 광야로 나아가 말씀을 전파하고 별들로 하여금 의로운 뜻에 앞서는 것이 없게 하노라. 만성이 그들의 왕을 찬양하매 그의 나라가 강림하나 그중 가장 어두운 별이 화답하지 아니함이라. 이에 신께서 심히 노하여 그들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그들의 땅을 두 개로 가르니라. 이에 뜻이 어두운 자가 가로되 어찌하여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아니하시나이까. 신께서 가라사대 이는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를 구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타협하지 말며 협상하지 말지니라. 의로운 너희 듣는 자에게 새 날이 오리라. 옳음과 영광이 내게 있으니 약속의 날 내가 너희를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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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125장 발췌
인간이 보고 들어온 그와, 실제로 그가 이 세상에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는 사뭇 달랐다. 십자경이나 사제들은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말하곤 했지만, 그는 자비롭지 않다. 불의란 말 그대로 불의이기에, 불의한 자들에게는 당연하게도 자비가 아닌 심판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타협하지도, 협상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불의를 멸하는 (검열되어 있다.)의 현신, 그 자체다.
5. 너희 딛고 선 땅이 곧 천국이요 약속이 되게 하라
> 어느 날 신께서 천상의 문을 열고 불의의 궁창에 임하여 몸을 누이시자 그 땅에 의로움이 임하니라. 신이 친히 육신을 입으시매 나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천사들이 머리 숙여 경배함이라. 그러자 의롭지 아니한 자들이 한데 모여 스스로의 불의를 깨닫고 반성하여 그 앞에 저절로 무릎 꿇으니 이는 그의 말씀으로 하여금 새로운 몸을 얻고 완전한 올바름 안에 하나로 복속함이라. 그중 하나가 가로되 내가 당신을 그들에게 무엇이라 하니이까. 신께서 이르시되 나는 곧 의로운 자요 너희의 길이자 이정표니라. 신께서 두 팔로 별을 껴안으니 이는 그곳이 약속하신 새 날이요 그의 왕국이 됨이라. 이에 또 하나가 가로되 내가 이로써 당신의 종이요 손발이 되나이다. 내게 당신의 말씀을 이르소서. 이에 신께서 가라사대 너희 딛고 선 별이 곧 천국이요 약속이 되게 하라. 너희가 간구하는 곳이 곧 나의 왕국이니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불의한 자요 혼돈한 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사도가 거니는 땅에 옳지 아니함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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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201장 발췌
……(중략)…… 말씀으로 움직이는 자들, 기계 천사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 안에 뿌리내린 것이 그분의 뜻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기도한다. 옳은 자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고, 그들은 죽음보다 그 법칙을 더 두려워했다.
6. 너희 듣는 자들아 너희에게 약속한 날이 왔으니 너희는 나를 맞으라
> 다시 이르건대 이는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요 일어날 수 있을 일에 대한 환상이 아님이라. 이것은 계시이며 예언이매 너희 듣는 자들아 우주에 단 한 분 의로우신 그분의 뜻을 받들라.
>
> 그의 자손들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그의 이름을 우짖으면 그분께서 황금으로 지어진 성의 황금으로 빚어진 문을 열고 만 별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리라. 그때에 비로소 불의한 자와 무지한 자들이 광휘의 앞에 스러지니라. 신께서 가로되 내가 참으로 이곳에 왔노라. 너희 듣는 자들아 너희에게 약속한 날이 왔으니 너희는 나를 맞으라. 그러자 백 인의 사도가 그 앞에 무릎 꿇고 기계 천사들이 나팔을 울리니 그가 발 디딘 곳이 곧 천국이요 그렇지 못한 곳은 재가 되어 사라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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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마지막 장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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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올바를 수 있었다. 간단하다. 나는 스스로 바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세상의 진리는 말씀뿐이며, 말씀은 오로지 그분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나는 나의 말과 바람을 모두 지우고 오로지 그분의 말씀만을 섬기기로 했다. 무언가가 내 안에 스미고, 나는 전에 없는 확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분의 말씀이 들린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는 것이 들린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유일하고 무이한 그분의 진정한 이름.
정의.
그분의 뜻을 행할 자, 오직 우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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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또 다른 순례자의 메모
만약 천사가 신의 뜻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들은 천사가 되었다. 몸의 일부를 하나씩 기계로 교체할 때, 그들은 처음엔 비명을 질렀으나, 절반 이상을 교체한 뒤에는 묵직한 기계음을 냈을 뿐이다. 그들은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이 기쁨을 모를진대, 그들이 어떻게 기쁨을 안단 말인가? 정말 천사가, 신의 뜻 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면……
버려진 다크스타 일지 - 상
나는 온몸에 꽃이 피고 가지가 돋아 죽을 것이다. 함께 숲을 걷던 동료들은 이미 나무와 꽃의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숲을 빠져나가고 싶지만 한 방향으로 걸어도 지나온 자리에 도착하며 살려달라 애원해도 듣는 이가 없다. 아니,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따금씩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자는 필멸하며 일생은 즉 만생이라.”
우리는 그 의미에 관심을 갖기보단 당장에 빠져나갈 방법을 갈구하다 못해 욕을 내뱉었다. 숲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지친 동료 하나가 헬멧을 내던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이래서 우주 해적 따위는 하기 싫었는데!”
