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 출처:https://www.pixiv.net/artworks/119184964)
전편: 드림 저니 시점
옛날, 한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언니의 보호를 받는 자그마한 밤색 머리 소녀. 포니컵을 뛰어도 되기 전의 나이인 그 소녀는 어느 날, 평소처럼 동네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며 놀이터 한구석에서 웅크렸다.
-이번에도 곧 끝날 거야, 누님이 해결해 줄 거야.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그래도 터져 나오려 하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숨어있던 소녀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자박거리는 바닥을 밟는 소리는 분명 언제나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주던 언니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날은 달랐다.
“아무리 애들 장난이라지만 도가 좀 지나치구나. 왜 그렇게 애 하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니.”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에 기다란 귀가 쫑긋거렸고, 뒤이어 아이들의 생떼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랑 놀아주지 않고 재미없는걸!”
“맞아, 오르는 재미없는 애야!”
아이들의 목소리에 소녀가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찰나, 낯선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볼까? 만약 그 오르라는 애가 너희들이 재미없다고 괴롭힌다면 너흰 어떻게 할 거니?”
“….”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이건 어린 나이였기에 생각 못 한 사고의 전환이었다. 우마무스메가 무리 지은 아이들을 역으로 괴롭혀 버린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기 시작하지? 더는 괴롭히지 말고 돌아가렴.”
방점을 찍는 말에 아이들이 구시렁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몸을 낮춰서 소녀를 찾았다.
“이제 괜찮을 거다, 나오렴.”
손을 내미는 사람은 낯설었지만, 그의 다리를 꾹 붙들고 있는 누님의 모습을 보자 신뢰감이 절로 생기기 시작한 소녀는 자신의 손을 뻗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받으렴. 너희들끼리 해결하려다가 일 더 커질 수도 있단다.”
그의 손을 잡고 숨어있던 곳에서 나온 소녀의 귀에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익숙한 자매의 다소 불만스러워하는 말도 들려왔다.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 해결될 일을 너무 어렵게 돌아가시네요.”
“조금만 자라봐라, 세상사 전부 힘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배우게 될 거야.”
“흐음.”
청년을 재밌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누님이었지만, 소녀의 눈에는 다른 것이 맴돌았다. 자신을 보호해 준 사람에 대한 동경. 어린 마음속에 무언가 싹트는 가운데, 그가 말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겼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 뭣하다면…. 그래, 날 부르렴. 여기 연락처를 줄 테니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도와주러 올게.”
그는 들고 다니던 가방을 뒤적거려 수첩을 꺼낸 후,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줬다.
“힘든 일이 있으면 애들끼리 해결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나이 든 사람 도움을 받아야 한다. 뭐, 나도 아직 학생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한 후, 청년은 뒤늦게 무언가를 안 물어본 듯 질문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안 물어봤구나. 알려주겠니?”
“오, 오르페브르에요!”
그것이 평생 잊히지 않을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
어린 마음에 조금만 힘들 때마다 전화해도 그는 흔쾌히 받아줬다.
종종 공터에서 만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면 수험생이라고 밝혔음에도 시간을 내줘서 온 그는 곰곰이 들어준 후,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새 포니컵에 처음으로 뛸 수 있게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이제부턴 너와 네 언니가 배운 대로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의 이별도 동시에 찾아왔다.
“에, 어째서요?”
“뭐, 이제 나도 대학생이지 않니. 합격도 했겠다, 도쿄로 가야지.”
그의 말에 순간 머리 위에 무게추 하나가 쾅,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헤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다. 그 생각 하나에 자그마한 머리는 필사적으로 굴러가다가 결국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저, 저, 오라버니! 만약 제가 중앙에 올라간다면, 만날 수 있게 될까요?”
“중앙?”
소녀가 한 말의 의미를 잠깐 고민하던 청년은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중앙, 중앙이라. 그래, 중앙 트레센을 말하는 거지?”
“네, 네!”
“네가 거길 진로로 정한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게 나도 더 노력할게.”
그렇게 말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면 작별이구나, 오르.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년을 더는 만날 수 없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는 본래 법리학 쪽으로 진로를 잡으려 했다고 한다.
