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봐도 되는 전 글 : 트레이너를 설득하는 파인 모션
당근 됐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매를 애써 진정시키며,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등 뒤로 숨긴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출발 직전에 이럴 줄은 몰랐다.
애초에 여기는 트레이너 기숙사, 그의 사적인 공간이 아닌가.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이다. 주말이란 말이다. 공식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의 애마, 그러니까 담당 우마무스메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단 말인가.
분명히 문은 잠가 두었을 텐데…경첩이 박살 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문을 따고 들어 온 것이었다.
뭐, 담당 우마무스메가 직접 문을 따진 않았으리라. 아무래도 일국의 공주님이 도둑이나 할 법한 기술을 가지고 계실 리 없으니까.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담당 우마무스메 뒤에서 슬그머니 문 뒤로 숨는 그녀의 호위무사, SP 대장이 눈에 들어온다.
“네 이놈―!!”
잔뜩 화가 난 듯 발을 쾅쾅 구르며, 파인 모션은 한 발자국씩 그녀의 트레이너에게 다가간다. 십 대 소녀라고 해도 일국의 공주님이기 때문일까, 묘하게 느껴지는 그 위압감에 트레이너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다.
“파, 파인…? 토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전혀 모르겠는걸.”
어깨를 으쓱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트레이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그 행동에 파인 모션은 더욱더 열을 받았는지, 그녀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앞으로 달려와 양어깨를 잡는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
“아니아니, 나 오늘부터 휴가라고 지난주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휴가 내고, 나랑 놀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파인 모션의 말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쉰다. 이 철없는 공주님은 여전히 자기 멋대로다. 그게 파인 모션의 매력이긴 하지만, 그리고 평소라면 이 왕녀님의 말씀을 들어드렸겠지만, 이번에는 안 된다.
“당연히 아니지. 선약이 있어.”
“취소해.”
“그럴 순 없어.”
“……뒤에 숨긴 건 뭐야.”
파인 모션이 그의 팔을 잡고 앞으로 당긴다. 그 또한 힘을 주어 저항하려 했지만, 인간이 우마무스메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고작 2초 만에 양손이 전부 앞으로, 그리고 손에 들린 것을 파인 모션이 보고야 말았다.
“트레이너.”
“…….”
“선약이 있다더니, 이게 뭐야.”
파인 모션이 추궁하듯 묻는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다. 선약은 선약이고, 파인 모션에게 거짓말한 것은 없다.
“보시는 대로, 여권입니다만.”
“외국으로 놀러 나가는 거야? 나 빼고, 혼자서? 뭐하러? 왜? 난 트레이너가 보고 싶어서 기숙사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너는 나 몰래 해외여행을 가려고 이렇게―”
횡설수설하듯 속사포로 말하는 파인 모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마일 달리는 공주님이 왜 중거리 달리는 아이들처럼 붉고 질척이는 독점력 같은 것을 보여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평소와는 다른 담당 우마무스메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조금…강하게 나가면서 어른의 위엄을 보여주는 편이 좋겠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파인 모션에게 말한다.
“파인. 내 사생활에 너무 간섭하면 안 돼.”
“사생활? 여기에 너와 나의 아일랜드 인이 있는데…사생활이라고 선을 긋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아니, 없잖아! 무슨 소리야!”
이 공주님이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는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파인 모션의 발언을 부정한다.
“하지만 트레이너, 분명히 지난주에 나랑 우마뾰이―”
“그건 네가 억지로……그리고 검사 안 해봤잖아.”
“그렇지만, 위험한 날이었는걸.”
“그게 무슨 말이니 파인 모션아.”
아찔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는다. 당한 것도 억울한데, 심지어 위험한 날이었다니, 그의 경력은 둘째치고, 한창 달릴 나이인 파인 모션이 더 걱정된다. 임신으로 인한 은퇴…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물론, 만약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책임은 지겠지만, 아직 모른다. 정말로 아직은 모른다.
“서, 설마 트레이너…나를 버려두고 해외로 도망가려고―”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충격받은 눈으로 보진 말아 주시죠.”
“……그러면 선약은 뭐고, 해외로는 왜 나가는 건지 설명해 줘.”
토라진 듯이 뺨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파인 모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향의 명절이라서 그래. 올해는 꼭 가겠다고 부모님께 약속했거든.”
“아, 시부모님과 약속…후후, 그렇구나? 무슨 명절이야?”
시부모님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 싸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파인 모션의 목소리가 방금과는 달리 살짝 들떠 보이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음…추석이라는 대명절이야. 조금 이른 추수감사절 같은 거라고 하면 맞으려나.”
“추석(Chu-Seok)?”
“뭐, 아무래도 발음하기 좀 어렵겠지.”