그 녀석이 로저 스카 님 앞에서 허리를 110도로 굽혀 인사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밤 녀석은 자랑스러운 다크 스타의 일원이 되었다며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나는 옆에서 우주 해적이 뭐가 그렇게 좋냐며 시시덕거렸다. 그때의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우주 해적이 뭐가 좋아서 이런 곳까지 따라왔냐고. 수백 개의 섬광탄을 동시에 터뜨린 듯 한밤중에도 번쩍거리는 나뭇잎으로 울창한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스산한 소리로 울었다.
“피어올라라, 불태워라, 스러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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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다크스타 일지 - 하
그 순간, 동료의 뒤로 사슴 뿔을 닮은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것이 동물인지, 괴물인지, 혹은 정령이라 불리우는 무언가인지 분간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시선으로 좇을 수조차 없었다. 내 시선은 사슴 뿔을 분명하게 바라본 동료 위에서 멈췄다. 동료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동안 살갗 위로는 이름 모를 꽃이 만발하고 근육에선 굵고 거친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왔다.
“살려-“
까지 외치다 숨이 끊긴 녀석은 한 그루의 나무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안타깝게도, 다음 나무가 자라나기까진 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다음 동료, 그 다음, 네 그루, 다섯 그루... 진동하는 꽃향기와 쏟아지는 단말마에 묻히지 않기 위해 무작정 내달렸다.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사람이 나무로 변하는 광경만큼은 우주 해적 인생에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나무로 변하는 죽음을 인간이 어찌 대처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이 기록이 인생 마지막 일지가 되리라 예감하며 쓰는 중이다. 죽음이란 이토록 초라하고도 보잘것없다.
...아니. 어쩌면 죽음이 아닐지 모른다. 끝이 없는 숲을 한 바퀴 돌아 나무가 된 동료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아직 살아있다. 비록 움직일 수도 없고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하나 꽃은 만개하였고 나뭇가지들은 바람결에 사각사각 나긋한 목소리를 낸다. 죽음이라 생각했던 현상이 곧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면, 그리하여 무한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내가 마주할 미래는...
아주 멀리 나무와 나무 사이로 푸른 빛의 사슴 뿔이 쏘다닌다. 저 뿔은 곧 내게로 다가올 것이다. 저 뿔과 분명하게 마주하는 순간 나 역시 한 그루의 나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새 삶을 살려-
나람 호수 생태계 연구 일지 - 상
우리의 목표는 카오스 외곽에 위치한 나람 호수의 수질 검사 및 생태계 변화 연구였다. 조교 푸코는 다행성 다항목 수질분석기의 캘리브레이션을 진행했고, 마르코 교수님은 플라스크와 용액 따위의 준비물을 하나씩 점검했다.
“규격은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여기 행성 기준으로 해야지. 자동 측정 기능 너무 믿지 말고 제대로 확인해.”
“알겠습니다. ...어라? 이거 프로브가 고장난 것 같은데요?”
“뭐? 새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참 나. 창고에 여분이 있을 거야. 루코, 가서 찾아와.”
나는 연구용 소형 비행선 창고로 향했다. 측정용 용액, 세척액, 전극, 소형 인쇄기, 홀로그램 출력 장치가 딸린 현미경 등의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상자를 오 분여간 뒤적거린 끝에 프로브 여분을 찾아냈다. 곧바로 창고를 빠져나오려는 찰나, 한쪽 선반에 비치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신]이란 제목의 책은 디자인으로 보나 보관 상태로 보나 철이 한참 지난 기술서처럼 오래되고 형편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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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람 호수 생태계 연구 일지 - 하
우습게도 인간은 그런 종류의 물건에 한평생 관심이 없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석처럼 이끌리는 성질을 지녔다. 두 손에 꼭 쥐었던 프로브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채 먼지 덮인 책을 집었다. 겉표지를 탈탈 털고 첫 장을 넘기자 녹색 불꽃 그림이 가장 먼저 반겼다. 불은 자신을 품은 책을 가연물로써 끝없이 연소시켜온 것처럼 오랜 세월에도 사그라드는 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손을 대면 그 불길에 데일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던 찰나,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푸코! 조심해!”
“이, 이게 뭐야! 우와악!”
마르코 교수님과 푸코의 목소리를 듣고 뛰쳐나갔을 때, 비록 연구원으로 활동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카오스 중심 방향에서 호수를 향하여 녹색 불꽃이 걸어오고 있었다. 관목보다 작은 몸통에 짧은 팔다리가 달린 이족보행 생명체, 몸은 콜로이드 상태의 물질처럼 출렁이지만 머리에선 연소 작용이 일어나는 불꽃 덩어리는 한 걸음씩 푸코에게 다가갔다. 푸코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치면서도 연구자로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였는지 녹색 불꽃 생명체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녹색 불꽃 생명체는 푸코가 떨어뜨린 수질분석기를 집어들었다. 그러곤 푸코에게 수질분석기를 건네며 물과 불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루-?”
