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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 "신 앞에서 이리 말할 수는 없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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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폰으로 보길 권하고,
기왕이면 위 게시글부터
먼저 보고 오길 권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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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의 명작 영화인
을 알려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감독판으로 보길 권하는
특이한 작품으로도 유명하지.
12 세기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기독교 진영의 예루살렘 왕국 연합과
이를 적대하는 이슬람교 진영 사이에서,
종교적인 구원관의 진정한 핵심은
결국 인본주의이자 포용심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명작임.
(*대신 각색의 정도가 좀 심함.)

(*관련 부분의 자막영상.
한글 자막을 켜야 함.)
그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이게 오늘의 주제가 되시겠다.
종교적인 구원을 찾지 못한 채로
척박한 이벨린의 영주가 된 발리안과,
나병에 걸려 온 피부가 녹아도
성지 예루살렘을 지킨다는 사명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군왕 살라딘과
전쟁을 치러 이긴 보두앵 4세의
첫 만남을 함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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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두는가?"
"둘 줄 모릅니다."
"온 세상이 체스판에 담겼지.
어떤 수라도 자네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네.
출발점에 남기는 것만 빼고
무슨 수라도 둬보시게나.
어떻게 끝날지는 누구도 모르지.
그대의 인생이 어찌 끝날지
가늠해본 적 있는가?"
"있습니다."
"어떻게 끝나는 삶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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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난 장소에서
100 야드 떨어진 곳에
묻히는 삶이었죠."
"그럼 지금은?"

"이젠 예루살렘 왕국에 당도해,

그 왕을 알현하고 있나이다."
"흠, 난 16 세의 나이에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뒀네.
그 순간에만큼은 내가
100 살까지라도 살 것 같았지..
이젠 서른이나 채울지 확신이 안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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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자신의 끝은 모른다네.
혹은 어떤 손길이 우리를
저 체스판으로 이끌지도 말이야.
왕은 그 신료를 부릴 것이고,
아비는 아들에게 의무를 지울 테야.
물론 *저들도 스스로 움직일 걸세.
오직 그때에라야, 저들 역시도
자신만의 승부를 펼치는 게지."
(*신료와 아들)
"꼭 명심하시게.
어떤 역경에 처하거나 놀아나도,
자네의 영혼은 자네만의 것임을..
왕이나 어느 권력가가 자네를
데리고 부릴지라도 말이네.
자네가 신 앞에 당도했을 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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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제게 그리
하라고 종용했습니다.'라거나,
'당시에는 제 덕목을 관철하기가
어려웠습니다.'라고 말이지.
이런 변명은 안 통할 걸세.
꼭 기억해두시게나."
"그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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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보두앵 4세가 발리안에게
주문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마키아밸리즘적인 권모술수는
그 사람의 영혼을 더럽힐 뿐이니
결코 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언제나 정명한 행보만 택하고
양심을 지켜 사회에 이바지하라는 것.
환경이나 타인을 핑계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물론,
악의적이고 파멸적인 선택으로
영혼을 더럽힌다면 그건 결국
신을 배반하는 모독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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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내게는 저 장면이
폰타인 서사가 그 결론으로 삼은
실존주의적인 고민과 겹쳐 보였음.
저번 폰타인 마신임무의
서사를 해설하면서 내가 그랬지.
느비예트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성령을 내리는 삼위일체의 대변자이자,
동시에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면서도
결국 실존주의적 질문을 던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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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라면
내가 성령의 역할인 느비예트더러
실존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을
굉장히 이율배반적으로 느끼거나
심지어 모독적이라고 생각할 것임.
기독교 철학의 유래를 생각하면
실존주의를 거론해선 안 되니까.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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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타인의 마신임무가 끝난 뒤에
다친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끝내 예술계에 복귀한 푸리나는
마침내 심리적인 족쇄를
벗어던진 자유인처럼 보였지.
하지만 그녀를 향한 대사는
무거운 경고를 담고 있었음.
전설임무의 [잔물결] PV에 나왔지.



"인간이 된다는 건
비밀을 숨기고, 고통을 겪으며,
고독과 함께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도 인간이 되고 싶니?"
이 대사, 아주 인상이 깊었겠지?
재미있게도 느비에트 역시
이와 썩 비슷한 고민을 언급함.

"내 마음 속에는 줄곧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이 있다.
난 왜 이런 모습으로 탄생했으며,
기나긴 삶의 끝은
또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묻고,
인생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의문이
점차 불안한 방황으로 변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외면하기보다는
어설프더라도 꿋꿋이 맞섰음.

