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319671

[단편] 꽃뱀의 징크스

보름 전에 사귀게 된 그녀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너무나 예쁘고, 웃음이 많고, 배려심 있고, 경제적 능력까지.
고작 우산 한 번 씌워준 인연으로 이어질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돈도 없는 백수에다가, 외모도 별로고, 성격도 소심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게 올인했다. 무슨 사랑에 빠지는 약이라도 먹은 사람마냥 너무나 잘해주었다. 
데이트 비용도 자기가 다 부담하고, 내 생각이 났다며 선물을 사주고, 듣기 좋은 말들을 속삭였다.
나는 좋으면서도, 몹시 불안했다. 지난 보름 동안 매일 같이 고민해도, 그녀가 나를 만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 재준이와의 술자리에서 한 가지 '썰'을 듣게 되었다.


" 잘나가는 꽃뱀들은 말이야. 크게 한탕 성공하고 나면, 반드시 형편없는 남자를 만난다더라. 그 남자한테 한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대해준다나. 그래야지 탈이 안 나고, 다음에 벌일 작업도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말이야. 그 바닥에서는 유명한 징크스래. 그러니까 너도 이제 꽃뱀을 찾아다니란 말이야 임마! 킥킥 "

재준이는 재밌지 않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녀석은 내가 연애 중인 것도 모르고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물론, 그녀가 꽃뱀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설마? 아니, 아니다... 그런데 혹시...?
나는 녀석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재준아, 그 얘기 진짜야? "
" 당연하지! 이 얘기해 준 누님이 강남에 빌딩도 있는 누님인데, 옛날에 관련해서 돈 좀 만지셨다더라고. "
" 아... "

재준이의 말은 사실이다. 소심한 나와는 달리, 녀석은 엄청난 마당발 인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누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들은 거였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 그럼..한 달 뒤에는 어떻게 하는데? "
" 어 맞아, 그건 좀 그렇더라.. 딱 한 달이 끝나는 날,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대. 생글생글 웃어주던 사람이 막 쌍욕을 하고, 인신공격하고... 남자가 당연히 매달릴 거 아니야? 그럼 이상한 짓 해보라며 시키고, 대놓고 다른 잘생기고 멋진 남자 불러서 비교하며 비웃고~ 등등등.. 어우~ 좀 너무하더라. 그렇게 한 달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거로 마무리한다네? "
" ... "

나는 무심코, 나를 보며 비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고 말았다. 소름 돋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열심히 부정했지만, 머릿속이 온통 설마와 혹시로 가득찼다.
당연히 그녀가 꽃뱀일 리는 없었다. 우리나라에 꽃뱀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런 꽃뱀이 나를 이용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절대 아니다.

" ... "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녀는 왜, 고작 우산 한번 씌워준 일로 나에게 반했을까? 생각해보면 첫 만남도 내가 자발적으로 나선 게 아니었다. 그녀가 우산을 씌워달라고 부탁했지. 의도적인 접근이었을까?

" ... "

아니다. 그녀가 얼마나 착한지는 내가 더 잘 알지 않나? 백수인 내 자존심까지 챙겨가며 돈을 쓰는 여자다. 그렇게 착한 여잔데. 착한 여잔데...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났을까? 그녀는 공부 중이라고 했다. 공부 중인 여자가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났고, 외제차는 어떻게 모는가? 그러고 보니, 무엇을 공부중이지? 내가 들은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가족에 대한 건? 그녀가 사는 집은? 그녀의 친구들은?

설마,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설마.

" ... "

아니다. 그냥 아직 보름밖에 안 됐으니까, 보름밖에 안 돼서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다. 
이상한 이야기를 한 번 들었다고 이상한 상상을 하다니, 너무 역겹다. 안 그래도 찌질한 새끼가 생각마저 찌질하면 어쩌자는 건가?
감히 꽃뱀이라니? 천사같은 그녀에 대한 죄악이다. 감히 나 따위가 그녀를 폄하하면 안 된다. 
그녀처럼 훌륭한 여자는...훌륭한 여자는...

" 옘병! 왜 나 따위를 만나는 거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

나는 머릿속에 마귀가 들어찬 것처럼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뭐라고 물어본단 말인가? 꽃뱀 이야기를 떠보기라도 해? 그때 표정이 바뀌면 어쩌지? 내가 감당할 수 있나? 자신 있어?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미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가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그녀에 대한 내 의심은 커져만 갔다.

지나치게 잘해주잖아! 너무 지나치게 잘해준다고!!