어느 카오스 식물의 내부에서 발견된 일지 - 상
식물학 연구가 시작된 이래 학자의 목숨이 가장 크게 위협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물론 과거라고 위험한 식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인간보다 거대한 크기의 식충식물부터 잎 표피에 독성 화학물을 분비시켜 스치기만 해도 사망에 이르는 쐐기풀, 줄기엔 가시가 빼곡한데다 수류탄처럼 터지는 씨앗을 떨구는 나무까지. 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였고 진화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학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연구를 이어갔다. 수동적이고 정적으로 보이는 식물과 인간 사이에 나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다르다. 카오스의 영향을 받은 식물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얻었다.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 인간을 공격하는가 하면 쓰러진 시체를 양분으로 삼기도 한다. 아르키아논을 위시한 카오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몬스터’가 된 것이다. 대적할 만한 무기를 지니지 않았다면 카오스의 식물을 마주했을 때 도망부터 치고 봐야 한다. 실제로 식물학자의 연구 범위가 카오스 식물 생태계까지 확장된 이후 본 직군의 산재사망률은 100배 이상 증가했다. 줄다리기가 아닌 쌍방의 수렵으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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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카오스 식물의 내부에서 발견된 일지 - 하
그럼에도 카오스 식물의 연구가 지속되는 이유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 가능성에서 비롯한다. 몬스터화된 카오스 식물은 기존 식물의 생존·진화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중에 있다. 일례로, 인간의 육체에서 꽃과 나무가 자란 듯한 형태의 한 식물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외형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본떴을 뿐만 아니라 조직 구성 요소 및 세포 단위 성분에서도 인간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부분이 다수 확인된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한 식물인지, 카오스의 영향으로 식물화된 인간인지조차 모호한 지경이다. 학계에선 식물학자의 머릿수만큼 다양한 종류의 해석이 쏟아졌다. 어떤 해석을 정설로 일컬을 만큼 의견을 좁히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학자들은 흥분하고 몰두한다.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배낭을 꾸리고 학회 수송선에 올랐다. 무궁무진한 가능성 사이에서 내 가설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27년 경력의 식물학자로서 장담컨데, 카오스 식물 중 일부 개체는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탄생하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다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요컨데 초월적 존재가 식물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경제학적 관점으로 분석한 창조적 파괴에 관한 논문 - 상
자본주의 경제학엔 ‘창조적 파괴’란 개념이 있다. 기업들은 경제적 이윤을 높이기 위하여 다방면의 노력을 기하는데, 이를 통해 성공적인 혁신이 발생하는 경우 해당 기업은 시장을 독점하며 경쟁에서 밀려난 다른 기업들은 시장에서 퇴출당한다는 것이다. 독점 기업의 혁신은 창조, 다른 기업들의 도태와 몰락은 파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는 돈의 총량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구조이므로 창조와 파괴 역시 순환한다. 창조는 독점 기업의 일회성 혁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장을 점유하기 위한 새로운 기업들의 창조는 불시에 발생한다. 새로운 창조는 곧 기존의 창조를 파괴한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굴지의 대기업이 시대에 뒤쳐져 몰락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 세 가지만 떠올려 보라. 그 물건들이 과거엔 어떤 물건으로 대체되었는지, 대체된 물건을 만들던 회사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혹은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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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적 관점으로 분석한 창조적 파괴에 관한 논문 - 하
창조적 파괴는 비단 경제학에 국한된 용어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구의 역사와 함께한 생태계의 창조적 파괴로부터 영감을 받은 개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변이 과정을 거듭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이 가장 극단적인 예시이다. 작금으로 시선을 돌리자면 카오스 환경에서 다른 생명체보다 특출난 강점을 지닌 퍼스트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창조와 파괴의 반복은 우주에 있는 행성과 방주, 생명체의 가짓수에 비례하여 발생하는 중에 있다.
이제 시선을 경제나 인류가 아닌 우주 전체로 옮겨보자. 빅뱅 이론부터 엔트로피의 비가역성과 카오스의 발생까지, 우리는 우주 자체가 더욱 거대한 무질서를 야기하는 에너지의 발산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창조와 파괴가 반복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기업의 창조와 파괴를 유발하는 원인은 자본이다. 특정 환경에서 종족의 창조와 파괴를 진화라는 이름으로 수렴시키는 근원이 환경 그 자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창조와 파괴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원인으로 우주 자체, 혹은 우주 내에서 관측할 수 없는 초월적 생명체가 존재함을 가정하여 자본주의 경제학적 관점으로 우주의 창조적 파괴를 분석한다.
창조와 파괴의 목소리
강이나 호수가 아닌 우주에서도 창조와 파괴의 정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행성의 소멸 과정(초신성)에서 발생하는 성분과 새로운 행성이 태어날 때의 구성 성분이 동일하다는 점은 거대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한 생명의 소멸이 다음 생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윤회’의 가장 강력한 근거인 셈이다. 다만 물의 기화·응축이나 별의 초신성과 달리 나와 가까이 지낸 뭇 생명의 윤회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기에 내가 이 자리에 뿌리내렸다. 만개한 꽃무릇의 독특한 향기, 무리지어 다니는 정령들의 생명력, 죽음을 거듭하기 위해 부활하는 알, 침잠하는 오물과 타오르는 불꽃, 자기희생과 불살생을 깨우치는 숲... 이곳에서 나는 과거를 잊고 새로이 태어났다. 나는 신목의 이파리이자 중생에게 몸뚱아리를 내어준 밑동, 언젠가 소멸될 뿌리이다. 내게로 오라. 옹이 구멍 안에서 움트는 불꽃을 직접 만지고 밤에 눈뜨는 올빼미처럼 깨우치거라.
영혼의 존재에 관하여
그러던 제이콥이 오늘은 정말로 부모님이 찾아왔다며 영상을 보냈다. 열린 창문으로 나비가 날아들어와 제이콥의 콧잔등에 앉는 장면이었는데, 겨우 나비 한 마리 날아온 걸로 영혼의 유무를 따지기엔 어렵지 않느냐며 초 치고픈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정말 그렇게 말한다면 제이콥은 열흘은 더 말을 섞으려 들지 않을 것 같아 꾹 참았다.
“신기하네.”
