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편
1592년 음력 8월18일
2차 금산성 전투
음력 7월10일에 있었던
1차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의 의병대와 관군의 연합부대가
금산성의 탈환을 시도하였다가
궤멸되었었다
이때 잠시 부대를 정비하기 위하여 철수하였던
왜6군은 다시 금산성을 점령하였고
이후로 많은 의병대와 조선관군이 성의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음력 8월1일,
청주에서 히치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왜5군 후방부대를 격파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
그들은 다음 목표는 조선군이 번번히
탈환에 실패한 금산성이었다
조헌과 영규의 연합부대는
의병 1000과 승병 600으로 구성된
1600의 부대였다
자신들 단독의 힘만으로 노리기에는
금산성의 왜6군은 만만치 않은 부대였고
따라서 조헌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병력의 낭비를 우려하여 거절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금산성의 중요도가 낮다고 판단하여 거절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역시 다른 지역들의 우선도가 더 높다고 판단하여 거절
거의 모든 관군과 의병대가 조헌의 지원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조헌과 영규는 단독으로 금산성을 공략하러 진군하였다
마지막으로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전령을 보내어
금산성 공략을 금지하는 경고를 하였고,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이 의병대를 가로막아
진군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사유로 그들이 금산성에 도달하였을 때는
의병 300이 부대를 이탈하여
최종적으로 의병 700, 승병 600의 1300의 병력만이 남아 있었다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의 왜6군은 1만명
거기다 왜6군은 그간 전라도의 침공을 여러번 시도하여
조선군과의 전투 경험도 여러번 쌓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음력 8월17일
고바야카와는 조헌의 부대가 후방지원이 없는 단독 소부대인 것을 파악하여
그들을 포위섬멸하려 하였다
승병장 영규는 이대로는 승산이 없으니 조헌에게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이 적은 본래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내가 속히 싸우려고 하는 것은 오직 충의의 격동으로 사기가 한창인 이 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오."
라고 답하며 계속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튿날 새벽,
고바야카와는 비교적 진영이 잘 꾸려진 영규의 승군보단,
조헌의 의병대를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헌의 의병대가 무너지자
영규의 승병대까지 순신간에 전열이 무너지며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영규의 부하 중 누군가가 영규에게 도피를 건의하였으나
영규 역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
조헌의 동생인 조범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음력 8월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모여와
장례를 치르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
이라고 이름을 붙여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왜 700인가?
총 병력은 1300이었는데.
이 이유에 대한 민담이 존재하는데,
언제 왜군이 다시 올지 몰라서 급히 조헌의 병력만 수습해서 칠백의사총을 만들었고,
나머지 승군들의 시신은 방치했다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 팽배하였던
불교 천시사상에 의한 불상사였다
물론 선조에게 직접 임명을 받은 8도 도통관 사명당 정도 되는 스님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평범한 승병장이었던 영규로서는 당시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불교의 위상이 비교적 높아진 것은 임진왜란의 중반 이후부터였다
이로 인해 현대까지도 불교계에서는
칠백의총을 천오백의총으로 바꿔야한다고 이따금 주장하고 있다
승병도 나라 지킨다고 무기둘었는데 왜 뺏냐
당시 천민이었거든
양민마저 되지 않으니까
당시 스님은 8천중 하나로 천민이었다고 함
그리고 저거 개돌한건 진짜 좀 너무한데
똑같이 목숨 걸었는데 계급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