어린 우마무스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원래 꿈꾸던 것마저 중간에 접은 후 생각지도 않은 길을 향하기 시작했다니. 이 얼마나 무모하고 순수한 사람이란 말인가.
그 당시에는 그런 걸 알 길이 없던 소녀는 오직 자신만이 노력하면 되리라 생각해서 스스로를 뒤바꾸기 시작했다.
정체되어 있던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
나약함을 숨기고 강인함을 드러내라.
금 세공사(Orfèvre)의 이름에 걸맞게 세밀한 가면을 정성 들여 세공한 후, 갖춰 써라.
그가 해준 조언대로 소녀는 자신을 가꾸며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중앙 트레센 중등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다소 구부정하던 자세는 올곧게 변했고, 언제나 그녀를 괴롭히던 약함을 숨기기 위해 여러 역사책이나 드라마, 영화까지 파고들어 말투를 바꿨다. 개성 없어 보이던 머리카락은 다행히 본격화가 찾아와 급성장하기 시작하며 자라난 앞머리의 하얀 머리칼이 가려주며 인상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세간에서는 이렇게 이미지가 급변한 그녀를 ‘폭군의 씨앗’이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시선에 호응해 주었다.
자신은 그 ‘황제’ 심볼리 루돌프, ‘패왕’ 티엠 오페라 오의 뒤를 이은 ‘폭군’이 될 거라고.
이제 소심하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서 덜덜 떠는 자그마한 소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군림의 때를 기다리는 폭군의 재목만이 있을 뿐.
그렇게 호기롭게 중앙 트레센 학원에 발을 디뎠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한동안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며칠 사이의 일일 뿐이지만,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없다는 것에 그녀는 오랜만에 초조함을 느꼈다. 이미 담당 우마무스메가 생겨서 일정을 뛰느라 자기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초조함.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으니.
“오르, 그 사람을 찾았단다.”
어느 날, 누님이 한 말에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체 왜 지금껏….”
“스테이 골드의 은퇴전을 보러 갔을 때 만났단다. 단순히 관람을 하려고 온 건 아닌 거 같더구나.”
자매의 이어지는 설명에 그녀의 머릿속에 전율이 흘렀다.
“그를 알아보는 척하진 않았단다, 대신 뭘 하고 있는지 훑어봤지. 그 사람은 다양한 경주를 직관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짜고 있던 모양이야.”
‘폭군’이 가까스로 숨겨뒀던 소심한 소녀의 본질이 다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고동치는 가운데 누님이 말했다.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데려와 줄 테니, 때가 되면 그 사람하고 계약하렴.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 아니니?”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그녀는 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이 며칠 후, 그녀가 트레이너를 보자마자 숨이 멎을 뻔한 이유가 되었다.
그녀의 자매가 먼저 트레이너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LANE으로 받았을 때는 솔직히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저니가 데려오기에 혹시나 했다.”
다시 만난 그가 건넨 인사는.
“그동안 잘 지냈니, 오르.”
‘폭군’의 가면에 금이 가게 할 정도였다.
그는 변모한 그녀의 모습에서 소심한 소녀의 모습을 꿰뚫어 보고,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이름을 말했으니까.
-⏲-
“용케도 짐을…. 아니 저를 알아보셨군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공간, 임시 트레이너실에 들어선 오르페브르는 오만한 말투 대신 옛적의 그 밤색 머리 소녀 시절의 말투가 절로 튀어나왔다.
“너희가 올해 중등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듣고 알고 있었거든.”
이제 막 서브 트레이너의 딱지를 뗀 탓일까, 아직 자신의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한때 소녀에게 조언해 줬던 청년은 이제 트레이너로서 그녀에게 커피를 한잔 내줬다.
“저니에겐 말 안 했긴 했지만, 그날 경기장에서 날 만난 게 네 누님이란 것도 보자마자 알았다.”
“어떻게 아셨나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오르페브르는 물론, 같이 들어온 드림 저니의 표정도 움찔하는 가운데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너희가 쓰는 가명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니. 그냥 일본어로 ‘여행자’라고 하더만. 거기서 저니라는 걸 딱 알았지.”
“…정말 예나 지금이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좋으시군요.”
