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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목격자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한산한 밤의 도로. 새까만 어둠과 옅은 안개를 가르며 차 한 대가 홀로 달리고 있었다.

핸들을 꽉 잡은 양손이 경직되어 있었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었고, 액셀을 밟은 발이 떨렸다.
24살의 홍혜화는 남자친구 정재준의 차로 운전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과몰입한 그녀와는 달리, 미소를 띤 옆자리의 정재준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 여기 완전 시골 가는 길이라 원래 차가 안 다녀. 게다가 이 시간에는 절대 없어. 사고 날 일 없으니까 마음껏 몰아도 돼. "
" 으, 응. "
" 원래 운전은 일단 재미가 붙어야 확 늘거든. 마음껏 운전하면서 먼저 재미를 붙이면 실력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야. 좀 더 속도 내볼래? 앞으로 쭉 일직선이니까. "
" 그래. "

부드러운 정재준의 말투에 조금 긴장이 풀린 듯, 홍혜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올렸다. 

" 어때? 재밌지? "
" 어응 "
" 더 속도를 내 봐. 카레이서처럼. "

그녀의 발이 힘차게 눌리며, 어둠을 가르는 차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홍혜화가 조금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정재준이 카 오디오로 손을 뻗었다.

" 음악도 틀까? 신나는 음악 틀자. 무슨 노래가 좋아? "
" 어 그 제목 뭐더라 "

요즘 무슨 노래가 좋았던가, 제목을 떠올리려던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 꺅! "
" ?! "

' 쿵! '

무언가 차에 충돌하는 소리와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도로에 울려 퍼졌다.

" ... "
" ... "

급정지한 차의 무거운 정적을 뚫고, 홍혜화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 사, 사, 사람..사람..! "

이를 악문 정재준이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오빠" 새된 소리를 내며 덜덜 떨고만 있는 홍혜화. 두려운 그녀의 시선이 차창으로 향했다.
잠시 뒤.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정재준의 얼굴이 운전석 창문 쪽으로 다가왔다. 단호하게 소리치는 목소리.

" 출발해! 그냥 출발해! "
" 오, 오빠.. "
" 어서 가! 출발하라고! "
" 오빠는.. "
" 빨리!! "

화를 내는 듯이 다급한 그 소리에 홍혜화가 악셀을 밟았다. 이미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 혼이 나간 모양새였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차를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속도를 줄이는 홍혜화. 정지된 차 안에서 얼굴을 감싸 안고 소리 내 울었다.

그 자리에서 1시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 운전석 쪽 창문으로 정재준이 나타났다.

" 오, 오빠? "
" 옆으로 옮겨 타 혜화야. "
" 오빠...! "

문이 열리고, 운전석으로 올라타는 정재준. 그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홍혜화는 무언가 말해주길 바라는 듯 정재준을 바라보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심각한 얼굴의 정재준은 몇 분 뒤에야 입을 열었다.

" 호수에 누가 빠졌나 봐. "
" 오빠..! "
" 그래, 누가 호수에 실수로 빠졌어. "

홍혜화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정재준은 굳은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 아무 일도 없었어 혜화야. "
" 오, 오빠... "
"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아무 일도.. "

반복하는 그의 말은 마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인 듯, 최면과도 같았다. 
울먹이는 홍혜화가 정재준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
.
.

5년 뒤.


오래된 빌라의 계단을 오르는 중년 여인은 조금 후회했다. 건장한 아들과 함께 왔어야 했을까?
401호의 정일훈이라는 양반 때문이었다. 월세가 밀려 보증금을 다 제하고도 방을 빼질 않으니, 그녀에게는 골치였다. 괄괄한 그녀의 성격에도 불편했던 정일훈은, 안 좋은 소문까지 있었던 터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운 상대였다.
여차하면 경찰이라도 부를 생각을 하며 401호 앞에 도착한 중년 여인. 한데, 순간적으로 그녀의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 무슨 냄새야? "

음식물 쓰레기를 썩히기라도 한 걸까? 은근히 맡아지는 지독한 냄새의 진원지는 분명 401호였다.
가지가지 한다는 듯, 짜증스러운 얼굴로 벨을 누르는 중년 여인. 그러나 몇 번의 벨에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이봐요! 이봐요!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이봐요! "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냄새는 점점 더 그녀의 후각을 찔러왔다.

" 이 양반이 정말.. 그래, 없다 이거지? "

그녀는 결국, 비상용 키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한데 그것을 쓸 필요는 없었다. 문이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의아한 그녀가 문을 열어 재끼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냄새가 확 밀려왔다.