본관은 아일랜드에 일본 교환 학생인 파인 모션이 추석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하게 서툰 발음이 귀엽게 느껴진다.
“뭐어,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파인 모션은 트레이너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귀엽게 메롱, 혀를 내민다.
“대신, 갔다 오면 끝나면 나랑 놀아줘야 해.”
“그래, 알겠어.”
“아, 그리고 하나만 더.”
파인 모션이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다. 파인 모션의 담당 트레이너로서, 이럴 때의 파인 모션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조심한다고 해서 파인 모션의 행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얌전히 공주님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신세이다.
“트레이너는 나를 담당하는 이상, 아일랜드의 국빈이기도 하니까. 아무런 호위 없이 보낼 순 없어.”
“아니, 그냥 고향 다녀오는 건데…….”
“SP들이 호위해 줄 거야. 같이 다녀오도록 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네 이놈~! 내 말이 우습게 들리는 것이냐.”
“…….”
파인 모션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뭐라 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강한 의지, 나쁘게 말하면 생떼를 쓰는 것이다.
담당 우마무스메 이기는 트레이너 없다고나 할까, 한숨을 내쉬며 파인 모션의 제안 같은 명령을 받아들인다.
“알겠어. 하지만 내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 주지 않을래?”
“으응…그렇긴 하지. 아직 공식적으로 식을 올린 건 아니니…….”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소리를 하는 애마의 모습에, 그의 목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 공주님,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럼 이렇게 하자. 공항부터는 SP들과 함께 다녀.”
“뭐, 그 정도라면야.”
파인 모션의 성격상, 여기에서 더 물러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제야, 파인 모션은 후후, 살짝 들뜬 듯이 히죽히죽 웃는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여권을 들고 있는 손을 살짝 잡으며, 그의 귀에 속삭인다.
“명절 잘 보내고, 다녀오면 너도 나와 같이 추석을 즐기자.”
“고마워. 그런데 같이 추석을 즐기자는 건 무슨 말이니.”
“후후, 추석이지, 추석.”
“……?”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 * * * * * *
그로부터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타지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드렸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의 걱정거리를 하나 덜어 드린 듯하였지만, 이내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니?’라는 명절의 필살기를 맞아 살짝 내상을 입은 그였다.
불현듯 담당 우마무스메인 파인 모션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걘 아니다. 여자로 보인다기보단 친한 동네 여동생 같은 느낌이라 조금…아니, 많이 그렇지.
물론 본격화가 끝난 우마무스메이기 때문에 신체는 성인의 그것과도 다름없었고, 파인 모션에게 억지로 당했다곤 하지만 생리현상은 정직했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파인 모션은 담당 우마무스메일 뿐이고, 여자보단 여동생 같은 존재니까.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아직 시기가 아니다, 그렇게 부모님의 말씀을 웃어넘겼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리무진 탑승을 위해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양복의 우마무스메 두 명이 그에게 다가온다.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얼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분명 호위는 공항부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의문이 들었지만,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차피 가족과의 시간은 다 지낸 거,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파인이 보냈나요?”
“네. 트레이너 씨를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애초에 대장님은 파인 옆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전하의 명이니까요. 전하께서 그만큼 트레이너 씨 걱정을 많이 하신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아무래도 미성년인 파인 모션을 대하는 것보다, 어른인 SP 대장을 대하는 쪽이 조금 더 편하다. 말과 논리도 통하고, 파인 모션에게 시달리는 점에서 공통점도 있으니까.
그런 트레이너의 생각을 알았는지, SP 대장도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니, 타시지요.”
“……엥?”
어느새인가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의 SP 대원이 차의 문을 열고 있었다. 같이 리무진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파인 모션은 아일랜드의 공주다. 아일랜드 대사관에서 차 한 대 빌려오는 것쯤 일도 아닐 것이다.
“어차피 저희도 같은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편하게 가시는 쪽이 낫겠지요.”
“아니, 그, 감사하긴 한데…저, 짐도 있고 해서…….”
“짐? 히토미미분들은 이런 것도 짐이라고 하시나 봅니다.”
“…….”
옆에 끌던 캐리어를 SP 대장이 한 손으로 휙휙 돌려 트렁크에 던지듯 넣는 것을 보자, 그제야 눈앞의 이 검은 양복들도 우마무스메였지, 라고 자각할 수 있었다.
“타지 않으시면, 저희가 전하께 혼납니다.”
“그, 그럼…실례하겠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마지못해 검은 차 안에 탑승한다. 그 뒤로 SP 대장이 따라서 탑승하고, 다른 한 명의 SP 대원은 반대쪽에 탑승한다. 차를 운전하는 기사도 우마무스메였다. 이 자리의 전원이 우마무스메였다.
