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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카사마츠의 밤


[말딸,괴문서]괴물과 카사마츠의 밤_1.jpg




하루는 길 때도 있지만, 짧을 때도 있다.
특히 초겨울 언저리에 들어선 시기면 더욱 짧게 느껴진다.
전날, 영화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본래 트레이너와 오구리 캡의 일정은 그것에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급격히 짧아진 것 같은 하루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게 했고, 특히 이런 면에서 많은 게 서투른 오구리는 우물쭈물하면서 말도 못 하고 주저해야 했다.
붙잡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왠지 그러면 트레이너가 불편해할 것 같다.
이 모순된 감정은 그녀를 복잡하게 했고, 트레이너의 차 조수석에 앉아 돌아가는 길에서 말없이 앉아 있게끔 했다. 카사마츠로 돌아온 이래, 홀로 지내고 있는 자취방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겪고 있는 갈등은 오구리 캡을 혼란스럽게 했고 결국 차가 주차될 때까지 눈치를 못 채게 했다.
“도착했어, 오구리.”
“아.”
순간 정신이 확,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트레이너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본 그녀는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는지 귀가 접혀있었다. 그리고 이내 결단을 내린 듯, 입술을 살짝 깨문 후 트레이너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저기, 트레이너. 집에 들어와도 된다만.”
“응?”
온종일 보인 모습이 평소와는 다른 면모긴 했지만, 그것에 쐐기를 박는 것만 같은 말에 트레이너는 잠시 멈칫했다. 옷소매를 잡은 손은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그렇게 내친다면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기 힘들 것만 같은 무게감이 은근히 있었으니까.
“좋아, 그래볼까. 그럼 좀 실례할게.”
오랫동안,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정말 오랫동안 얼굴을 봐온 우마무스메의 이런 의외의 면을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이 알게 되는지 새삼 속으로 놀라움을 느끼며 그는 그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응, 고맙다. 트레이너.”
저렇게 밝은 미소를 짓는데, 애초에 거절할 수 있을 쏘냐.
-⏲-
오구리 캡이 홀로 사는 집은 좋게 말하면 단출했고, 나쁘게 말하면 생활감이 잘 안 느껴졌다.
생활반경이라곤 침대와 옷장, 그리고 기껏해야 욕실.
이는 트레이너 자격을 따면서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것도 있었고, 카사마츠 트레센으로 아침마다 출근하니 그런 것도 있었다. 애초에 오구리 캡의 성격이 크게 자신을 꾸미는 것에 연연하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그녀가 다시 귀향해 온 걸 알게 된 친구들이 가장 먼저 구해준 것이 기본적인 잡기들이었다.
전기 포트, 전자레인지, 냉장고….
묘하게 상식이 어긋나 있는 오구리였기에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빼먹었으리란 확신을 그들은 가졌었고, 이는 정답이었다. 동시에 혼자 있을 때 목을 축이라고 녹차를 비롯한 차와 박스 단위의 간식도 선물해 줬다. 한땀 한땀 돈을 모아서 오랜 친구의 귀환을 축하해준 것이니, 이 얼마나 대견한 아이들인가.
그리고 이러한 선물들은 지금, 빛을 발했다.
“여기, 차.”
“고마워.”
오구리가 손수 포트로 끓인 물로 내린 차와 상자를 뒤적거려 꺼낸 과자를 함께 내오자, 트레이너는 그걸 고맙게 받아들였으니까.
그걸 받아 든 후,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중앙 트레센 시절에는 그래도 룸메이트 타마모 크로스가 있었기에 기숙사에 생활감이 있었던 걸까, 그 당시 손에 꼽긴 하지만 본 적이 있던 방과는 달리 다소 살풍경하게까지 느껴지는 방을 살짝 둘러본 트레이너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오직 달리기만을 위해 태어난 아이.
그것이 그가 어렸을 적, 오구리 캡이 뛰던 걸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달리는 것에 집중하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거나 관심이 없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가 기억하기로는 중앙 트레센 시절, 타마모 크로스가 꽤 애를 먹는 것이 이상한 곳에서 상식이 부재하던 오구리의 4차원 기질 때문이었다는데, 이제는 이해할 것 같았다. 오직 뛰는 것, 단 하나만을 위하여 살아왔으니,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던 거다.
그리고 그 삶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오늘 느끼고 있었다.
“….”
묘하게 그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한때 회색 털의 괴물이라 불린 우마무스메는 단지 드러내는 방식이 미숙했을 뿐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오늘 그에게 보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참, 그 점이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지.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 아니던가.
그런데 왜 오구리가 멈칫한 걸까.
“트레이너, 지금 귀엽다고…?”
“앗.”
순간 생각이 입으로 나온 모양이다.
어쩌지.
-⏲-
현역의 마지막 시기.
오구리 캡은 급격한 컨디션 저하를 겪었다.
심장 박동, 트윙클 시리즈를 비롯한 스포츠 업계에선 흔히들 스포츠 심장이라 부르는 현상의 수명이 다했다고 여겨지며 자신이 가진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으니까. 이는 상상 이상의 고난의 길을 그녀에게 가져다줬고, 시리즈의 마지막만이라도 온전한 기량으로 마무리 짓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으로 이어졌다.