징크스 때문인가? 그래서 이렇게, 형편없는 놈을 찾아서 잘해주는 건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묻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확실하게 팩트로 알 수 있는 건, 내가 형편없는 놈이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난 꽃뱀 이야기를 들은 지 이틀 만에, 그녀가 꽃뱀이라고 혼자서 결론 내렸다.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하다. 그게 지금 내 마음이었다.

그러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한 달이 오기 전, 내가 그녀를 먼저 차면 된다. 한 달 뒤의 굴욕을 당할 필요가 없다. 내 자존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 달이 끝나는 날에 돌변해서 인신공격한다고? 잘생긴 남자를 불러다 놓고 비교질을 한다고? 
그런 꼴을 내가 당할 것 같아?! 어림없지! 

나는 그녀를 먼저 차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말할 것이다. 여자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내 타입이 아니라고. 미안하지만, 너무 질린다고!


" 응? 왜? 무슨 일인데? "
" ... "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앞에 서자 나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고,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닌 척 외면할 수 없는 그 이유는, 그녀가 꽃뱀이 아니길 원하는 내 마음이었다. 찌질한 나의 찌질한 망상일 뿐이란 희망.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하면서, 헤어지자는 말도 못 하면서, 그녀가 잘해줄 때마다 전전긍긍 의심하고, 상상하고, 역겹고더럽고끔찍하고개같고.

그렇게 29일. 
29일이 찾아올 때까지 나는 그녀를 차지 못했다.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밤, 그녀와 헤어지는 길목에서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 저기... "
" 응? 왜? "
" ... "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와 헤어지는 29일 밤의 마지막 기회. 나는 이를 악물고, 손톱의 아픔으로 정신 차리며 내뱉었다.

" 우리 그만하자. 난 널 좋아하지 않아. "
" 뭐...? "
" 여자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 미안하지만... 솔직히 시간이 아까워. "
" ... "

충격을 받은듯한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얼굴을 더 볼 자신이, 혹 그녀가 돌변한다면 견딜 자신이 없었다.

"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나 갈게. 행복해라. "

나는 그대로 뒤돌아 걸었다. 그녀는 나를 잡지 않았다. 한마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그녀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이게 증거겠지. 그녀가 꽃뱀이라는 증거가 이거겠지. 그래, 내 선택은 옳았다. 나는 평생 이날의 결정을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후회할 리가 없다.



......정말?

.
.
.
.
.
.

칵테일 바에 앉은 정재준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거참, 이런 징크스를 꼭 지킬 필요가 있나? 요즘 시대에... "

정재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헛짓거리 같아 보였다. 
그의 옆에 앉은 여인은 정색했다.

" 시끄럽고, 넌 인맥 관리나 제대로 해. 그 새끼가 30일까지 질질 끌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보름이면 되는 것을... "
" 아~ 저번엔 게임 하다가 만난 친구였는데, 그 친구 생각보다 정이 많았나 보네. 미안해. 요즘 소심한 친구 구하기가 영~ 힘들어서.. "
" 어휴~! 됐다. 됐고, 경상도 쪽에 돈 많은 놈 명단이나 보내 놔. 다시 말하지만, 인맥 관리 열심히 하고! "

여인은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바를 빠져나갔다. 남겨진 정재준은 봉투를 품에 넣으며 피식 웃었다.

" 재밌는 징크스야. 한 남자의 등을 처먹고 나면, 한 남자에게 헌신하다가 차여야만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7/30 21:28

    항상 봐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시고,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요일 숙면이 오시길 바랍니다!

    (TICqvu)

  • 꼬마마녀a 2017/07/30 21:53

    잘봤습니다

    (TICqvu)

  • 수컷수컷 2017/07/30 21:54

    어유 저런걸 친구라고. .

    (TICqvu)

  • VeritasLxmea 2017/07/30 22:39

    매번 잘 보고있오요!!

    (TICqvu)

  • 묻어가자 2017/07/31 00:10

    재밌네요 ㅋㅋ

    (TICqvu)

  • 없는닉이있어 2017/07/31 06:13

    작가님 매번 잘보고있어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TICqvu)

  • 이동식 2017/07/31 06:46

    저번엔 게임하다가 만난
    부분이 저번에 게임하다가 만난
    이렇게가 맞는 것 같아요.
    이해가 안되서 놓친 부분 있나 다시 읽고 왔어요.
    늘 재미있는 글 써주셔서 하나도 안 빼놓고 봤어요~^^ 감사합니다

    (TICqvu)

  • 베일리 2017/07/31 08:14

    매번 참신한 아이디어와 전개에 놀라네요. 잘 읽고 갑니다^^

    (TICqvu)

  • 레몬테이블 2017/07/31 08:59

    근 3년동안 오유 가입없이 눈팅만 하다가 추천을 위해 일주일전! 드디어 회원가입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TICqvu)

(TICqv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