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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굶주린 환상

" 제가 환각이 보입니다 선생님. "

정신과의 김남우는 노트에 환각이라고 메모했다. 중요하다기보다는 펜질 자체가 그의 습관이었다. 
환자는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매우 마른 편이었다. 첫인상으로는 거식증 때문에 찾아온 줄만 알았다. 
김남우는 예상 밖이었던 환각에 관해 물었다.

" 환각이라, 어떤 환각이죠? "
" 여자를 봅니다. "
" 여자요? " 

30대 중반의 환자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 아주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순한 눈매에 하얀 피부, 머릿결이 곱고, 웃을 때 보조개가 집니다. "

김남우는 모두 메모하며 물었다.

" 아는 여자인가요? 옛날 여자친구? "

그러나 환자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전혀 모르는 여자입니다. "
" TV나 어디에서 봤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
" 아니요. 모르던 여자가 맞습니다. "
" 그렇군요. 얼마나 자주 보나요? "
" 거의 매일.. "
" 혹시 귀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김남우는 이럴 때 가장 흔한 사례를 생각했다. 하지만 환자는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귀신이 있습니까? "
" 음. 그럼, 왜 그런 환각을 본다고 생각하시나요? "
" 모르겠습니다. "
" 그럼 주로 언제 환각을 보시죠? "

김남우가 형식적으로 던진 질문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 배가 고플 때마다 나옵니다. "
" 예? "
" 제가 배가 고플 때마다 그녀의 환각이 나옵니다. "
" 음? 음... "

김남우는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사례가 있나? 
그러면서 시선으로 환자를 보며 드는 생각은, 항상 배가 고파 보이는 인상이라는 것이었다. 설마,

" 혹시, 일부러 환각을 보기 위해 식사를 안 하신다거나.. "
" 예. 맞습니다. '
" 허 "

그제야 거식증을 연상케 하던 환자의 모습이 이해가 가는 김남우. 볼펜을 빠르게 움직였다.

" 왜죠? "
"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 오 이런... 환각인 걸 인지하시면서 말입니까? "
" 예. "
" 그게 환자분께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시는 거죠? "
" ...예. 그게 제 고민입니다. 지금 제 몸 상태가 너무 엉망입니다. 쓰러진 적도 있고.. 얼마 전에는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
" 문제가 깊군요. "
"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이걸 먹으면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걸 알기에 자꾸만 꺼리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점점 줄어들고, 직장까지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더욱 그녀를 계속 찾게 됩니다. "
" 음. "

김남우는 노트에 '환각? 거식증?' 을 메모한 뒤, 계속 동그라미를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사례를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졌다.

" 그녀는 어떤 사람이죠? 예를 들어 뭐 말투나 그런 "
" 아니요. 그녀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항상 웃어줍니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습니다. "
" 아 예. 혹시,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실까요? 음. 쉽게, 지금 나쁜 기억을 하나 떠올려보신다면요? "
" 딱히 없습니다. "
" 없으시다... "

다시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김남우. 

" 배가 부를 땐 절대 나타나지 않나요? "
" 예. 아주 배가 고플 때만 나타납니다. 그때 참지 못하고 물이라도 마시면 바로 사라집니다. "
" 물만 마셔도 사라지고 배가 아주 고플 때만? 왜죠? 왜일까요? "
" 모르겠습니다. "
" 음. 언제부터 그런 환각을 보기 시작하셨죠? "
" 1년 전부터 입니다. "
" 1년 전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셨나요? "
" 아니요. "

김남우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 환각이 왜 나타나는지 짐작 가는 계기가 하나도 없으신가요? "
" 글쎄요.. "

감이 안 오는 환자의 표정에, 김남우가 바꿔 물었다.

" 그럼 혹시, 살면서 겪은 모든 사건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것이 뭔가요? "
" 음. "

사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5년 전에 한번, 배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된 적이 있습니다. "

김남우의 펜이 기쁘게 별표를 그렸다.