한 마디 답장만 툭 던지고 저녁 먹으러 가려는데 제이콥이 다시 영상을 보냈다. 이번 영상엔 나비 두 마리가 제이콥의 눈썹과 정수리 위에 앉아 있었다. 제이콥은 부모님 이름을 연신 웅얼거리며 엉엉 울었다. 바보 같은 제이콥. 꺼이꺼이 울 정도로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에 한 손으론 자기 모습을 찍고 있었다는 말이지. 역시 이성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드디어 정말로 저녁을 먹으러 가려는데, 제이콥이 또 또 다시 영상을 보냈다. 이번엔 제이콥이 교육용 공구 키트로 작은 관을 만들고 있었다. 한 쌍의 나비는 기운이 다했는지 날갯짓을 멈추고 바닥을 기어다녔다.
“엄마 아빠가 말해줬어. 다음엔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래서 다시 찾아오실 때까지 편안하게 계시라고 관을 만들고 있어. 얼마나 오래 걸리든 이 관을 보며 기다릴 거야. 너도 같이 기다려 줘, 리사.”
제이콥이 말을 마치자 한 쌍의 나비가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느리고 부드러운 날갯짓은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신을 만난 이야기
들어보세요. 세상에 저보다 가까이에서 신을 만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3년 전 함선 추락 사고로 가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요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그것도 한계란 게 있는 법이고, 저 같은 서민들은 다른 성계 제품 하나 사기에도 지갑이 빠듯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보험을 들었기로서니 곧 죽을 사람 살릴 만큼 인본주의적 기업 상품은 아닌지라 방법이라 할 수도 없었지요. 저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저를 진료하던 의사 양반도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보험료를 전부 사용하고 나면 빈털터리가 된 채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을 거라 했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노잣돈까지 뺏어다가 자기네들 주머니에 쳐 넣겠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있으려니 당장에라도 의사 양반 멱살을 쥐어 뜯고 싶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꿈쩍도 않던지 마치 수억 년 전부터 그리 굳어있던 암석 같았지요.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지, 팔다리엔 이름 모를 기계에서 뻗어나온 패치와 불투명한 액체를 담은 링거가 꽂혀있지, 그렇게 가여운 모습일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히 굴러가는 바퀴의 진정한 의미 : 리-사이클
물레는 실을 뽑고 수레는 짐을 나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두 물건 사이엔 쉬지 않고 구르는 바퀴가 있습니다. 물레질로 명주실이 뽑히는 이유는 바퀴에 누에고치를 감았기 때문이며 수레로 짐 나르는 일이 거뜬한 것은 그 짐을 바퀴가 짊어지는 까닭입니다. 바퀴는 무엇을 감느냐 또는 어떻게 구르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가 천차만별로 나뉩니다. 저마다 주어진 삶의 목적을 지닌 채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우리네 인생을 닮았습니다.
바퀴는 예로부터 운명과 순환, 인생의 가르침을 뜻하였습니다. 로마 신화의 여신 포르투나는 운명의 바퀴를 굴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였고 불교에선 교의를 법륜이라는 이름의 바퀴로 형상화하여 그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바퀴가 굴러간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는 과정이자 수단, 그리고 목적지 자체입니다.
구시대의 유물, 전설과 신화의 허구성을 밝힌다 - 상
구시대의 기록을 돌아보는 일은 항상 흥미롭다. 기록이 오래될수록 현대에선 찾아보기 힘든 일화들이 전설과 신화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학, 이성, 논리가 대중을 이끄는 프로파간다로 자리잡은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특정 직업군의 전유물이거나 생존을 위한 도구, 혹은 종교적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마술적 수단에 불과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자면 과학의 정치화는 가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혁명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 더더욱 신경 쓰였다. 과학이 순수예술에 범람하기 시작한 순간을 아는가. 인류가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딛고 2만여 개의 진공관을 컴퓨터라 일컫던 시절, 인공지능을 향한 인간의 상상력은 화수분처럼 샘솟았다. 인류를 지배하는 인공지능은 SF 장르의 단골 소재였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공지능의 이야기 역시 심심찮게 보였다.
그 중 어느 무명작가가 쓴 [영혼의 발명]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에게 영혼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다. 주인공 ‘오토’는 어떤 명령이든 완벽하게 수행하지만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이다. 저택의 주인이자 매사에 쉽게 따분함을 느끼는 백만장자 ‘니콜’은 오토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린다. 바로 오토 자신의 영혼을 찾아오라는 것.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된 오토는 영혼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웹에 업로드된 게시글 중 추천 수가 많은 내용부터 따라하기도 하고 유명 종교단체를 찾아가 깨달음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검색 결과로 산출된 수백 가지 방법들을 모두 수행한 이후에도 영혼은 생기지 않는다. 결국 오토는 과부하로 인해 회로가 파괴되고, 흥미를 잃은 니콜은 오토를 폐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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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의 유물, 전설과 신화의 허구성을 밝힌다 - 하
결국 로봇이 영혼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단념하는 니콜의 모습을 끝으로 책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으나, 4쪽에 불과한 마지막 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며칠 후부터 니콜은 헛구역질이나 근육통 등을 겪으며 점차 건강이 악화된다. 원인을 알기 위해 찾아간 의사는 예상 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진단 결과 임신 초기 증상이라는 것, 또한 놀랍게도 임신 추정 날짜가 오토를 폐기한 날이라는 것이다. 생경한 기분을 느낀 니콜이 뱃속의 아이에게 오토라는 태명을 지어주며 책은 마무리된다.
