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회상하기를,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집안 격차 때문에 난색을 표하던 부모님의 반대조차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될거라 여겼다. 그녀 또한 그러했으리라.
하지만 정열적이고 뜨거웠던 어릴 적 사랑은 그 열기만큼 그와 그녀를 빠르게 태우고 잔불만을 남겨버렸다.
더욱이 처가 사람들의 멸시와 음습한 괴롭힘은 사그라들지 않으니, 이젠 잔불만 남은 사랑으로 보듬을 수 없는 상처만 늘어났다. 나날이 심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은근하게 꺼지기를 기다리는 사랑 속에서 남은 건 그저 조촐하게 둘이서 한 결혼식과 사진, 그리고 남아있는 반지.
"헤어지자."
그러니 이혼을 결심하기는 쉬웠다.
자녀도 없었고,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관계였다. 그들의 눈에 차는 납득할 수 있는 사윗감이 되면 그제야 해도 늦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혼한들 서로에게 족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녀가 싫어졌냐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실을 깨달았을 뿐이라 씁쓸한 말투로 답을 남기겠지.
이젠 전처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그가 싫어졌냐 묻는다면, 글쎄,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도 떠나는 그를 막지는 않았다.
그저 돌아와도 괜찮다는 말을 남겼을 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던 서로를 향해 고성을 내뱉고 저주하는 거친 이별도 아니었으며, 서로를 위해 놓아주며 눈물을 적시고 울음을 삼키는 이별도 아니었다.
그저 평온하게, 그저 담담하게 뒤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 어중띤 이별이었으니 서로에게 이따금 연락하며 담소를 나누고 근황을 묻는 일도 가능했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 건 눈 앞에서 재잘거리는 슌과 코코나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시절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 전처와 결혼한 것도 제법 이른 나이였으니, 만일 일찍 그녀와 아이를 가졌다면 이부키나 코코나 나이 즈음 되는 자녀가 있을 터였다.
그랬으면 아이 때문이라도 아득바득 버티며 이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선생은 턱을 괴곤 피식 웃었다. 이미 늦은 가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옆에서 선생의 일을 돕던 유우카가 의뭉스러운 듯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나도 그냥 저 둘 같은 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네?"
가벼운 말투였건만 선생의 눈가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있기에, 유우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리 되물었다.
"미안, 못 들은 걸로 해 줘."
게슴츠레 자신을 바라보는 유우카의 시선에 선생은 시선을 피하며 그리 얼버무렸다.
학생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게다가 가뜩이나 선생에게 호감을 표하는 학생들까지 많았다.
당장 옆에 앉아 일을 도와주는 유우카조차도 선생에게 은근히 다가오는 모습을 종종 보이지 않는가.
그 언행에 섞인 건 학생이 믿을 수 있는 선생에게 보여주는 그러한 감정이라기엔 조금 짙었다.
선생이기 이전에 남자이니, 이성이 주는 호감이 기껍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선생이었다.
더욱이 서류 상으론 남지 않았다고 한들 이혼남 딱지가 붙은 불량 매물이기도 했고.
짧은 학창 시절, 눈부신 청춘들이 사랑을 경험할 상대로는 한참 부족하지 않은가.
"아무 것도 아니야, 일 하자 일. 오늘은 정시 퇴근 해야지."
"그런 분이 이렇게 일을 미뤄두셨어요?"
가라앉는 생각을 떨쳐내듯 선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우카는 반사적으로 선생에게 핀잔을 내뱉었다.
"그래야 유우카가 이렇게 도와주잖아?"
"말이라도 못하셨으면."
눈을 찡긋이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선생의 답에 유우카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펜대를 잡았다.
그래, 그는 이정도 거리감이 좋았다. 그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조금 칠칠 맞은 친근한 선생. 적당히 다가갈 수 있는 주변의 어른.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건 이젠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전처에게로 뻗친 생각은 계속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도, 유우카는 어딘가 생각이 팔린 듯한 선생을 흘긋흘긋 훔쳐보았다.
우수에 젖은 눈빛, 대충 관리한 듯한 더벅머리와 께느른한 듯한 평소와 대비되는, 가끔 보이는 믿음직한 어른의 모습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따금씩 웃음 짓는 선생에게 마음이 콩닥거리면서도, 유우카의 마음 한켠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에게 부인, 혹은 연인이 있을까?
선생을 마음에 품은 수 많은 학생들 모두가 궁금한 질문일테지만, 그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대놓고 물어본 학생들에게는 그저 얼버무리며 지나가고, 은근히 떠보는 학생들에게조차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며 알 수 없는 벽을 세워두었으니, 선생의 왼손 약지가 비어있다는 것만으로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불문율을 깨고 유우카가 몰래 선생의 인적사항을 보았을 때나, 베리타스에게 슬쩍 물어보았을 때도 알지 못한 정보였다.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이따금 보여주는 누군가를 그리는 듯한 저런 모습을 보면 직감적으로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제법 지나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조차 지금과 같은 애매한 거리감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심란한 마음에 유우카의 펜과 계산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힘들면 들어가서 쉬어."
그러면서 그런 유우카를 눈치채고는 툭 하고 내뱉으니, 마음을 접기도 힘든 것이다.
하, 한숨을 내쉰 유우카가 펜을 책상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폈다.
"됐어요. 저 가면 선생님 야근할 게 뻔한데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옥상에 올라가 생각을 정리하고 올 심산이었다. 선생은 "그러렴." 하고 말하고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문을 나선 유우카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만히 있으면 더 심란해질 듯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또각또각, 교칙에 맞게 신은 깔끔한 단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를 울렸다.
규칙적인 소리에 유우카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 먼저 마음에 품은 사람이 진 거지.
옥상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어보였다. 유우카는 오늘은 좀 추하게 잡고 늘어지더라도 선생에게 연인이 있는지 물어보자는 다짐을 잡았다.
"안 되면,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자 노력해보자."
그리 혼잣말을 내뱉으며 돌아온 사무실, 그 너머에 선생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친근한 말투지만 학생은 아닌듯 했다. 전화라도 하는 걸까.
학생을 대할 때 친근한 듯 하면서도 철저하게 선을 긋는 선생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겐 어떻게 말할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유우카는 조용히 소리를 죽이고 문 옆의 벽에 기대 선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그래, 밥은 먹었어? 빨리 챙겨먹어, 몸 상해. 응, 그래 뭐, 늘 그렇게 지내고 있지. 자기는 어때?"
한 층 더 상냥한 말투, 그리고 자기라는 호칭. 유우카가 덜컥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틀어막았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라앉은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화는 길어졌다. 자리에 주저앉은 유우카가 숨을 삼켰다.
그렇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고 다짐했지 않나.
적어도 마음을 전하고는 싶었다. 그래,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 이대로 거절 당하더라도, 학창시절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도 내보는 게 좋지 않겠나.
조금 어색해질 순 있어도 다시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리 마음을 다잡으며 유우카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다시 합칠 생각 없냐고? 하하, 자기는 나 같은 놈에겐 과분한 사람이었어."
흘려넘길 수 없는 단어에 유우카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다시, 합친다?
"나 같은 이혼남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겠어? 괜찮아. 혼자 잘 살았고, 잘 살테니까 내 걱정 말고 당신 몸부터 챙겨."
그간 선생이 선을 긋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하하, 나같은 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내 나이에 애들 만나면 범죄야."
유우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속 무언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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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안써주냐
선생님이 이혼녀라면 니코는 어떤 반응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