" 욱! 뭐야..? "

엉망진창의 집안 꼴을 예상하며 현관문을 넘어선 그녀의 시야에, 거실에 엎드려 있는 남자가 보였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그녀의 미간이 좁아지며, 남자의 머리맡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확인했다. 부패하고 있는 남자의 자세한 모습까지도.

" 헙! "

화들짝 놀란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속을 게워냈다. 아들을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
.

" 아 망할, 밥은 다 먹었네. "

공치열 형사가 401호 현장으로 들어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뒤이어 들어온 김남우 형사도 같은 얼굴이었다.
사체는 거실 중앙에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있었는데, 한눈에도 뒤통수의 상처가 사인으로 보였다. 그 곁에 뒹굴고 있는 망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인상을 찡그리며 사체 근처에서 살피던 김남우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벗어나며 말했다.

" 가벼운 츄리닝 차림에 뒤에서부터 공격을 당했어. 망치도 원래 이 집 현관이 있던 거라고 했지? 그럼 면식범일 가능성이 크겠어. "

일찌감치 멀리 다른 곳을 뒤지던 공치열이 말했다.

" 뭘 훔친 흔적 같은 것도 없고, 원한에 의한 살인이 맞는 것 같네. "

상황을 살핀 두 형사는 일반적인 살인사건 수사로 가닥을 잡았다.


피해자의 이름은 정일훈. 54세의 사업가로 현재는 무직이었다. 3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사는 중이었는데, 작년에 사업을 말아먹고 최근 금전적으로 어려움이 큰 상황이었다.
집에서 주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던 피해자의 흔적을 추적한 김남우 형사는, 피해자의 핸드폰에 남아있던 배달 앱의 기록으로 피해자가 14일 낮 1시까지는 살아있었음을 확인했다. 실제 부검결과 피해자의 위장에서 나온 음식이 일치했고, 이로써 사망 추정 시각은 14일 낮 1시부터 4시 사이로 좁혀졌다.
사망 추정 시각에 근처 CCTV와 블랙박스를 뒤져보아도 범인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고, 살인에 사용된 망치와 현관문 등에 지문을 닦아낸 흔적까지 포함하면 우발적 살인이 아닌 계획적 살인으로 판단되었다. 거기에 김남우가 추리하기로는,

" 바로 여기에 코드가 항상 꽂혀있는 청소기가 있는데, 지문은 열심히 닦은 범인이 청소기는 돌리지 않았어. 범인이 머리카락 걱정이 없는 상태였거나, 평소에도 이 집을 드나드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란 얘기겠지. "

이전에도 401호를 몇 번씩 방문한 사람을 조사하기로 한 김남우는 먼저 2명의 용의자를 추려냈다. 정일훈의 전처 임여우와 아들 정재준.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온 이들이었다. 김남우는 둘을 눈여겨 살폈었지만, 적어도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사체를 처음 발견한 집주인에게서 정일훈이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증언을 들은 김남우는 정재준을 먼저 조사하기로 했다.
정재준은 정일훈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아파트에서 아내 홍혜화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는 덩치가 좋고 다부진 인상이었는데, 목소리는 얇은 편이었다. 
그의 집 거실에서 마주한 김남우는 일단, 위로의 말을 건넸다.

" 아버님 일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
" 예.. "

정재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깐 뜸을 들인 김남우가 수첩을 펼치며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 혹시 아버님께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평소 사이가 안 좋았다거나요. "
" 글쎄요.. 특별히 잘 모르겠습니다. "
" 아버님이 재정적으로 힘드셨던 거로 아는데, 혹시 금전적으로 문제가 된 관계는 없습니까? "
" 아니요 딱히..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

고개를 흔든 정재준은 자책하듯 말했다.

" 아버지가 힘든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에 급전이 필요하시다길래 어떻게든 마련을 해보려고 하긴 했었는데.. "
" 급전이요? 얼마죠? "
" 예 한 3천 정도를...당장 현금이 없어서 대출을 좀 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

잠깐 '흠'생각한 김남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버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
" ... "

정재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예. 솔직히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
" 그런데도 돈을 빌려주실 생각을 하셨네요? "
" ...마지막으로 한번 도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이제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
" 아 예. "

김남우는 잠시 정재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꽤 담담했다.

" 혹시, 지난 14일 낮에는 뭘 하고 계셨었나요? 1시부터 4시 사이에 말입니다. "

노골적인 김남우의 질문에 정재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김남우의 예상보다 빠른 대답이 나왔다.

" 아내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날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에 짐을 좀 옮기느라 말입니다. "
" 아, 그렇군요. "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재준의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왔다는 게 신경 쓰였다. 보통은 지금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고 한소리 할 법도 한데 말이다.