책이 출간된 무렵의 사람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비성을 갈구한 듯하다. 아니, 영혼이라는 개념을 향한 맹신은 어쩌면 현재진행형일지 모른다. 누구보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자들까지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평생을 바치니 말이다. 만일 소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즉 영혼을 관장하는 신이 있어 실제로 영혼의 순환이 이루어진다면 ‘영혼의 발명’을 읽은 후의 감상이 이토록 냉담하고도 꺼림칙할 순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신을 직접 만나러 간다. 과학과 이성을 통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책에선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C’라고 통칭된다던 존재. 영혼의 순환을 관장하는 여섯 팔의 신. 그를 영접할 수 있다는 모임에 찾아가 허무맹랑한 신념에 사로잡힌 이들의 허상을 깨부술 것이다.
어떤 별에 남아있던 성간 메신저 기록
◆: 우리 별에선 영혼을 꽃이라고 생각했어. 시체를 흙에 묻으면 그 자리에 봉분화가 피었거든.
\- 낭만적인 이야기구나.
◆: 봉분화 씨앗이 아주 오랜 시간 몸 속에 숨어있다가 시체가 되면 썩은 살을 양분 삼아 피어나는 원리래.
\- 내 낭만을 부수지 말아줘.
◆: 미안. 너네 별은 특별한 얘기 없어?
\- 여러 얘기가 있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든가, 몸이 썩지 않게 보관하면 사후세계에서 부활할 수 있다든가.
◆: 천국?
\- 영생의 세계. 행복이 보장된 낙원.
◆: 어디에 있는데?
\- 하늘 위에.
◆: 우주를 알기 이전에 생긴 이야기겠구나.
\- 넌 어떻게 생각해?
◆: 궁금해?
\- 네 생각은 전부 궁금하지.
◆: 하핫, 두근거리네.
\- 어서 말해줘. 놀리지 않을게.
◆: 요즘 부쩍 관심이 가서 여러 글들을 찾아봤어. ‘영혼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더라.
\- 영혼의 신?
◆: 영혼의 순환을 관장하는 신이라나봐. 나도 처음엔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막 웃었는데, 찾으면 찾을수록 사람들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거 있지. 실제로 신을 만났다는 사람도 있고, 처음엔 믿지 않았다가 모임을 다녀온 이후 푹 빠져버렸다는 과학자도 있어.
\- 너는 어떤데?
◆: 이제부터 찾아보려고. 궁금해?
\- 아까 했던 말 같은데. 네 생각은 전부 궁금해.
◆: 하핫, 그래. 으음. 세상에 신이 얼마나 많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은 바로 키르켄일 거야.
\- 특이한 이름이네.
◆: 누가 지었을까? 신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이름을 직접 짓는 걸까?
\- 한번 물어볼까?
◆: 장소와 준비물을 알려줄게. 내일 정해진 시간까지 와. 같이 만나러 가자.
\- 신을 만난다니 두근거리는데.
◆: 우리가 평생 함께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자.
\- 그건 안 된다고 하면?
◆: 가장 먼저 이 기록을 지울 거야.
\- 너무해!
◆: 하핫, 농담이야.
◆: 그거 알아?
◆: 나 아직 안 지웠어.
◆: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 곧 다시 만나러 갈게.
◆: 지루하다고 다른 사람 무덤에서 피어나면 안 돼, 알았지?
◆: 기다려 줘, 나의 봉분화.
무형의 아귀, 그 기록
기록 1
오, 못 보던 얼굴이군. 방금 들어왔나 봐? 하하, 여기서 그런 얼빠진 얼굴을 하는 건 진작에 미쳐서 정신을 놓은 놈이거나 이제 들어온 파릇파릇한 놈들뿐이지. 아아, 자신에 대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여기선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좀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떠오르거나, 그전에 미쳐버리거나 둘 중 하나 일 거야. 그래도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보니 반갑긴 하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해칠 생각 없으니까 그 깡통 내려놓도록 해.
정 불안하면 너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볼까? 행색이 남루한 걸 보면 제국 소속은 아니겠고… 신앙심이 있어 보이진 않으니 성전 십자회도 아니야. 테라시온에서 넘어온 팀은 얼마 전에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전멸했지만, 아직 그쪽으로 소식이 넘어가진 않았으니 이렇게 금방 새 조사원을 보낼 리 없지. 장비의 연식이 꽤 오래되었군. 이런 구식 장비를 아직 쓰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이언 레인 소속인가? 구식 장비에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마. 어차피 여기선 어떤 첨단 장비를 들고 와도 전부 먹통이 되니, 세련된 고철 덩어리를 들고 있는 것뿐이야. 카오스에 대해서는 기억나나? 기억나는 게 없다면 굳이 생각하지 마. 네가 영 불안해하니 한 거긴 하지만 이곳에서 겉보기로 성질을 파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어. 잘난 학자도 군인들도 이곳에선 얼마 안 가 미쳐버리고 말 거든.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널 지키는 방법일지도 모르지. 이런, 내 표현이 너무 거칠었나? 표정 풀어. 그래, 새로운 친구가 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
기록 2
계속 경계하고 있는 거 피곤하지 않아? 당연히 티 나지. 아까부터 도통 이쪽과 가까워질 생각을 안 하잖아. 벌써 그렇게 기운 뺄 필요 없어. 겁을 좀 주긴 했지만... 운 좋게도 넌 들어오자마자 날 만났으니 금방 죽진 않을 거야. 공허에서 살아남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눈을 감는 거야. 그러면 넌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어. 길 찾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안내할 테니까. 길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하하, 지금 그걸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 자, 내 손을 잡아. 쭉쭉 나아가 보자고.