"인간은 내 모습을
비추는 수면과도 같다.
그들을 관찰해야만 나 자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지."
특히 인간의 감정을 비롯한
정신작용에의 이해가 어려워서
포칼로스가 제안한 심판관직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자리로
바꾸어 받아들이기도 했음.
(이게 훗날의 거대한 성찬을 위한
외통수일지는 짐작도 못한 채로.)
저렇게 삶의 무의미함을 의심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 대해
어떤 행보를 계속할지 묻는 것,
이런 고민을 품은 철학 사조를
바로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함.
기왕 못 알아먹을 소리를 한 김에,
상당히 엇나가는 얘기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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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바트 서사의 핵심 구도는
바로 저 실존주의 철학을
방향타로 삼은 [본질과 실존]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음.
[본질]이란 모든 존재자의 근원,
쉽게 말하면 '그러한 것을
그러하게 만드는 무언가'이며,
[실존]은 본질과 반대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의미하여
결국 모든 존재자의 끝인 개념임.
쉽게 풀면 [본질과 실존]은
나무로 치면 [씨앗와 열매]인 셈.
앞서의 느비예트의 대사에도
이 구상을 담고 있었지.
"난 왜 이런 모습으로 탄생했으며,
기나긴 삶의 끝은
또 어디로 향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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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문장으로 엿보이는 본질주의는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며
만물의 진정한 모습을 탐구했음.
특히나 플라톤의 경우는
이를 이데아라고 이름 붙였고.
하지만 이 본질주의 철학에도
치명적인 맹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실존]을 무가치하게 여긴 점.
왜냐하면, 실존은 너무 흔하니까.
모든 곳에 맺힌 '존재하는 것'은
전부 [본질]에서 파생한 것이나,
우습게도 옛 본질주의 철학은
[실존]을 대체로 '진정한 모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고 말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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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주의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칸트의 물자체 등으로 이어졌고,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 합리주의 등
근대 유럽 사회를 견인한 사유의
척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음.
하지만 이는 한낱 인간의 고난조차
구제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지.
너무 원대한 근원을 탐구한 나머지,
등잔 밑을 못 보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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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본질]부터 부정하며
그 대신 [실존]을 내세운 것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이었음.
인간의 고통을 씻어내기 위해
미덕에 대한 탐구를 하든지,
심미적인 체험을 하든지,
죽음의 의미를 파헤치든지,
혹은 삶의 무의미함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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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인간의 삶 속 고통을 불식시키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알고자
존재의 양태를 탐구했음.
흥미롭게도 본질주의를 부정하기에
일단 본질로부터 특정한 경위를 거쳐
[실존]이 맺힌다는 사고부터 버리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우연으로
지금, 여기에 맺힌다고도 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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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거두이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마르틴 하이데거.)


느비예트 말대로 기나긴 삶이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 질문하지.
왜냐하면, 시작이 있는 것은
결국 끝이 있게 마련이고,
'실존하는 나' 역시도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종결시키니까.
그리고 폰타인 서사는
이런 문제의식을 푸리나와
느비예트를 통해 드러낸 거고.
게다가 이런 실존주의를
기독교와도 연결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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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게시글의 제목, 기억함?
"신 앞에서 이리 말할 수는 없잖나?"
에서 인용한
서론의 대사에서도 똑같았음.
'끝'이 어떨지는 누구도 모르나,
그렇다고 오만방자하게 굴 게 아니라
정명하게 고난한 삶에 맞서라는 것.
실제 철학사에도 이런 고민을
자신만의 철학으로 푼 인물이
바로 키에르케고르란 양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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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세기 초엽의 인물로,
기독교 신앙이 엄격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자랐으나, 훗날에
어지러운 가정사에 더하여
엉망이던 당시의 기독교계에
실망을 품고 제 나름의
기독교 신앙을 정리했음.
바로 '신 앞의 단독자'라는 개념.
스스로를 존재의 근간으로 삼아
섭리에 따라 미래를 결정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 신 앞에,
보두앵 4세가 남긴 말처럼
고통스럽고 험난할지라도
당당히 마주서서 자신을
증명해내는 진정한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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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삶의 유한성과
신 앞에서만 드러나는 죄의
무게에 짓눌린다고 하더라도,
삶의 주체로서 자유로이 실천하여
신에의 믿음을 통한 구원으로써
절망에 대안을 낼 수 있다고 여겼음.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봤는데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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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로 자주 쓰이는 아브라함.)

그의 구원 사상은 쉽게 말해,
아무리 삶이 험난하고 괴로워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라는 것.
신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데,
정작 그 결론은 한낱 인간더러
자기확신을 가지라고 격려함.

따지고 보면 이런 얘기는
우리가 여행한 티바트에서
거의 모든 서사의 주제이거나
최소한 경유지로 등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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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발린은 독혈을 정화했고,
암왕제군은 종려가 되어
인간의 시대를 개창했으며,
쇼군은 찰나일 뿐인 염원을
수용해 닫힌 문을 연 데다가,
부러진 가지를 묘목으로 삼아
'나'라는 존재에의 집착을 덜어
앎의 과정인 운명을 포용하고,
마지막으로 대홍수 이래 모두를
[침륜]시켜야 할 비극의 운명은
신좌의 붕괴에 [침례]로 거듭났음.
이 과정에서 모두 '고통'을
직관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좌절이나 절망을 누그러뜨렸지.
근데 이 얘기, 내 글 보던 사람들은
예전에도 본 적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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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링크 딴 게시글.)