" 음. "

눈썹을 긁으며 할 말을 고르던 김남우는 순간, 안방 문틈으로 이곳을 훔쳐보는 눈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문을 닫아버리는 눈동자.

" ... "

김남우는 묘한 표정을 짓다가, 정재준에게 물었다.

" 아내분은 지금 혹시...? "
" 아.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
" 아 예. 그렇군요. "

안방 문을 바라보는 김남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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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감사합니다~ 네네~ "

김남우가 운전하는 차 안. 조수석의 공치열이 방금 막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 형, 정재준이 대출을 하려고 했다는 건 정말인데? "
" 그래? "
" 그걸 보면 사이가 그렇게 안 좋았던 건 아닌가 봐. 아참, 둘이 왜 사이가 안 좋았대? 뭐라고 해? "
" 자기 말로는 뭐, 부모님 이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 그 전에도 돈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고. "
" 흐음. 죽일 거면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정재준은 제외해야 하나. 알리바이도 있었다며? "
" 글쎄다. 증인은 아내뿐인데, 알리바이로는 인정이 안 되겠지. "

공치열은 머리를 긁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추리에 꽂혀있는 상황이었다.

" 어제 내가 만나고 온 박사장 말이야. 난 그 양반이 의심돼. 피해자의 사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말아먹었으니 동기도 확실하고 말이야. 14일에는 집에만 있었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겠어? 만나보니까 완전 제 발 저려 하는 느낌이었어. "
" 자기도 자기 동기가 확실하다는 걸 아니까 과민반응 하는 거겠지. 반응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

김남우는 말하며 핸들을 꺾었다. 둘을 태운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여기야? "

차에서 내린 둘은 식당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정일훈의 전처, 임여우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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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살의 임여우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관리를 잘 한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작은 두상에 단발머리가 어울려서 그런 것도 같았다.
다행히 식당에 손님이 없는 시간대라, 김남우와 공치열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둘은 임여우만을 조사할 목적이었지만, 한 남성이 그녀의 옆자리로 끼어들었다. 54세의 남성 두석규. 짧은 머리와 건장한 몸의 사내였다. 그는 마치 임여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듯, 표정에서 약간의 적대심이 느껴졌다.
간단한 통성명을 통해, 두석규가 죽은 정일훈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보기에는 임여우와 특별한 관계로 보였는데, 형사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일단 임여우가 목적이었으니, 김남우는 임여우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 정일훈 씨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

그러나 대답은 임여우가 아닌 옆에서 들려왔다.

" 그놈이 원래 제멋대로 살던 놈이라, 원한 관계가 있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거요! "
" 아 예. 구체적으로 누가 있습니까? "
" 흠. "

두석규가 뚜렷한 이름을 대지 못하자, 김남우는 임여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또 두석규가 나섰다.

" 일훈이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궁금한 것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쇼! "
" 아. "

김남우는 그 말대로 일단 두석규에게 물었다.

" 그럼 혹시, 박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십니까? 최근 정일훈 씨의 사업에 투자하며 가깝게 지낸 사람이라는데 말입니다. "
" 박사장? 흠. 잘 모르겠는데.. 일훈이를 안 본 지가 몇 년이 넘어서. "

두석규의 대답을 들은 공치열은 속으로 황당해했다. 그럼 정일훈을 가장 잘 안다는 말을 하면 안 되지 이 양반아!
김남우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그렇군요. 그럼 정일훈 씨와 가장 마지막으로 보신 게 언제입니까? "
" 3년 전이오. "
" 3년 전이면, 실례지만 두 분이 이혼하셨을 때가 3년 전인 걸로 아는데 "

김남우의 시선이 임여우에게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두석규의 입에서 나왔다.

" 그때 본 게 맞소! 그 이후로는 뭐, 서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완전히 관심 끊고 살았지. "

공치열은 순간적으로 한마디 하고 싶은 표정이 되었지만, 김남우가 바로 물었다.

" 그럼 혹시, 두 분이 이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 왜긴! 일훈이 그 새끼가 쓰레기라서 그런 거지! "

두석규가 버럭댔지만, 김남우는 임여우를 돌아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 어떤 이유였나요? 혹시 지금 두 분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

두석규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김남우는 임여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임여우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 아니요. 남편 때문이에요. 정말 끔찍한 인간이었어요. 평생 저를 속였단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더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혼했어요. "
" 속였다는 게 무엇인가요? "
" ... "

임여우는 입을 다물었고, 두석규가 끼어들었다.