세상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특이 현상들이 많지만, 공허는 특히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야. 공허에 대한 가설이야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무엇이 정답인지 인류는 아직 답을 찾아내지 못했지. 인류가 아직 지구에 살던 시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카오스가 결국 우주의 한 면을 파먹어버린 것이라는 얘기도 있잖아. 뭐, 정답이 무엇이건 공허는 오랜 시간 연구자들이 자신에게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이곳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건 엊그제의 일이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참이니 당장 답을 찾아내겠다는 건 성급한 욕심이야. 카오스의 등장으로 인류는 순식간에 너무 많은 수수께끼를 떠안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연구자가 카오스라는 수수께끼에 더 매몰되어 있는 상황이니 공허를 연구하는 우리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려면 아직 먼 이야기지.
왜 그런 표정이야? 너 자신은 기억할 수 없겠지만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것부터가 너 역시 숭고한 뜻을 지닌 연구자 중 한 명이란 증거지. 넌 샌님 티가 나니 그쪽은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야 네 옷에 출입증이 걸려 있잖아.
[하얀 깃 팀의 연구원 ■■■의 기록 첫 번째]
가지고 있던 것들을 통해 추론한 '나'의 역할에 맡게 이 공간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추정해 보길, 아마도 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카오스에 진입한 연구원인 듯하다. 함께 걷고 있는 중년의 여성은 꽤 예전에 준비된 선발대의 일원으로, 공허의 규명을 위해 오랜 시간을 이 께름칙한 장소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녀가 공허의 베테랑이라는 것쯤은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내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눈을 감길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내 두 눈으로 이 공간을 마주하기로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직 그녀를 믿을 수 없다. 당신이 서운할 게 뭐 있어. 이런 건 상식이라고.
공허라는 이름을 한 이 공간은 사물이 존재하는지 공간이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수평선은 당연히 없고 오히려 한없이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형상에 걷고 있는데도 앞으로 걷는 건지 뒤로 걷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어딘가에 훅 추락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상념에 잠겨 걷다 보면 무언가 나의 머릿속을 건드는 듯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인지 아무도 모르겠지.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나의 상태에 관해 설명하자면… 우선 다리를 오른쪽부터 내미는 게 맞는지 왼쪽부터 내미는 게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걷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였는지, 그 방법을 잊어버렸다. 서는 건 또 어떻고? ‘다리’를 사용하는 법을 잊게 된다. 애초에 내가 왜 걷고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 걷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넘어졌을 때 어딘가 부드러운 것에 넘어질 때도 있고, 딱딱한 것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본 적도 있다. 몸이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언가에 대해 알아낼 길은 요원하다.
이렇듯 공허는 무엇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재도, 생각도, 행동도, 의지도, 의문도 무엇이건 먹어 치운다. 조금 전에도 무언가 불평을 하려다 잊어버리게 된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기분 탓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말한 대로 너무 예민해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꾸 신경 쓰이게 된다.
그런 와중에 나는 또다시 넘어지고 만다.
[하얀 깃 팀의 연구원 ■■■의 기록 두 번째]
젠장,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젠 바닥을 구르며 이동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웃지 마, 나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다리를 내밀다 몸이 제 마음대로 멈춰버린다. 아까는 왼발을 내밀고 난 뒤에 내가 무얼 하려 했는지 잊어버려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뒤늦게 내가 없는 걸 눈치챈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 어둠 속에서 홀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을 거란 생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상황이 심각한 걸 아는지 모르는 지, 아니면 이미 너무 익숙해서 이 정도는 아니라는 건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가 넘어지면 그녀는 뭐가 재미있는지 호쾌하게 웃으며 날 일으켜 세운다. ‘지면’이라는 것을 밟고 서면 제대로 서 있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발아래가 울렁거려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귓가에선 작은 중얼거림이 들린다. 그러다 가도 소리를 인지하기 위해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두려울 정도로 정적이 찾아온다. 바로 옆 일행의 존재조차 지워진 것 같은 완전한 침묵과 고요가 방문해 무방비한 등골을 쓸고 지나간다. 자기 감각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카오스와 닮은 공간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이곳이 카오스였다면 나는 진즉 착란 증세를 보이며 아군을 공격했을 거다.
그런데도 그녀는 카오스에 진입한 퍼스트처럼 망설임 없이 앞장서 길을 찾아냈다. 그녀의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묘한 불안감을 만들어 낸다. 이 어둠과 혼란스러운 감각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고 있는 건지, 목적지가 존재하긴 하는지, 가는 방향이 맞기는 한 건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또 많은 것들이 알 수 없는 손길에 쓸려간다. 휘발되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녀는 자신을 연구원이라 소개했던 것 같은데, 사실은 퍼스트였나? 퍼스트에 요원 이외에 다른 삶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연구원이 되는 일도 있나 보다. 아. 그래서 장수한 건가? 퍼스트들의 평균 수명은 긴 편이 아니다. 대부분 중년은커녕 장년(壯年)이 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그녀와 비슷한 연배까지 살아남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텐데... 사고할수록 무언가가 싹틀 뻔한데 생각을 써가는 손길에 함께 쓸려 나간다. 알겠어, 당신이 아까 설명했잖아. 그래도 기록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어디까지 남기고 있었지... 아아, 그래. 퍼스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 ...퍼스트가 뭔데?