ㅇㅇ, 생각이 안 나는 게 이상함.
이는 누가 봐도 불교적인 사유임.
전에 불교의 예시만 정리한답시고
나도 저런 글을 쓴 적이 있었지.
이때, 실존주의와 불교의 관계가
티바트 서사의 이해에 아주
중요하다는 마지막 단서도 뒀고.
오늘 지겹게 본 실존주의는
사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출발했다고 봐도 무방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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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를 시작으로

아시아 사상을 접하다가
불교에 착안하면서 삶을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본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하지만 염세주의자라는 그도
연민과 동정을 제시하면서
심미적 체험으로 고통을
잠재우라고 격려를 보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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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한 자(위버멘쉬)'를 내세우며
마침내 인격신과 그 피조물을
세계의 근간으로 본 기존 철학에
반기를 들고는 '신을 죽이면서'
불교와 비슷한 입장에 선 니체..
그는 현대철학의 물꼬를 튼
인물로도 평가를 받지만,
이는 신이 죽었다며 본질주의를
부정하는 사상을 제시한 게
그 출발이라 할 수 있음.
위 두 인물과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을 출발시킨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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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신과 그 피조물들이

세계의 근간이라 굳게 믿던
서구 사회의 뿌리가 본질주의라면,
불교와 이에 영향받은 실존주의는
반본질주의로 분류되기도 함.

(*불교의 중도 사상을 담은

독화살의 비유에 대한 영상.)


불교는 형이상은 물론이요,
이와 연관된 일체의 질문에
침묵하며 답변을 거부했음.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형이상을 묻던 제자에게
독화살이나 뽑으라고 핀잔을 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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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관련 삽화.
좌측 하단의 인물이 거짓 하늘 너머로
진짜 하늘을 목격하고 있다.)


덧붙여, 난 오늘 게시글의 내용으로
왜 영지주의가 티바트 서사의
핵심 틀을 이뤘는지 예측 중임.
영지주의는 따지고 보면
기독교의 이단분파이면서
정작 그 포용 정신은 거부했고,
그래서 본질주의 사유의
가장 조악한 예시로 선정되어
'뒤집힌 거짓의 하늘'이 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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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하늘 아래에서
본질주의의 이원론을 뒤집고
매번 불교 철학이나 실존주의와
맞닿은 결말을 만나던 것이고.
유머게시판에서 다른 원신 유저들이
가끔씩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
"이 게임은 서사의 흐름을 못 잡겠다."
신규 스토리를 담은 패치가
간헐적으로 나오는 탓도 있지만,
스토리 구조끼리 서로 비슷하면서도
정작 주제는 약간씩 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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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유게이들에게 이번 글이
아마 약간의 답이 되지 않을까 함.
결론은 간단하게 이런 셈이지.
편향적인 본질주의 철학으로
영지주의가 선정되며 티바트에
'고통의 문제'를 제공했다면,
포용적인 반본질주의 철학으로
불교와 실존주의가 이에 대치하며
'구원의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중에는 아마
이런 내용으로 쓴 사람이 없어서
나만의 망상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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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유명한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

단지, 폰타인 서사를 둘러보면
프랑스 문화사를 잘 챙기던데,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이후에는
20세기 초엽의 프랑스에서
알베르 카뮈, 장폴 사르트르 등
노벨상까지 탄 실존주의 작가들이
당시 문학계를 휘어잡았거든.
이런 구상을 반영하고 싶어서
호요버스는 굳이 폰타인 서사의
주요인물들에게 실존주의적인
고민을 안기고 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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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의 이런 추측에
확신을 준 계기가 있으니,
이런 원신 티바트 편의
서사 구조를 매우 흡사하게
간직한 다른 게임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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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반응이 좋다면 다음에는
이 얘기도 정리해 오겠음.
참고로 난 존나 진심임.
농담기 하나도 안 섞고.





p.s. 혹시 내가 써놓은
다른 글들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이용하면 됨.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3474
요건 각종 유래, 모티브 관련 글,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7930
요건 이번 게시글 같은
각종 서사해설 글 모은 거임.

댓글

  • 남동생은 날개가있었다
    2024/07/20 03:39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OYbjwc)


  • Angurvadel(PC유저)
    2024/07/20 03:42

    원신!

    (OYbjwc)


  • 리월행은 설산루트로
    2024/07/20 03:43

    (아마도)

    (OYbjwc)


  • 말랑냥이뱃살
    2024/07/20 03:59

    기다리고있엇읍니다
    이런 글은 많은 사람이 봐야하는데..

    (OYbjwc)


  • U4M5P
    2024/07/20 04:00

    원신, 철학, 본질주의, 실존주의, 영지주의, 기독교, 불교, 이데아, 사르트르, 하이데거 와드

    (OYbjwc)


  • 성1기사 호드릭
    2024/07/20 04:05

    원신과 실존주의
    와드

    (OYbjwc)

(OYbjw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