오직 한 사람, 트레이너 본인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운데에 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공짜로 공항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이니,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중간까지는 말이다.
하네다 공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편이기 때문에, 김포국제공항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서울에서 제법 오래 자취를 한 본인에게 있어 꽤 익숙한 길이다.
그런데 뭔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라고 할까, 김포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울을 빠져나가는 방향, 이라는 느낌.
“저기, 이쪽 길이 맞나요?”
“…….”
그의 질문에 운전기사의 우마미미가 살짝 흔들렸고, SP 대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 안의 미니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냈다.
“맞게 가고 있습니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받아들고 보니 뚜껑이 있는 유리잔에 담긴 붉은 빛 음료수였다. 와인인가, 잠깐 생각을 했지만 아무래도 공무 중에 술을 마시진 않겠지, 포도 주스라고 단정 짓곤, 이내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다.
“어라, 술이네요?”
“저희는 안되지만, 트레이너 씨는 괜찮으니까요. 귀빈들이 타실 때를 대비하여 조금 갖춰 두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애초에 아일랜드 반대편에 있는 동방의 나라의 대사관에서, 귀빈을 맞이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파인 모션의 트레이너로 몇 년간 재직한 그로서는, 공주님이 철딱서니 없게 사고 치는 것들을 많이 보아와서인지,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자세가, 어찌 보면 타국의 부마가 되기에는 좋은 자세일지도 모른다. 트레이너 본인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어디 불편하신지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점점 옅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고, SP 대장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이 그를 부른다. 하지만 말과는 반대로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 느낌이 든다. 착각이겠지.
“딱히…불편한 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묘하게 의식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작해야 와인 한 잔일 뿐인데, 그거 조금 마셨기로서니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왜 이렇게 졸리지.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조금 눈을 붙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으…….”
“목적지에 도착하면, 깨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SP 대장의 말도 점점 작아진다. 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한다.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 자동차의 창문으로 청색 기와의 거대한 한옥 문이 보인다. 그 위에 현판이 얼핏 보인다. 공항이라고 적인 글자가 눈가를 스친다. 그래도 제대로 가고 있었구나, 안심하고 눈을 감는다.
“……결국, 잠드셨나.”
SP 대장이 중얼거린다. 트레이너의 의식이 사라진다. 가슴께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증거다. 아마 당분간은 어깨에 둘러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SP 대장 본인은 한글을 모르지만, 현판에 적힌 글귀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서울 공항]이라고 적힌 글을 보며, 차 안의 우마무스메들은 입꼬리를 올렸다.
임무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 * * * * * * * * *
낯선 천장이다.
이세계가 아니라 진짜 낯선 천장이었다.
폭신한 감촉에 옆을 보니, 침대 위에 있었다.
“……?”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하늘한 프릴이 달린, 딱 봐도 고급스러운 침대. 맞은 편의 작지만 비싸 보이는 화장대, 하얀 대리석 벽난로와 하프 문양이 그려진 장식들, 액자에 걸려 있는 여러 점의 그림들, 샹들리에, 금실이 수 놓인 소파와 원목 탁자. 창문에 쳐진 긴 커튼들, 방이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단순히 커튼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아마도 밤이 된 것이리라. 순간적으로 비행기를 놓친 걸까,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야, 자는 틈에 기숙사로 돌아온 것일까, 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야 당연하지. 남자 혼자 사는 기숙사에 이런 프릴 달린 침대와 화장대 같은 것이 왜 필요한데. 아니, 애초에 자는 사람이 공항의 검문을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자 곧이어 떠오르는 당연한 의문.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SP 대장은 어디에 간 것인가. 공항에 이런 시설이 있었던가.
설마. 최악의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몸을 살펴보니, 옷가지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고, 누가 건드린 흔적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휴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SP들이 이쪽을 자고 있을 때 덮치거나 할 리는 없잖아. 일전에 파인 모션에게 당한 것이 조금 트라우마가 됐나 보다.
아무튼, 천천히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보기 위해 커튼을 걷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야 비행기를 다시 예약하고 휴가를 더 내건,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
그리곤 곧바로, 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야, 푸른 잔디가 잘 다듬어진, 정원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공항에 이런 정원이 있을 리가 없다. 여긴 공항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저, 머리 한구석에서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진실을 무시하며 눈을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공항 시설에 금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목재 문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프 문양이 상징하는 것은 아일랜드 왕가이지 않은가.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중앙의 트레이너가 무지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때, 문이 열렸다.
승부복 차림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다.
그리고 이내 문이 닫히고, 철컥, 잠긴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것이 바보다. 당장이라도 이 창문에서 뛰어내려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됐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다.
아니, 그랬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정원 곳곳에 그녀의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도망쳐 봐야 다시 이곳으로 잡혀 들어올 뿐이다.