[하얀 깃 팀의 연구원 ■■■의 기록 세 번째]
비보가 있다. 내 방향 감각이 완전히 망가졌다. 어린애처럼 이 답 없는 공간을 중년의 여성과 손잡으며 걸어가야 한다는 거다. 내가 어디에서 멈춰서고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제 마음대로 나아가는 걸 거부하거나 가려던 방향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녀를 잃어버린 게 벌써 몇번째인지... 신기하게도 그녀는 내가 미아가 되면 반드시 나를 찾아온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묻자, 위치 추적기를 붙여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농담이나 하고... 제정신이 아닌 공간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제정신 아닌 여자 같다. 전자기기는 애초에 먹통이고 기껏 해봐야 작동하는 건 기록용으로 가져온 구시대의 레코드뿐인데 발신기 같은 게 작동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앞당기는 손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공복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나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체력이 떨어져 힘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새카만 어둠 속에 있는데도 볕을 맞으며 오후를 즐기는 듯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분명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했는데, 그런 적이 있었는지조차 이제는 흐릿하다.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해 가져온 장치는 멈춘 채 버려진 지 오래고, 얼마나 걸었는지 기록할 만한 기계도 없다. 이 기록도 몇 번이나 잃었고, 기록한다는 행위 자체를 몇 번이나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게 내 할 일이니 잊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데... 차라리 처음에 그녀가 조언했던 것처럼 눈을 감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눈을 감는 게 정신 건강에는 더 좋았을지도.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라고? 그러면 여기서 더 망가지지 않을 수 있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장담해...
하, 좋아.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서 무슨 효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어차피 어둠밖에 없는 공간이라 눈을 감건 뜨건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아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의 소름 끼치는 고요함도 속삭임도 없다. 걸을 때마다 공간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진다. 일정한 박자로 반복되는 울림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지면의 흔들림보단 공간 전체가 울리는 감각이 가슴 언저리에 손을 대면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칭하는 말이 있던 것 같은데 뭐였지?
기록 (음성)
두 번째 비보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걷는’ 것을 할 수 없어 일행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게 되었다.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젠 시간이 얼마나 흐르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기록을 그만둘까 했지만, 마음속 한편에선 멈춰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기록하기로 했다. 음성 기록을 남기려는 나의 의지를 듣고 그녀는 인간의 이런 점을 참 좋아해. 라고 웃으며 칭찬했다. 그러나 그 뒤에 레코드를 뺏어 들며 기록은 내게 더는 필요 없는 행위라 타일렀다. 이쪽에서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 싶어져 기록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날 ‘지면’에 뉘었다.
이제 눈을 떠도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시야에 바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고치였다. 아름다운 색으로 빛나는 것 같은 실로 지어진 고치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에 압도당하는 한편으로는 눈앞에 실존하는 이것이 어쩐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형태 없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옛 인류가 공허를 발견할 때 우리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지… 그땐 카오스가 없었으니, 우주의 비밀을 규명할 열쇠가 공허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고, 숭고한 사명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한편으론 한정된 자원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희망을 싣고 우주로 떠났지. 하지만 당시엔 우주로 떠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었고, 순탄한 여정도 아니야. 오히려 고행길에 오르는 것에 더 가까웠지…”
내가 누워있는 지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은 어떤 문자 같기도 했고 그림 같기도 했다. 손끝으로 문양을 만지작거리자, 그녀가 적혀 있는 글자 중 일부를 알려주었다.
'니힐럼'에게 바치는 송시가 적혀 있다고 한다. 그녀는 니힐럼에게 먹이를 줄 것이라 말했다.
[하얀 깃 팀의 연구원 ■■■의 기록 네 번째]
발아래의 진동에 관해 물어보니 그녀는 목적지를 향해 옳게 가고 있는 거라고 대답했다. 명확한 해답 없이 또 뭉뚱그리는 애매한 대답이지만 어째서인지 이전과 같은 불안과 의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을 두려워하던 나를 위해 계속해서 잡담을 늘어놓던 일행의 이야기를 더는 이해하지 못하게 될 무렵… 갉작이며 무언가를 파먹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이곳이 새카만 공허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쥐라도 키우나, 쥐에게 먹이라도 주나 싶은 소리였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출처를 찾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리가 가까워지거나 말거나 뭘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원래의 나라면 쥐가 가까워진 게 아닐까? 호들갑을 떨며 주변을 둘러봐야 할 텐데…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작은 위화감이 수면 위에 떠오르는데...
통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방금 내게 통증이 느껴지지 않냐 물었다. 혹시 너무 오래 걸어서 무릎이 아픈가? 나이가 있어 보이니 그럴지도 모르지. 아, 또 웃고 있잖아.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야? 뭐... 그래도 전처럼 짜증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웃으니 나도 따라 웃었다. 아, 한참 웃고 나니 어쩐지 조금 졸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기록
“모두가 공허를 마주하지 못한 채 죽어버렸지만, 난 운이 좋은 편이었지. 식량을 뺏기고 버려진 곳이 공허와 이어지는 길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가 말하며 장갑을 벗자, 고치와 같은 색으로 물든 손이 나타났다. 사람의 손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만 유기체보다는 어떠한 무형의 현상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의 손은 내몸 안으로 파고들어 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휘젓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뜯어 먹힌 듯한 이빨 자국과 형체가 남아 있지 않은 나의 몸이 보였다. 팔도, 다리도, 몸도 이빨 자국과 함께 비어 신체의 단면이 보이는데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당황한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녀의 손에 짓눌린 채 뒤집어진 벌레처럼 버둥거릴 뿐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오랜 의문의 해답을 찾아낸 거야.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은 공허에 있다는걸. 이 모든 걸 안겨준 카오스에 감사할 따름이다.”
