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굿바이 레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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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은 알렉스라는 소년입니다. 그는 우주를 동경하던 동독의 평범한 아이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서독 여자에게 반해 서쪽으로 떠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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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남겨진 자식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고, 이어 열렬한 공산당원이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관객의 시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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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머니는 성장한 알렉스가 반정부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혼절해 쓰러집니다.
어머니는 1년후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장벽과 동독은 붕괴한 상황.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위험한 몸상태였기에, 죄책감에 휩싸인 알렉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머니에게 '동독은 망하지 않았다' 라고 거짓을 꾸며내게 되는데.....
불쌍한 청년의 웃픈 이야기를 봤으면, 보다 우울한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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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청년 알렉스는 장벽의 붕괴와 자유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자 닥친 현실은 알렉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죠.
평생 모아온 어머니의 재산은 휴짓조각이 되었습니다.
알렉스와 동독 사람들, 그가 자라면서 겪은 삶과 고향은 시대에 뒤쳐진 저급한 무언가로 전락합니다.
낙담과 절망에 찬 알렉스에게, 죄책감과 효도를 핑계로 옛 시절을 돌아볼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한때 그토록 거부했지만 회상해보면 좋던 옛날 그 시절을, 어머니를 위해 재현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어떤 판본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
굿바이 레닌에서 강렬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적색/청색의 색채 대비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냉전기 사상의 붕괴를 다루는 영화에서 적색은 공산주의, 청색은 자본주의를 의미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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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에 가려진 창문, 검열된 빛)
동독의 개국기념일 행사에서 붉은 휘장에 창문이 가려질 때만 해도,
이 영화는 공산주의=적색, 서구자본주의=청색을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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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에서 자본의 상징은 붉은 코카콜라입니다.
일단 확실하게 적청의 자본/공산론은 아니군요.
왜냐하면 이 영화의 적색은 사상을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새로 취직한 위성TV 회사의 붉은 유니폼. 코카콜라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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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으로 몰려오는 서독의 차량들.
모두 새빨간 원색이죠.
적색은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들이닥친 세상, 견뎌내야 하는 생존.
현실은 사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공산당이던, 서구 문물이던 소시민들은 휩쓸려 살아갈 뿐이죠.
그들을 지배했던 레닌이 붉은 차에, 현실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군요.
그래서 주인공은 청색의 거짓으로 어머니를 보호합니다.
코카콜라는 사실 동독의 제품이라는 가짜 뉴스를 청자켓을 입은 채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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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스카프를 두른 아이들을 동독 소년단원으로 위장하고,
(거짓말에 부정적이던 우측 누나와 여자친구는 붉은 색 옷)
푸른색 동독 구식 차를 타고 어머니의 눈을 가리고 여름 별장으로 모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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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머니는 노란색으로 고립되어있군요.
하지만 이렇게 구분되던 색깔론은 후반부, 어머니의 고백에서 붕괴됩니다.
'사실 나는 너희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너희 아버지는 가족을 버린게 아니다. 함께 서독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내가 너희가 걱정돼 거부했다. 그는 계속 연락했지만 내가 전부 숨겼다.'
'나는 공산당을 추종하지 않았다. 그저 너희가 행복하게 살길 원해서 연기한 것 뿐이다. 우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모두가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던 것이다.'
알렉스가 어머니를 속이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알렉스를 속여온 것이었죠.
이제 어머니가 쓰러지는 초반 장면에서, 왜 붉은 색 옷을 입었는지 설명됩니다.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 거짓으로 당에 헌신했지만,
돌아온 현실은 당이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뒤 체포하는 광경이었으니까요.
인간을 구분해 빨갱이와 자본주의 돼지로 나누던 색깔론,
현실과 거짓을 굳이 분리해 적청으로 나누던 색깔론이 모두 무너집니다.
이제 영화는 진실과 거짓 없이 그저 삶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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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여전히 연기를 이어갑니다.
동독은 번영하며, 서독은 무너지고 있다고 말이죠.
이 시점에서,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어차피 동독에 애정도 별로 없던 어머니인데 무슨 충격을 받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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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후반부에, 알렉스는 가족과 수십년동안 생이별해 생사도 모르던 아버지를 어머니와 재회시킵니다.
그 와중에도 동독의 붕괴는 숨겨달라 부탁하며 말이죠.
좋아하지도 않던, 오히려 싫어하던 자국이 망했다 vs 수십년 간 그리워했지만 영영 못 볼줄 알았던, 사랑하는 남편과의 재회.
어떤 것이 더 충격적일지는 뻔한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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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버지와의 재회 직전 주인공 몰래 여친이 동독의 붕괴를 가르쳐주지만, 어머니는 아주 쌩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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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인물들이 '어머니를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을 욕하며 분노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의 헌신은 효도라고 하기엔 비뚤어졌으며, 어머니는 웃음거리 광대로 침대에 묶였으니까요.
블랙 코미디의 내면에 숨겨진 음울한 드라마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본질입니다.
이 영화의 최종장은, 어머니가 죽기 며칠 전 알렉스가 '동독이 서독을 흡수 통일했다' 라는 가짜 뉴스를 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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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그리고 다른 많은 동독인들의 희망이 담긴 이야기였죠.
어머니는 저렇게까지 꾸며낸 아들에게 놀라움과 황당함, 고마움을 느끼며 미소를 짓고
아들은 어머니는 뒷전이고 아름다운 가상에 눈을 집중하고 있군요.
알렉스가 저 뉴스를 틀어준 날은 달력을 조작한 가짜 개국기념일이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통일기념일이었죠.
밖에서는 통일을 기념하는 불꽃놀이가 한창입니다. 붉은 불빛이 병실을 비추고 있네요.
어머니는 붉은 현실을 인지하고 직면합니다.
그리고 초반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서쪽으로 가고 싶었던 여인, 남편의 탈출로 당에게 핍박받던 아내,
자식을 위해 거짓으로 당에게 충성한 어머니, 그 당이 자식을 구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던 어머니는
자식이 거부하는 이 현실을 웃으며 수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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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알렉스는 유골을 로켓에 실어 하늘로 날려보냅니다.
그는 아름답지만 너무 먼 우주를 동경하던 소년이었고
자신 대신 어머니를 우주로 보내며 거짓말을 마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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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원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이상향을
사실 자신이 바라던 이상향을 마음 속에 묻은 채 말이죠.
이제 짧은 백일몽이 끝났고, 소년은 망상을 끝내고 어른이 되어 삶을 살아갈 차례입니다.
(훌륭하게 컸구나 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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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이었습니다.
시간 인내심 그리고
토니스타크보다 살짝 적은 돈
그것들만 있으면 세상에 못할일을 없다
한국에도 이런 영화 있던거 같은데
아버지한테 통일되었다고 속이는 영화
아 이 영화 들어봤던 거였는데
재밌어보이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