담당 우마무스메가 천천히 걸어온다. 분명 평소와 같은 얼굴인데, 살짝 요염하게 보인다. 아무래도 몸을 섞은 적이 있기 때문일까, 담당 우마무스메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파인…모션.”
조심스럽게 담당 우마무스메의 이름을 부른다. 기쁜 듯이 웃으며, 파인 모션은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 앞에 선다.
그리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침대로 던진다.
“…….”
파인 모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다. 동시에, 앞으로 그에게 닥쳐올 운명에 저항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파인 모션이 그의 위에 올라탄다. 헤실헤실 웃으며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양팔을 살짝 누른다.
“네 방이구나, 여기는.”
체념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그는 파인 모션에게 한 마디 툭 건넨다. 그런 그에게, 파인 모션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답한다.
“응. 아일랜드의, 더블린 캐슬의, 내 방이야.”
“여기까진 어떻게 데리고 온 거야?”
“왕가의 전용기. 더블린까지 직항으로 데리고 왔지.”
“와인에 약…탔구나.”
“트레이너가 저항하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 깊게 잠들 수 있도록 했어. 인체에는 무해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 의사는?”
“……싫어?”
그렇게 말하며, 파인 모션은 조심스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어 온다. 양팔을 잡은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해 봐야 가증스러울 뿐이지만, 그래도 심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니까.”
“하지만, 지난번에는 굉장했고…….”
“그건…생리현상이야.”
“정말, 그것뿐?”
귓가에 불어오는 파인 모션의 목소리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트레이너의 트레이너가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파인 모션이 아니었다. 후후, 그녀답지 않을 정도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파인 모션은 한쪽 손을 그의 아래쪽으로 가져간다.
“트레이너.”
그러더니,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기대감에 가득 찬 강아지처럼, 그녀의 욕망을 트레이너에게 말한다.
“같이 즐기자고 했었지, 추석.”
“추석은 이미 끝났어.”
“후후, 내가 말하는 건 명절이 아니야. 내가 들었을 때는 이렇게 들렸는걸.”
“……!”
파인 모션의 눈동자가 빛난다. 그리고, 그는 파인 모션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야 말았다. 일본에 있어서 가끔 잊어버리지만, 담당 우마무스메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영어에도, 그리고 아일랜드어에도 능통한 왕족이다.
“일단, chu♡”
파인 모션이 뜨거워진 트레이너에게 키스한다. 하지만 혀와 혀가 얽히는 딥 키스가 아니다. 그저, 끝부분에 살짝, 간지럽히듯이 입술을 가져다 댄 뒤에 쪽, 하는, 얕은 키스.
그 행동에, 그는 파인 모션이 다음에 할 행동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허리를 빼려 했지만, 이미 파인 모션에게 허리를 붙잡힌 뒤였다.
그래, 영어로도, 그리고 아일랜드어로도 같은 의미니까. 그렇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너무 억지인 거 아니냐고.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다음은, suck이야.”
그 말과 직후, 파인 모션이 입에서 트레이너를 문 채로 공기를 빨아낸다. 어깨나 뺨이었으면 키스 마크가 남았으리라.
뭐, 그렇겠죠. 이렇게 되겠죠. 애초에 suck이 아니라 seok라니까! 속으로 울부짖어보지만 파인 모션이 들을 리도 없었거니와, 자극은 강했고, 몸은 정직하다.
“알겠지, 트레이너?”
그러더니 이내, 파인 모션은 몸이 살짝 달아올랐는지 그녀의 승부복을 한 꺼풀 벗는다. 천천히, 반쯤 일어나 있는 트레이너의 위에 완전히 올라탄다. 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간 뒤, 공주님의 명령을 속삭인다.
“이제, 나와 놀아 줄 시간이야.”
하얀 장갑을 낀 손이 그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고, 파인 모션의 꼬리가 그의 다리를 휘감는다. 공주님과의 심야의 놀이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한다.
아일랜드의, 따스한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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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한 건 없다 알게써?
토키사키-쿠루미
2024/09/16 20:32
무서운 뇨자
린성신관알타
2024/09/16 20:50
그렇게 트쎄이를 긴빠이쳐서 자진이민 받아오시니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KaidoHKS
2024/09/16 21:41
추석이 그런 의미였ㄱ.....아니 그전에 당근커버는 안쓴겁니까 또레나....?
카니에타
2024/09/16 22:14
그걸 쓰는건 강자인 말딸의 의지에 따르기 때문
아알호메프
2024/09/16 22:28
츄~썩 아니 공주님이 이런 천박한 말을ㅋㅋㅋㅋㅋㅋㅋ
카니에타
2024/09/16 22:29
아쎄이! 자진 부마입대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