" 벌써 죽은 사람 욕해봤자 뭐 한다고! 중요합니까 그게? "
" 아. 아니요. 알겠습니다. "
" 더 물어볼 것 없으면 그만합시다! "

두석규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김남우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 아, 그럼 많은 시간 빼앗지 않고 몇 가지만 얼른 묻겠습니다. 임여우 씨. 지난 13일에 정일훈 씨 댁을 찾아간 거로 아는데, 왜 가셨습니까? "
" 응? "

이 사실은 두석규도 모르는 일이었는지, 이번엔 질문을 대신 대답하지 않고 임여우를 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임여우가 대답했다.

" 재준이 때문이었어요. "
" 아드님이요? "
" 예. 그 인간이 재준이한테 자꾸만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
" 아아. 그렇군요. "

고개를 끄덕인 김남우는, 흘러가는 말처럼 물었다.

" 혹시, 14일 낮 1시부터 4시 사이에는 어디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
" ... "

그 질문에 두석규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 뭐야 지금?! 이 사람이 일훈이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거야?! "
" 아니요. 참고삼아 모두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
"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

두석규가 화를 폭발하려 할 때, 임여우가 말리고 나섰다. 그녀는 김남우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 전날 늦게 잠드는 바람에, 늦잠을 자고 오후 3시쯤 가게에 나왔어요. "
" 오후 3시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

김남우는 머릿속으로 이곳에서 정일훈의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았다. 동시에, 옆에 있는 두석규를 향해 물었다.

" 그럼 혹시, 선생님은 14일에 뭘 하셨나요? "
" 종일 가게에 있었소이다! 됐소? 인제 그만 합시다! 사람을 범인 취급하고 말이야! "

기어이 두석규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남우도 쓴웃음을 지으며 이만, 감사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나서며, 공치열이 투덜거렸다.

" 형, 오히려 저 두석규라는 양반이 더 의심스럽지 않아? 안 그래? 딱 봐도 사이즈 나오잖아!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남자! 13일에 임여우가 정일훈을 찾아간 사실을 알게 되고, 질투로 살인! "
" 가능성 있는 얘기네. "

김남우는 식당 입구에서 챙겨온 두석규의 명함을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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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우 형사의 다음 행보는 뜻밖에도 홍혜화였다. 그가 가진 형사의 직감이 홍혜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의 경험상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홍혜화를 따로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김남우는 그녀가 운영한다던 학원 건물 앞에 도착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초등수학', '초등영어' 따위의 글자가 창문에 붙어있는 작은 학원이었다.
건물 계단을 오른 김남우가 2층의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맞이해왔다.

" 어서 오세요~ "

김남우를 학부형쯤으로 생각한 듯한 모양새였는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흔치 않은 외모에 살짝 감탄하던 김남우는, 곧바로 목적을 밝혔다.

" 홍혜화 씨 계십니까? "
" 아 원장님이요? 아직 안 오셨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
" 아, 저는 서대문 경찰서 김남우 형사입니다. "
" 아~ "

김남우가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아는 척을 하는 사내의 입에서 불쑥,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 협박 편지 때문에 오셨구나~! "

사내는 지레짐작한 듯했지만, 김남우는 굳이 아니란 말을 바로 하진 않았다.

" 혜화가 협박편지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결국 신고했군요. 그러게 진작에 좀 하라니까. "

김남우는 여기까지 듣고서야 입을 열었다.

" 홍혜화 씨가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했습니까? "
" 예? 그것 때문에 오신 것 아닙니까? "
" 예. 저는 정일훈 씨의 사망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홍혜화 씨의 시아버님 말입니다. "
" 엇 "

대번에 눈이 커진 사내는 자신이 혹시 실수한 건가 싶은 얼굴이었다.
김남우는 빠르게 물음을 던졌다.

" 홍혜화 씨가 받았다던 협박편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무슨 사정입니까? "
" 아 그게.. "
"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 아 예. 김서준입니다. "
" 예 서준 씨, 협조 부탁드립니다. 협박편지가 뭡니까? "

김서준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지만, 똑바로 바라보는 형사 앞에서 입을 다물 순 없었다.

"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혜화가 협박편지로 힘들어했다는 것만 압니다. 무슨 협박인지도 모르고요. "
" 그게 언제부터였습니까? "
" 아마 한 달? 좀 넘었을 겁니다. 최근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그때는 협박편지가 계속 왔던 것 같습니다. "
" 음. 혜화 씨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러니까, 좀 진지하게 겁을 먹은 듯했습니까? "
" 예. 그건 정말 희한했습니다. 평소에 절대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
" 그렇군요. "
" 말이 나온 김에, 형사님이 그 협박범 새끼 좀 꼭 잡아주십시오. 도대체 어떤 망할 자식이 그런 협박을 해대는지! "

김서준은 자기 일처럼 진실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홍혜화를 몹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알아보고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
" 아 감사합니다. "

김남우는 홍혜화가 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김서준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홍혜화에 대한 호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학원은 홍혜화와 김서준 둘이서만 작게 운영하고 있었는데, 홍혜화가 엄청난 고학력에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해서 입소문 장사가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 학원치고는 꽤 수입이 좋다든지, 멀리 이사를 간 뒤에도 다니던 아이가 있었다든지, 처음 보면 선남선녀 부부 선생으로 오해를 자주 한다는 등등. 김서준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김남우는 나쁠 게 없었고, 모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시간이 지나 홍혜화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김남우가 말했다.