정신적인 부담은 당연히 따라왔고, 이를 위해 당시 이미 트윙클 시리즈에서 은퇴한 지 오래였던 룸메이트, 타마모 크로스와 자주 상담하기도 했다.
‘오구리, 목표를 잡그라. 단 하나의 목표믄 된다. 그라믄 극복할 수 있을기라.’
평소에 유쾌한 듀오로 다니던 것과 달리, 선배로서 타마모는 진지한 조언을 건네줬고 그녀는 그 조언에 따라 목표를 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불 켜진 트레이너실을 보게 되었다.
저조해진 컨디션의 오구리에 맞춰서 마지막 레이스, 아리마 기념에 대비하기 위해 끝없이 훈련 일정을 조정하고 내용을 조율해 나가며 혹사하다가 코피를 문자 그대로 쏟아내고 기절하듯 잠든 트레이너. 잠든 안색은 초췌했고, 눈가는 휑했다.
그걸 본 순간, 오구리 캡은 목표를 잡았다.
-트레이너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을 띠게 하겠다.
오직 그것을 목표로 하여, 그녀는 컨디션의 전면적인 재조정을 목표로 모든 훈련 일정을 조정했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트레이닝 대신, 정신을 비롯한 신체적 안정을 되돌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이는 여태껏 해온 훈련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으나, 트레이너가 혹사하는 걸 본 이상, 그녀는 자신마저 혹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옳았다.
최후의 아리마 기념.
그녀는 마침내 본래의 기량을 완전히 되찾았고, 메지로 라이언을 격파하며 마지막 은퇴 경주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동시에, 그녀는 원하던 것을 눈에 넣었다.
트레이너가 기뻐하는 모습을 그 푸른 두 눈에 담게 되었으니까.
이때 처음으로 그녀는, 달리기 외에 다른 걸로 인해 심장이 고동쳤다.
“트레이너, 지금 귀엽다고….”
그리고 그 두근거림이, 지금 다시 돌아왔다.
트레이너가, 그녀가 신경 쓰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귀엽다고 했다.
어디가 귀엽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귀엽다고 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얼굴과 귀가 뭔가 화끈거린다.
분명 트레이너와 오랫동안 아는 사이였는데도,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오구리, 얼굴이 빨개.”
“아? 앗.”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달아오른 모양인지 그가 무심코 한 말에 오구리 캡은 귀를 감싸며 얼굴을 살짝 웅크렸다.
부끄럽다. 왠지 엄청 부끄럽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여유가 생겼네, 훨씬 보기 좋아졌어.”
“그, 그런가?”
심장의 고동이 귀에 들리는 가운데, 트레이너의 말에 가리고 있던 얼굴을 살짝 풀었다. 여유가 생겼다, 라. 그런 건 솔직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느라 감정에 솔직할 겨를이 없었지. 그런데 이제는 평범하게 귀여운 모습도 보이고-.”
“또, 귀엽다고….”
“오구리가 귀여운 건 사실인데 뭐.”
“우….”
다시 귀 끝까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알고 지낸 지 참 오래됐지만, 그래도 너에 대해서 몰랐던 것도 많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담당과 트레이너 사이가 아니니까 이젠.”
“그런가, 하지만 트레이너는 언제나 내게 있어 트레이너다.”
“옛날처럼 이름으로 불러줘, 동네 오빠 동생으로 돌아가야지. 아, 지금은 직장 동료가 맞나.”
차를 호록 마신 트레이너는 창 너머의 밤하늘을 바라봤다.
“정말 먼 길이었지, 오구리. 너랑 나랑 달려온 길이.”
“…확실히, 길고 먼 길이었다.”
눈을 감자 중앙에서의 여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방 출신이라 받았던 홀대.
한순간에 그 사이에서 발돋움하여 스타로 떠오른 일.
타마모 크로스와의 일대의 라이벌전.
3강이라 불리던 구도.
“부족한 날 믿고, 따라주며 달려준 너한테 정말 고맙다, 오구리.”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던 그녀에게 진심이 담긴 트레이너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껏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깊은 감사의 말.
“아니, 나야말로 내 뒤를 밀어준 트레이너에게 정말 감사한다.”
그리고 오구리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 말을 되돌려줬다. 그 말에 트레이너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학생이라 생각했던 이 애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이제 공식적으로 난 네 담당 트레이너가 아니지. 사실 이건 졸업한 시점에서 끝났지만 말이야.”
명확하게 사회적인 선을 긋는 것 같은 말. 하지만 그는 잔을 내려놓은 후, 팔짱을 끼며 이전과 같이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나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가르쳐줄 게 있으면 더 알려줄 테니.”
“궁금한 거라….”
곰곰이 고민하던 오구리 캡은 이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트레이너. 진지하게 궁금한 것이 있다.”
“뭔데, 오구리?”
이때까진 몰랐다.
“왜 나는 트레이너와 함께 할 때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레이스 할 때처럼 고동치는 것인가?”
이게 관계를 뒤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는 질문이 될 줄은.
그는 여전히 오구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






오구리는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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