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인주
1913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36년에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만주국군 육군 제 7 헌병단에서 근무했음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식 정부 수립 이전 서울 동대문구 경찰서장이 되었다가
정부 수립 이후 육군에 입대해 정보국 차장이 됨
구 일본군 출신이지만 승승장구하던 엘리트였던 계인주는 6.25 때 레전드를 찍는데...
때는 1950년 남산학교(군사정보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재교육을 위해
시흥 육군 보병학교 대위 지위참모 과정에 입교하자마자 바로 6.25가 터짐
6월 26일날 김포지구 경비 조직이 급하게 편성되었고
이곳 사령관으로 계인주가 임명되었음
일단 김포 상황은 6월 25일 당일부터 김포는 야크 9 전투기의 공격으로
김포 비행장을 시작으로 전역이 불타올랐고
다음날인 26일엔 북한군이 도하장비를 가져와 전차를 풀어 놓으며
김포 북부 방어선은 완전히 녹아버림
27일에는 122mm 야포까지 끌고 와 두들겨대면서
김포 윤우산 인근가지 내려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음
절박해진 김포 방어 최전선의 사령관이 된 계인주는
28일 날 아주 큰 결단을 내리는데...
6월 28일
전선을 버리고 기차 타고 그대로 부산으로 야반도주함
....???
실화임.....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계인주의 도주는 금세 들통남
6월 30일에 헌병대가 바로 잡아내 대구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바로 사형이 결정되어 형무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음
근데 진짜 운이 좋게도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남북 상황을 잘 알고 군사 지식도 있는 한국 정보통이 필요했고
마침 북한 출신에 찾아보니 북파 공작원 경력도 있었다고 하는 계인주를 직접 원했음
때문에 사형수 신분이지만 미군 사령부로 인계되었고 인천 상륙작전의 핵심이었던
팔미도 등대 점령 후 등대 라이트를 밝히는 작전에서 큰 활약하였고
미 극동군 사령부의 KLO ( 서북청년단 이북 출신 중심으로 모인 북파 공작원이라 보면 됨 )의
공작 대장으로 임명되어 KLO를 지휘했음
팔미도 점령 작전 이후 사진 ( 맨 오른쪽이 계인주 )
하지만 한국에선 공식적으로 사형수 신분인지라
계인주는 살기 위해 계속해서 미군에 남으려 했고
이 때문에 난감해진 한국 국군은 1950년 10월 21일에 파면과 불명예 전역 조치를 내린 뒤
51년 11월에는 전공을 인정해 사면 후 육군 장교 복직 시켰으나
계인주는 끝끝내 복귀하지 않음
전쟁이 끝난 이후엔 일본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 갔고
그동안 장사도 하고 회고록도 쓰면서 잘 살다가 1998년 미국에서 사망함
참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어려운 인물이네요??
일본군이였다가 탈영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중요인물이라 ㄷㄷ
정보만 빼먹고 처분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ㅋㅋ
악질 중의 악질이라도 거래를 했다면 그걸 지켜줘야 그 이후로도 활동이 가능함.
그래도 염치는 있었네...라고 해야하나
미군이 그 지역의 정보가 필요했을뿐, 사형 시키는게 맞다
적전도주는 사형이 원칙이니 뭐
참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어려운 인물이네요??
일본군이였다가 탈영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중요인물이라 ㄷㄷ
그래도 염치는 있었네...라고 해야하나
미군이 그 지역의 정보가 필요했을뿐, 사형 시키는게 맞다
정보만 빼먹고 처분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ㅋㅋ
악질 중의 악질이라도 거래를 했다면 그걸 지켜줘야 그 이후로도 활동이 가능함.
적전도주는 사형이 원칙이니 뭐
이승만 하는거보면 선택 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