" 홍혜화 씨 차가 좀 막히나 봅니다. "
" 아. 아뇨. 혜화는 항상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제가 그래도 학원 원장님이면 차 한 대는 있어야 한댔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운전면허를 죽어도 안 따요 걔가. "
" 그렇군요. "

둘이 얘기를 하는 사이에 마침, 학원 문이 열리며 홍혜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김남우를 보자마자 얼굴을 알아봤는지, 눈에 띄게 놀라며 경직했다. 하얀 피부에 아담한 체구,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김남우가 홍혜화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대문 경찰서 김남우 형사라고 합니다. "
" 예, 예..안녕하세요. "

잠시 뒤 세 사람이 의자를 두고 마주했고, 수첩을 꺼낸 김남우가 질문을 시작했다.

" 먼저, 남편분의 알리바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
" 네? "
" 14일 낮 1시부터 4시 사이에, 남편분께서 학원 일을 도왔다고 한 것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도왔습니까? "

홍혜화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옆에 있던 김서준도 놀란 눈초리였다. 김남우는 일부러 남편을 의심한다는 어조를 강하게 풍겼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내분의 증언만으로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제삼자가 목격한 것이 있습니까? "
" 저,저희 남편은 절대 아니에요. "
" 예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남편분께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와서 말입니다. "

홍혜화는 당황스러워하다가, 옆의 김서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날, 서준이 너도 우리 남편 보지 않았어? 새로 캐비넷 들여올 때 말이야. "
" 어? 아~ 그래. 봤지. "

김남우는 김서준을 향해 물었다.

" 14일 몇 시였습니까? "
" 글쎄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제가 학원에 도착했을 때가 3시 정도 됐을 겁니다. 그때 분명히 정재준 씨가 있었습니다. "
" 3시요. 그때부터 계속 있었습니까? "
" 아 예 저녁까지 있었습니다. "
" 그러면 3시 전에는 "

순간, 홍혜화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 남편은 1시부터 있었어요. 캐비닛이 1시에 오기로 하고 도착했는데, 저 혼자서는 절대 정리하고 옮기고 다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1시부터 남편이 있어서 도와준 거예요. 그렇지 서준아? "
" 아 뭐.. "

김서준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남우는 애매한 얼굴로 수첩을 끄적였다. 
무언가 생각하던 김남우는 곧, 전환하며 임여우에게 가볍게 물었다.

" 협박편지를 받으셨다고요? "
" 네? "

홍혜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반응했다. 몹시 당황스러운 듯, 열린 입이 떨렸다.
김남우가 눈을 빛내며 재차 물었다.

" 한 달 전부터 협박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협박이었습니까? "
" 아..아..아.. "

홍혜화는 이상하리만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김서준의 표정이 아차 싶었다.
김남우가 다시 묻자, 홍혜화는 작은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었다.

" 아, 아니..아니에요. "
" 예? 분명히 협박으로 힘들어하셨다고 들었는데요? "

김남우의 의문에, 김서준이 옆에서 "아 그건" 난감해했지만, 이미 김남우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 홍혜화 씨.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잘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무슨 협박이었습니까? "
" 아..아니.. "
" 설마, 경찰에게는 밝힐 수 없는 문제인 겁니까? "

홍혜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김서준은 이 상황이 자신의 탓인 듯,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 그럴 리가요. 그냥 프라이버시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거죠. 밝히기 민망한 일 같은 거겠죠. "
" 아, 그렇습니까? "

김남우는 김서준에게 대답하면서도 홍혜화를 향한 날카로운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 홍혜화 씨, 그렇습니까? "
" 아.. "

홍혜화는 김남우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김남우는 계속 압박하며 대답을 요구했다.

" 제 생각에 어쩌면, 그 협박편지와 정일훈 씨의 사망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
" 아..아.. "
" 혹시, 남편분 때문에 밝히기가 힘드신 겁니까? "
" 아,아니..아닌.. "

홍혜화의 상태는 답답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김남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대답하기 곤란하신 듯하니..혹시라도 알려주실 생각이 드신다면 연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김남우는 명함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니 인사했다. 그때까지도 홍혜화는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학원을 나선 김남우가 씁쓸한 얼굴로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며 계단을 내려갈 때, 그의 뒤를 쫓아온 걸음이 있었다.