드림 저니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는 가운데, 그는 오르페브르를 주시했다.
“널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 네가 입학하는 시기에 맞춰서 최대한 서브 딱지를 떼고 정규로 올라서려 했는데 타이밍이 잘 맞았지.”
그가 아직 때가 묻지 않은 트레이너 배지를 보여주자, 폭군은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속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예상보다 좀 더 걸리긴 했지만, 너희 둘을 달리게 할 준비를 끝내뒀다. 이제 중요한 건 네 의사야. 어떻게 하고 싶니?”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신을 존중해주는 말.
그 말에 금이 가던 폭군의 가면이 다시 눌러 씌워졌다.
“당연히 그대를 짐의 재상으로 삼겠다.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이 길을 걸어 온 것이거늘!”
당당히 외치는 그 모습에 안심된다는 듯, 그가 말했다.
“어릴 때와 완전히 달라져서 보기 좋네.”
수험생 시절부터 가지고 다니던 작은 가방에서 갈색 봉투를 꺼낸 그는 그 안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오르. 아니, 폐하.”
“흠, 당연한 소리를.”
어쩐지 입꼬리가 씰룩거리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오르페브르는 트레이너 계약 서류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마침내 과거부터 이어진 인연이 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이 날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재회의 날을 떠올리며 오르페브르는 고요하고 삭막한 공간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하며 고난도 많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을 손에 넣었다.
삼관 우마무스메.
그리고 일본 최초의 개선문상 우마무스메.
누님이 먼저 레일을 달려 나갔고, 그것을 뒤따라 더 정교해진 길을 내달려간 자신은 지금껏 일본의 우마무스메 그 누구도 누릴 수 없었던 위업을 세웠다. 폭군의 폭정이 마침내 완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내달려가면서, 그녀는 옆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불사르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가며 그녀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는 걸 잊어버렸다.
속이 쓰리다 못해 갈기갈기 짓이겨지는 것만 같은 아픔을 느끼며 폭군, 아니 밤색 머리의 소녀는 오랜 시간 고요히 병상의 기계에 의존한 채 숨만 붙어 있는 남성을 내려다봤다.
“…짐은, 아니 저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자매는, 누님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달리고는 있지만 목표를 상실했다.
그냥 무작정,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달릴 뿐.
재상이, 트레이너가, 그녀를 지탱해 주던 사람이 스러지기 전에 항상 짜주던 루틴에 맞춰서 스스로 훈련하고 최대한 경주를 선택하는 것의 반복. 이것도 조만간 한계에 부닥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트윙클 시리즈를 끝내고 드림 트로피에 출주했을 때 자각했다.
그럼에도 달렸다.
그가 사라진 세상을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오롯이 그녀의 오판으로 인해 벌어진 이 참상을 어떻게 온전한 정신으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전에 제가 컸어도 언제나 애 같다고 하신 적이 있죠. 그때는 화를 내긴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서 그랬던 거 같아요.”
어린 시절의 목소리로 완전히 돌아온 오르페브르의 눈가는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군주로서의 위엄은 그녀의 정신이 뿌리째 뽑혀 나가기 직전이 되며 이미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 병실에 있는 것은 ‘폭군’ 오르페브르가 아닌, 밤색 머리 소녀 오르 뿐.
“그러니까 언제라도 좋으니 일어나셔서, 다시 이 몸만 큰 애를 가르쳐 주세요, 오라버니. 언제라도 좋으니. 부디….”
그녀는 재계약 서류가 담긴 갈색 봉투를 떨리는 손으로 옆에 두려다 이내 탁상에 올라간 수많은 기록물을 봤다. 자신 이상으로 자주 찾아오는 누님이 꽃과 함께 꾸준히 놔뒀을 것이 분명한 그것들을 보며 다시금 고개가 떨어진 오르페브르는 마스크를 쓰고서 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바이탈 사인 모니터에서 나는 주기적인 신호음만 남은 채, 병실은 다시금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
아주 희미하게 센서가 끼워진 트레이너의 손가락이 움직인 거 같긴 했지만 말이다.
아마 이 시리즈는 다음 편이 마지막일 수도 아닐수도
해피엔딩 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