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사투리를 쓰는 서울에서 평생 산 노비
표준어를 쓰는 갓 상경한 지방 양반은 흔한 클리셰다.
그러면 정말 지방 사족들은 표준어를 쓰고
서울 노비들은 사투리를 썻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반반이다.
영조가 이르기를,
“김한철(金漢喆)은 비록 서산(瑞山)에 살기는 해도 어찌 그를 시골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방 유생은 부(賦)나 표(表)가 서울 유생만 못한데 지금 책문에서 또 입격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할 만하다.”
하니, 박문수가 아뢰기를,
“시골 유생의 문장에는 자연히 향음(鄕音)이 있으므로 표나 부에서 매번 낙방합니다.
이번에는 전시에서 대책(對策)을 만나 또 모두 낙방했으나 시골 유생들 사이에 억울하다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조 7년 2월 24일 정시 전시 시권을 뽑는 자리의 대화
사투리를 쓰면 과거 합격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합격해도 어전에서 사투리를 심하게 쓰면
시종신(임금을 모셔 호종하는 신하. 종관[從官].)으로 쓰지도 않았다.
시골 양반들이 서울에 몇 년 유학하며 과거공부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지방 명문가들이 대체로 사투리를 적게 쓰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경연에서 언해본 음으로 읽으면 영조는 어째 그리 읽느냐고 묻고,
언해를 경상도 학자들이해서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고쳐 읽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01_0050_0020_0020_0020
[신노비란 혼인할 때 신랑·신부에게 부모나 친지들이 특별히 주는 노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식 한 명당 2∼6구 정도 주었고, 17∼18세기 이후 균분 상속이 해소된 시점에서도
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 집안도 신노비만은 아들과 동등하게 분급하였다.]
이 2가지를 고려해 본다면 조선시대때 모습이 어땠을 지는 잘 알 수 있다.
사족층은 최대한 서울말씨를 쓰려고 노력했을 것이지만
위의 사례에서 알수 있듯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비 계층은 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의 노비&과거시험 보좌하러 온 노비
&결혼때 혼수로 딸려온 사람들의 노비들과
원래부터 서울에 살던 노비들이 섞여
추측컨데 노비계층의 언어는 최소한 서울에서는 잡탕이 되었을 수 있다.
최소한 이런 식으로 화내는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마어장군 앙골라스
2024/07/22 01:05
지금부터 한 20년 전만해도 부산에서 서울말 쓰면 듣던 아저씨들이 막 간지럽다고 몸 비비꼬고 그러던 시절이 있었는데
저 때는 고향 돌아가면 더 심하지 않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