" 저기! "
" ? "

김서준, 급히 계단을 내려온 그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 혹시 그 살인 사건이 정재준 씨가 용의자인 겁니까? "
"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만은.. 신경 쓰고 있기는 합니다. "
" 아.. "

김서준은 무언가 찔리는 몸짓으로 계단 위를 살피다가, 얼른 김남우의 손에 쪽지를 쥐여주었다.

" 전에 학원에도 협박편지가 왔었는데, 그때 혜화가 버렸던 겁니다. 이게 혹시 도움이 된다면.. "
" 아? "
" 제가 건네주었단 사실은 꼭 비밀로 해주세요. "

빠르게 속삭인 김서준은 도망치듯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 하 "

김남우는 김서준이란 남자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연애관이 어떻든 간에, 김남우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주차해놓은 차로 돌아와 구겨진 쪽지를 펴보는 김남우.

[ 5년 전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그 사건이 알려지는 게 싫다면 1,000만 원을 준비하세요. ]

" 5년 전 사건? 목격자? "

미간을 좁힌 김남우의 고개가 갸웃했다. 5년 전 사건이 뭘까? 홍혜화가 절대 밝힐 수 없는 5년 전 사건?
알 수 없었지만, 5년 전 사건의 목격자가 정일훈이라는 가정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일훈은 아들 정재준이 돈을 빌려주지 않자, 5년 전 자신이 목격했던 무언가를 이용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정재준은 처음에는 그냥 돈을 내려고 했겠지만, 금액이 천만 원에서 삼천만 원까지 늘어난 걸 보면, 그 시점에서 참지 못한 정재준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김남우는 그것이 이 사건의 완성형이라고 생각했다. 5년 전 사건이 무엇인지만 알 수 있다면 추궁할 수 있을 텐데, 어디서 그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김남우는 김서준에게서 받은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
.
.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홍혜화가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정재준을 찾아간 홍혜화는 울먹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 오빠! 또 왔어! 어떡해! "
" 뭐? "

홍혜화가 내민 협박 편지를 확인한 정재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5년 전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3,000만 원을 준비하세요. ]

"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그날 돈 주고 약속받았다며! "
" ... "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정재준이 쪽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
.
.

김남우는 확신했다. 학원에서부터 홍혜화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 홍혜화는 협박범이 누군지 모른다. 그렇다면 정재준은 어떨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정재준의 집을 방문했다.

" 한 달 전부터 협박편지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협박이었습니까? "

김남우의 질문에 정재준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그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했다.

" 저희 부부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말해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해결된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 아 예 알겠습니다. "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 5년 전 사건의 목격자가 누굽니까? "
" ?! "

정재준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던 정재준은 곧, 어떤 사실을 떠올린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 당신이 쪽지를 보냈습니까?! "
" 예. 5년 전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

뻔뻔하게 표정을 유지한 김남우는 정재준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정재준은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 5년 전 사건 같은 것 없습니다! 목격자니 뭐니 하는 것도 없고, 다 누군가의 장난일 뿐입니다. "
" 하지만 아내분의 반응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말입니다. "
"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
" 그렇다기엔 과하더군요. 학원에서도 협박편지 때문에 일조차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
" ... "

이를 악문 정재준은 차라리, 묵비권을 유지했다.
그 모습에 김남우가 도발적으로 말했다.

" 정재준 씨의 알리바이 말입니다. 아내분의 증언은 인정이 되지 않는 걸 아십니까? "
" ... "
" 물론, 3시에 정재준 씨를 보았다는 김서준 씨의 증언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울 겁니다. 김서준 씨가 정재준 씨에게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
" ... "

끝까지 정재준은 입을 다물었고, 김남우는 그를 더 흔들어보려고 했다.

" 혹시 아내분과 김서준 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하는 내내 붙어있어서 그런지, 과하게 친하던데 말입니다. 학생들이 자주 선남선녀 부부로 오해한다고들 하더군요. 김서준 씨도 그 평가를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말입니다. "
" ... "
" 누군가의 증언으로 불리한 오해를 받는 것보단, 스스로 밝히시는 게 어떨까요? "

그제야 정재준은 입을 열었다.

" 제 아내와 김서준은 그냥 친구일 뿐입니다. "
" 하지만 "
" 절대 그럴 일이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됐습니다. "
" ...아내분을 향한 믿음이 확고하시군요. "

고개를 끄덕인 김남우는 정중하게 사과한 뒤 정재준의 집을 나섰다. 생각만큼 수확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가지는 확인했다.