" 좋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죠. "
" 그게...잘 모르겠습니다. "
" 예? "
"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배를 타다가 사고가 났고, 제가 며칠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신문 기사로 봤습니다. "
" 아. "

부분적인 기억상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을 때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신과의인 김남우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고.
김남우는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환자분의 환각은 그때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인도에서 표류하실 때 많이 외롭고 무서우셨을테니, 가상의 존재가 필요했었을 겁니다.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배구공 월슨처럼요. 배가 고플때만 환각이 보인다는 부분도 무인도와 연관지으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 아...그럼 왜 갑자기 1년 전에서야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까? "
" 그동안 배를 안 타시다가 1년 전에 한 번 타셨다던가, 혹은 제주도 같은 데 놀러가셨다거나..그런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요? "
" 음. "

환자는 '그러고 보니' 싶은 얼굴로 수긍했다.

"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
" 사실, 환자분께서는 이미 그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계시는 터라 상황이 좋으십니다. 환각을 사랑하게 되셔서 고민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무인도에서 힘들었던 시절에 만들어낸 애착이 그대로 이어진 거니까요. "
" 아 "
" '내가 힘든 시절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환각이구나, 이젠 안전하니까 괜찮다.' 이런 식으로 자꾸 자각하시면서 조절하셔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이제 난 안전하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시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아지실 겁니다. 실제 현실의 여성을 만나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겠네요. "
" 예.. "

김남우는 아직 혼란스러운 환자의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 5년 전의 사고와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것도 빠른 방법이 되겠네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
" 예.. "

환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남우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며 상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지금도 배고픈 상태이십니까? "
" ...예. "
" 아이고 하하. 그러면 계속 그 여자분이 이 방에 계셨겠군요. "
" 예. "
" 심심했겠네~ 그녀는 뭘 했나요? "

환자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계속 선생님의 볼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요. "
" 아... "

순간적으로 김남우의 손가락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곧, 볼펜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는 김남우.

" 하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하죠. 수고하셨습니다. "
"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

방을 나서는 환자의 등을 보며 김남우는 생각했다. 이 사례는 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실제로도 김남우는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뒤 점심 시간. 병원 휴게실에서 간호사들과 간식을 먹을 때, 한 간호사가 놀라며 TV를 가리켰다. 

" 어? 저분 저희 병원에 오셨던 그 환자분 아니세요? "

화면 속에는 그 환자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울고 있었는데, 화면 하단의 타이틀이 김남우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 충격! 무인도의 식인 사건! ]

" ... "

그는 김남우와 상담을 한 뒤, 기억을 되찾기 위해 무인도를 찾아갔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곳에서 자신이 숨겨두었던 백골을 찾아냈다.

김남우의 진단은 틀렸다. 그는 그 여자의 환각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그가 무인도의 굶주림 속에서 살기 위해 먹었던 여자였다.
겨우 구조된 남자의 자기방어기제가 강제로 그 기억을 지웠지만, 극도의 굶주림이 찾아왔을 땐 그 여자의 환상을 보게 된 것이었다.

TV화면 속 그는, 오열하며 그녀의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섬에서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의 행보가 그것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떠내려온 그녀의 시체를 훼손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은, 5년 전 사고로 실종되었던 딸을 백골로나마 찾게 되었다며 고맙다 했다.
그는 더욱 더 오열했고, 그것이 방송의 하이라이트였다.

" 세상에... "

김남우는 정말 저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구나. 

이 놀라운 사건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여자의 환각을 보는 남자. 그 환각을 사랑하게 되어 굶주리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고, 의사의 조언으로 다시 무인도를 찾아가 식인의 기억을 되찾고, 세상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눈물로 유가족에게 사과. 유가족의 거룩한 용서까지.

그 과정에서 김남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의사로서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그 환자와의 만남이 행운이었다.

인터뷰에서는 한번도 밝힌 적이 없었지만, 김남우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

" 그런데 왜 사랑일까? 공포나 죄책감이 아니라... "

김남우는 볼펜을 톡톡 두드리며 자신이 검색한 내용들을 보았다.

[ 무인도 식인남 방송들, 무인도 식인남 자서전 출판 계약, 무인도 식인남 전격 영화화! 판권 조율 중. . . ]

" ... "

김남우의 볼펜이, 그날 메모했었던 '보조개'를 좌우로 그어댔다. 