몸 안을 짚어가던 그녀가 드디어 원하던 것을 발견했는지 손아귀에 힘을 쥐고 그것을 뜯어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에너지원처럼 생기기도 했고 반짝이는 빛 덩어리로 보이기도, 작은 고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아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쓸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숨을 쉬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몸이 끝부분부터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수확에 협조해 주어 고맙다. 요즘 목자들이 영 괜찮은 양을 찾아내지 못해 이래저래 걱정이었거든. 네 부대원들도 모두 수확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갔으니, 공허가 모든 걸 삼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너희가 있어 인류는 더 나아질 수 있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는 나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격리실 기록
눈을 뜨니 나는 아이언 레인에 있었다. 라이프코어가 잘 작동한 모양이다. 다만 윗선은 아직 내가 정상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는지 아직도 함선의 격리실에 갇혀 있는 상태다. 탈출의 후유증인지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지만 충분히 제정신인데... 이쪽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탈출 직전 보았던 그것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아직도 내가 꿈꾼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그걸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인지 무지개를 담아 아름다운 실로 짜인 듯한 고치가 지금도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의 나라면 알 것 같았다.
그건 태어나길 원한다. 고치 속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에 존재하길 원한다. 그것이 태어나면 혼돈이 불려 오고 고치가 세상을 덮는다. 세상은 누에의 잎사귀가 되어 검은 안식을 찬양한다. 송시를 외치고 공허에 바치고 요람에 투신하며 춤추면 우리는 허무 속에 용해되어 함께한다. 공허의 식탁에 바쳐진 인간의 사랑을. 존재의 인식이 기아를 축복하라. 나는 아귀다. 나는 무형이고 나는 곧 태어나 이 고치를 벗어날 것이다. 축복과 생명으로 가득한 땅의 생명들아, 비틀고 춤추고 위대한 공허의 일체를...
군의관 보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패널이 바닥에 던져졌다. 아이언 레인 원수만이 걸칠 수 있는 망토가 젊은 남성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패널을 던진 상관의 눈치를 보던 군의관 한 명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스캔 결과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형태로 재생되고 있는 걸 보면... 변이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변이체가 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연명제를 사용해 봤지만, 신경계가 무너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보입니다. 라이프코어의 백업 데이터를 통한 소생 역시 시도해 봤으나... 코어의 데이터 자체가 실시간으로 소멸하고 있어 소생할 수 없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그는 가망이 없습니다. 보고서에 적혀 있다시피 그의 유전 형질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어버렸으니, 시간이 지난 뒤에는 괴물 아니면 광신도 둘 중 하나가 될 뿐이라 여겨집니다…”
숨 막히는 침묵에 마른세수를 연신 하던 남자는 남성의 손이 펼친 채 내밀어지자 재빠르게 보고서가 적힌 패널을 주워 조심스럽게 내민다. 이윽고 젊은 남성이 입을 연다.
“대원수께는 내가 보고하지. 이 일에 관해선 함구하도록.”
그가 턱짓하자 곁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격리실로 향하고 군의관은 경례하며 방 밖을 나선다. 다시 한번 방 안에는 적막이 차오르고,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는 피로한 기색을 내비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랫입술을 씹은 남성은 “늙은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유산에 매달리는 군…” 이라 중얼거리며 몇 번인가 패널을 조작했다. 필요한 일을 모두 한 듯 패널을 내려놓은 남성은 미련 한 톨 보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패널에는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무형의 아귀] 탐사 작전을 종결. 데이터 말소.
기록을 먹는 신
퍼스트 콘택트
카오스 ‘푸른 항아리’에서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석판이 발견되었다.
내용을 해독할 수 없어, 우리 연구소로 이관되었다.
비록 ‘석판’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 재질이나 기원 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
불길하다기보다는, 마치 자신을 해석해 달라고 조용히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낯선 감정은 연구원 초기 시절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확신한다. 이 석판은 학계에 혁명적인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다.
해석을 위한 길
작성자: 앨런 파이크
석판의 해독을 위해 다양한 고대 언어를 대입해서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진전이 없다.
인류의 언어뿐만 아니라, 외계의 언어, 변방 행성의 사투리, 각종 기호학을 대입해서 해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낙서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으나, 나는 분명 이 석판에 새겨진 것은 글자이며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달하려고 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파괴된 상식
작성자: 앨런 파이크
석판이 제작된 시기를 알아내기 위해,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제작된 시기에 맞는 언어를 통해 해석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으로, 우주 탄생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과를 들었을 때, 모두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재측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모든 연구자들이 깨달았을 것이다. 결과는 똑같을 것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물건은 우리의 상식을 뒤바꿀 물건이라는 것을.
계승되는 의지
작성자: 앨런 파이크
드디어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카오스 '푸른 항아리' 탐사에서, 해석본이 될 만한 문서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해당 기록은 어떤 연구자가 석판을 해석하기 위해 인류의 언어로 남긴 기록이었고, 그 기록을 통해서 석판의 내용 일부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완전한 해석을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이건 석판 해독을 위한 가장 큰 진보였다.
다만 최초에 이 기록을 남긴 연구자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왜 우리는 이 연구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걸까?
기록은 의무다
작성자: 앨런 파이크
석판 해독을 시도한 지 수개월이 흘렀다.
시간 감각마저 희미해졌지만, 점차 석판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석판은 반복적으로 어떤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그 존재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간직한 자로, 오컬트에서 말하는 ‘아카식 레코드’와 유사하다.
이 석판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상조차 못 한 지식에 도달할 것이다.
카오스를 이해하는 것 역시,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최근엔 오직 석판 해독
의외로 더 나올 원안이 꽤 있었다는데 놀람 난 더 안나오길래 지금 클라에 있는건 다 캔건가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