정재준은 가짜 협박편지를 보낸 사람이 김남우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는 것. 
진짜 협박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 꽤 많은 걸 의미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협박범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협박범이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인지, 보낼 수 없는 것인지.

김남우는 점점 스토리가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며 주차해놓은 차에 올라탔다.
그때, 공치열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 알아봤어? "

김남우는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 형! 목격자 말이야! 근데, 정일훈은 목격자가 될 수 없겠는데? "
" 뭐? "
" 5년 전에 정일훈은 교도소에 있었어! 3년 전에 출소했대. "
" ! "

김남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목격자는 누구지?


김남우는 애써 맞춰놓은 조각이 틀렸다는 것이 답답했다. 너무 몰입해 있었기에 쉽게 머리를 환기할 수가 없었다. 정일훈의 사망 사건과 관계가 없더라도 5년 전 사건을 알아내고 싶었다.

인상을 찌푸린 김남우는 임여우의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5년 전 사건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알아보기 위해서.

.
.
.

저번과 마찬가지로 임여우의 곁에는 두석규가 버티고 앉았다. 그는 김남우가 반갑지 않은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 또 뭐요? "

쓰게 웃은 김남우는, 임여우를 향해 물었다.

" 혹시 5년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정재준 씨 일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있을까요? "

임여우와 두석규 둘 다 딱히 무언가 떠오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김남우는 떠보기를 관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 정재준 씨가 5년 전의 사건으로 협박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 협박이요? "

눈이 휘둥그레진 임여우의 반응은 확실히 처음 듣는 눈치였다. 
김남우는 조금 실망하며 말했다.

" 잘 모르시는군요. 5년 전 사건의 목격자라며 둘을 협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그 순간 두석규의 표정이 묘해졌고, 김남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김남우가 두석규를 향해 물었다.

"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십니까? "
" ... "

두석규는 굳은 얼굴로 팔짱을 매만졌다.

.
.
.

홍혜화는 학원 수업을 대충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김남우가 그녀를 막아섰다.

" 목격자를 찾았습니다. "
" ! "

홍혜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늘게 떨던 그녀는, 김남우의 다음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 교통사고였습니까? "

.
.
.

취조실에서 홍혜화와 김남우가 마주했다. 고개 숙인 홍혜화의 안색은 처참했다.
김남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그것만으로 홍혜화가 스스로 입을 열게 했다.

" 사, 사고였어요..어두워서 안 보였어요..안개도 끼고..정말로 사고였어요.. "

들릴듯 말듯한 홍혜화의 그말, 바로 김남우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남우가 입을 열었다.

" 그래서 그날 이후로 운전면허를 따지 않으셨군요. "
" 예... "

고개 숙인 홍혜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기, 목격자는... "
" 목격자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

김남우가 되묻자, 홍혜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김남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 5년 전에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홍혜화 씨와 정재준 씨뿐입니다. "
" 네? "
"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는 남편분뿐이란 말입니다. "

홍혜화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 다만 "

김남우가 진지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 보지 않아도 목격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
" 예? "

홍혜화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김남우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시부모님이 왜 이혼하셨는지 아십니까? "
" 예? "
" 저는 알고 있습니다. "

김남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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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여우를 안에 두고, 식당 밖으로 나온 두석규가 김남우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저 사람이 일훈이 새끼랑 왜 이혼하게 됐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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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우는 홍혜화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 정일훈 씨와 임여우 씨는 평생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
" ...? "
"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는 비밀 말입니다. "
" 아?! "

홍혜화의 눈동자가 더할 수 없이 커졌다!

" 임여우 씨는 평생을 자신이 살인자라는 생각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3년 전에 진실을 알고 이혼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
" 아.. "
" 결혼 전, 정일훈 씨는 임여우 씨를 확실하게 붙잡아 두기 위한 계획을 하나 세웠습니다. 가짜로 교통사고를 꾸며내, 그녀가 사람을 죽인 것처럼 만들어, 평생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 계획을 말입니다. "
" 아아..아.. "

홍혜화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 어두운 밤에 교통사고를 낸 그녀는, 자신이 정말 사람을 죽인 줄만 알았습니다. 정일훈 씨는 그녀 대신 가짜 시체를 처리했고, 그녀 대신 운전대도 잡았습니다. "
" 아..아아..! "

창백한 안색의 홍혜화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 보지 않고도 목격자가 될 수 있는 방법. 홍혜화 씨에게 5년 전에 무슨 사고가 일어났는지,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목격자가 한 명 있습니다. 정재준 씨에게 그 방법을 알려준 사람, 정일훈 씨 말입니다. "
" 아으..아.. "