정신과 의사의 지나친 상상이겠지...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0/13 22:00

    아이고 너무 오랜만입니다~!
    책에 실릴 미공개분을 비축하느라 그동안 올리질 못 했네요. 흐하. 어느정도 정해지고 나서 올려요! 잊혀지기 전에;
    항상 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요즘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아, 책은 11월 중순에서 12월 사이에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MXbGZU)

  • 가담항설 2017/10/13 22:05

    추천 1빠!! 한 달 하고 조금 만 더 기다리면 염원하던 복날님 책이 나오는 건가요!!! 흥분되네요!!
    이북 인가요? 종이책인가요?

    (MXbGZU)

  • 가담항설 2017/10/13 22:11

    보조개는 죽은 시체에서는 볼 수가 없죠....ㄷㄷㄷㄷ시체를 훼손해서 죄송하다 했는데 살아있을때 보조개가 있는걸 아는 상태라는건....ㄷㄷㄷ

    (MXbGZU)

  • 배고파밥좀줘 2017/10/14 02:13

    저 복날님 글 너무 좋아해서 빠짐없이 읽다가 그동안 오유를 잊고지내서 두달만에 읽거든요. 문체가 훨씬 자연스럽고 상황묘사나 감정표현이 엄청 매끄러워지신게 확 느껴져요. 앞으로의 발전이 정말 더 기대됩니다ㅠㅜ 제가 다 기쁘네요

    (MXbGZU)

  • 죽창깎던노인 2017/10/14 02:34

    아. 이번 글 분위기도 그렇고 정말 좋네요 ㅜㅜ 간만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에요. 으아아

    (MXbGZU)

  • 마왕♡용사 2017/10/14 04:34

    #여인은 말하고 싶었다.
    (단편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며 그날 당시 김남우가 남긴 메모를 보여준다. )
    "환각... 아주 아름다운 여자. 순한 눈매, 하얀 피부, 머릿결이 곱고, 웃을 때 보조개
    귀신? 배고플때만... 왜? 사랑???  환각, 거식증
    무인도? 표류! ☆☆☆!!!  계기..."
    (그날 김남우가 잡고 있던 펜을 놓기전 살짝 힘주었다 놓았을때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는데
    김남우가 펜을 놓으며 무의식적으로 우연히 그어진 선은 거식증의 "식"과 무인도의 "인"을 잇는다.)
    (김남우가 고민하다 환자를 따라 일어나는 장면에 겹쳐지는 그자리에 여전히 앉아있는 여자 귀신의 뒷모습...
    카메라가 서서히 돌며 책상에 앉아있는 여인의 얼굴을 비추고 슬픈 표정의 보조개를 띄운 공허한 표정을 지나 뜯어먹힌 자국이 남은 어깨가 드러나며 페이드된다.)
    --------
    전 복날님 글 읽으면 종종 영화의 한장면을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트와일라이트 존의 한 에피소드같다 할까.. 혼자만의 상상을 즐겨보았습니다~ ㅎㅎㅎ
    이번거도 정말 좋았습니다. 책 출판도 축하드려요~

    (MXbGZU)

  • 질풍의라빈 2017/10/14 09:09

    잘봤습니다 ^^
    의사가 여자는 지금 뭐하고 있냐에서 펜을 잡고 있다고 한게 섬뜩하군요...
    의사도 먹을거로 보이는건가 ㄷㄷ

    (MXbGZU)

  • 신이내린미모 2017/10/14 16:55

    흑흑 복날님 책이 드디어!!!! 그것도 종이책!!!ㅠㅠ 몇권인가요? 사인본 이벤트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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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빛푸른 2017/10/14 21:42

    글을 쓸수록 실력이 느시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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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leek 2017/10/14 21:47

    와! 책 잘 빠졌으면 좋겠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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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이야 2017/10/14 22:22

    김남우와 경찰, 피해자가족, 그리고 모든국민....
    " ㅎㅎㅎㅎ ㅋㅋㅋㅋ 그나저나 얼굴이 너무 팔려서
    당분간은 할 수 있는게 없네... 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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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묻어가자 2017/10/14 23:10

    와우

    (MXbG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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