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는 1817년 전역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영국은 스리랑카를 지배하기 위해 당시 스리랑카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종교이자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상좌부 불교를 박살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힌두교를 믿던 타밀족을 일부러 이주시켜서 상좌부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리족을 견제하고 적극적인 개신교 선교를 실시하는 한편,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사원과 대장경을 파괴하는 등의 행동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도저히 불교 기세가 꺾이지 않고 저항이 이어지자 아예 불교의 교리 자체를 깎아내리고 논리성으로 박살내려는 시도를 하게 되죠.
그 일환으로 1873년 파아나두라 대논쟁이라는 종교 끝장토론을 엽니다.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서 영국 제국주의자 눈에 미개하다고 생각되던 스리랑카인들과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식인인 상좌부 불교 승려들에게 망신을 주려고 했죠. 토론도 보면 개신교측이 먼저 발언하면서 불교 교리를 비난하면 그걸 불교측 대표 승려가 막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불공평한 방식이죠.
그런데 개신교측 대표로 나온 두 명의 선교사들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로 미개인을 대하듯 불교측 대표 구나난다 데라를 공격했지만 전혀 공격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구나난다 데라는 논리적으로 개신교의 공격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존재, 윤리 도덕, 성경 해석 등으로 역공을 펼쳐 개신교측 선교사들이 망신을 당했죠.
더구나 이 토론은 첫날 5천, 둘쩻날 1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데다가 기자들과 지식인들도 모여서 기록하고 있었기에 개신교가 교리 논쟁에서 패배한 사실이 왜곡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스리랑카 전역에 전달되었으며, 토론 패배 이후에도 개신교측은 치졸한 태도를 보여 여론을 더 악화시켰죠.
이후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는 급속도로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상좌부 불교가 싱할리족들의 민족 종교화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솔찍히 개신교가 불교를 논리로 이기는건 불가능 한데 멍청했네
솔찍히 개신교가 불교를 논리로 이기는건 불가능 한데 멍청했네
역시 미개한 영길리야. 저러니까 온세상에 악을 퍼뜨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