온몸이 덜덜 떨리는 홍혜화.
김남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 홍혜화 씨. 당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
" 으..으.. "
" 당신은 살인범이 아닙니다. "

그녀의 부들거리는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아으..아... "
" 정재준 씨는 홍혜화 씨를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언제나 계속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계획을 물려받아 실행했고,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목격자의 협박편지는 그에게 정말로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
" ... "
" 사실 정일훈 씨의 협박편지는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임여우 씨를 다잡는 용도로 사용했던 '목격자'라는 협박편지를, 이번엔 아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정재준 씨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예상치 못한 목격자를 어떻게 했을까요? "

김남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홍혜화 씨. 지난 14일 낮에 정재준 씨는 정말로,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
" ... "

입술을 꽉 문 홍혜화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볼을 타고 소리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취조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정재준이 뛰쳐 들어왔다!

" 혜화야! 혜화야! 당신 뭐야?!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붙잡아! "

흥분한 정재준을 돌아보는 김남우의 눈빛은 무덤덤했다.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는 홍혜화를 다시 돌아보며.

.
.
.

휴게실에서 공치열이 김남우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 그래도 정재준이 자백해서 일은 쉬워졌네. "
" 아내를 잃으면서 다 자포자기한 것 같더라. 그 양반 혹시 자살 안 하나 잘 감시해. "

김남우는 커피를 한 모금 훌쩍였다. 
공치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아니 근데, 어차피 사귀는 사이고 결혼할 사이였다는데 왜 그런 또라이 같은 짓을 했을까? 그렇게 여자가 못 미더웠나? "

김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 글쎄. 내가 보기엔 아내를 못 믿은 게 아니라, 자신을 못 믿은 거야. 연애에서 상대를 믿는다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거든. 자신을 못 믿으니까 자꾸 불안해져서 이상한 짓을 하게 되는 거야. "
" 형은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무슨.. "
" ... "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1/19 12:35

    평소와 조금 다른 스타일로 써보려고 했는데, 티나 났을지 모르겠네요 ㅎㅎ;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린 이야기인데, 이게 또 지루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러네요 흐하하.
    지칩니다; 저는 자러 가겠습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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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리야레 2017/11/19 13:19

    단편드라마로 제작돼도 느낌 괜찮겠어요 지금 감기로 머리도 띵-하고 목도 아픈데  정말정말 두근두근하며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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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11/19 13:38

    복날님 사랑해요....ㅠㅠ 너무 좋다 이런 이야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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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니1 2017/11/19 13:43

    글 잘보고 있습니다.
    근데 김남우가 정재준한테 협박범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요
    “정재준은 가짜 협박편지를 보낸 사람이 김남우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는 것”
    정재준이랑 김남우랑 이름이 바뀐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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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쿵코앜우쾅 2017/11/19 14:18

    이런 스타일도 좋아요
    평소 단편에 비해 좀 길었는데도 잘 읽혀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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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지기-마님 2017/11/19 15:16

    미니시리즈로 만들었음 좋을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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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M게임마스터 2017/11/19 16:00


    마지막 스플래시 데미지 오져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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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린검사 2017/11/19 16:07

    웹툰작가님들 작품은 드라마로도 잘 만들어 주시면서 왜 복날님 작품은 안만들어주나고요 ㅠ 또 단편드라마 나왔잖아요
    내 스타일이야~~~~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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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치열 2017/11/19 16:16

    영화 시나리오로도 손색이 없는데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 김남우는 모쏠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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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7/11/19 18:12

    아이고 길어서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읽기에 불편함은 없었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길이가 길어지면 중간에 집중력이 무너질까봐 항상 걱정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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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긴ㅈ으디 2017/11/19 20:58

    진짜 지금까지랑 좀 다르네요 복날님의글들을 다 읽다보니 특유의 느낌이있었는데 이번엔 좀 다른느낌이들었어요 물론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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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na 2017/11/19 23:42

    지금까지의 글 들과 비교해봤을때 보다 짜임새있어진 느낌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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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콜요정 2017/11/20 01:49

    김서준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남우는 애매한 얼굴로 수첩을 끄적였다.
    무언가 생각하던 김남우는 곧, 전환하며 임여우에게 가볍게 물었다.
    " 협박편지를 받으셨다고요? "
    임여우가 아니라 홍혜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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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ne이~ 2017/11/20 01:51

    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무지 흥미롭고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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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가오늘 2017/11/20 05:14

    잘 읽었습니다!
    매번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ㅎㅎㅎ
    저는 블랙박스라는 ㅋㅋㅋ너무 뻔한 상상을 하면서 읽었는데...전혀 달라서 즐거웠습니다 ㅎㅎㅎ
    책 작업은 잘돼가시는지요^^ 얼른 구경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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