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와라 간지의 문제작 '세계최종전쟁론'을 최근 다 읽었습니다. 이거 진짜 기묘한 책이긴 하네요. 일본 국수주의+종교적 광기+의외의 통찰력이랄까요.
이시와라 간지와 세계최종전쟁, 결전병기 같은 개념은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용'을 통해서 최초로 알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짧게 등장하는데 핵무기나 장거리폭격기, 핵전쟁 같은 개념을 예언하는 장면을 보고 일본군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나 싶었었죠.
이시와라 간지나 '세계최종전쟁론'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은 아래 굽시니스트의 만화를 보시면 대충 이해가 가실 겁니다.
위 만화말고 네이버 같은 곳에서 검색을 해보셔도 이시와라 간지나 만주사변, '세계최종전쟁론'에 대한 글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시와라 간지가 도조 히데키를 바보 취급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종교적 광기나 국수적 사고를 제외하더라도 이시와라 쪽이 다른 일본 군인들에 비해 훨씬 관심 폭이 넓고 독서범위도 다양하고 상상력이 발달했어요. 일본 군부 엘리트들은 시험 문제 풀이에 최적화된 인간들이지 지독하게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고 뻔히 정해진 책만 읽은 뻔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거든요. 그거 아세요? 임팔전투의 영웅(?), 독립 유공자(?) 무다구치 렌야도 자그마치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라는 사실. 일단 일본육사 자체가 공부를 잘해야 들어가는 명문대인데 거기서 다시 추려 뽑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육군대학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보급은 적에게서 탈취하면 된다" 같은 주옥(?) 같은 발언을 한 무다구치가 육대 출신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한참을 낄낄거렸던 생각이 나네요. 설마 저런 바보가 육대를 나왔을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육대를 안 나왔다면 당시 일본군 조직 특성상 장성 진급이 불가능 했죠. 하긴 뭐 애시당초 일본 군부 엘리트라는 인간들 자체가 어딘가 나사 빠진 인간들이었지만요.
읽어보면 의외의 통찰력이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목이 꽤 있습니다.
"가장 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공군에 의한 결전이 벌어지는 떄가 인류 최후의 일대 '결승전'의 순간이다. 그 순간은 착륙 없이 세계를 빙글빙글 돌 수 있는 비행기가 만들어지는 시대이다. 또한, 파괴병기 역시도 이번 유럽대전에서 쓰인 것 같은 물건으론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훨씬 더 철저하게, 한 발 맞으면 몇 만 명이 싹 쓰러질 만큼, 우리로선 상상도 못할만한 엄청난 위력의 무기가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행기가 착륙 없이 전 세계를 빙글빙글 돈다. 게다가 파괴병기는 가장 최신예 무기, 예를 들어 오늘 전쟁이 일어나고 다음날, 아침에 날이 밝으면 적국 수도나 주요도시가 철저히 파괴된다. 그 대신 오사카도, 도쿄도, 베이징도, 상하이도, 폐허가 되고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단기간에 끝난다. 무슨 정신 총동원이니 총력전이니 떠들고 있는 동안엔 최종전이 오지 않는다. 그런 미적지근한 개념은 지구전쟁 시대의 일이고, 결전전쟁에선 통하지 않는다. 다음 번 결전전쟁에선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우산을 집어들만 한 시간도 없이 해치우게 된다. 그런 결전 병기를 창조하고, 그 참상에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자가 최후의 승자이다." (세계최종전쟁론, 길찾기, 39쪽)
폭격기라든지 폭격 같은 부분은 이시와라 간지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미 1차대전기에 이탈리아에서 줄리오 두헤 같은 인물이 공군의 중요성과 전략폭격론을 선구적으로 내놨거든요. 두헤의 영향을 받아서 유럽에서도 이런저런 '전략폭격론'이 나와 있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총검돌결이나 정신력 만능론 따위에 빠져있던 바보 장군들에 비하면 엄청난 상상력이죠. 어쨌든 핵무기, 핵전쟁 비슷한 걸 예측한 것은 이시와라의 능력입니다.
이시와라의 개인적 성향도 꽤 흥미가 있습니다. 일본군인데도 굉장히 반항적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술을 절대 안마셔서 회식 자리에서 상관이 술을 권해도 절대 안마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도조 히데키에 대해서도 "도조 상병"이라며 얼간이 취급을 했다든지, "헌병대 외에 쓸데가 하나도 없는 계집 같은 놈"이라던가 "무능력자 주제에 장군인 척 한다"같은 비난을 했다는 군요. ㅋㅋㅋ 도조 히데키 부관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시와라씨는 능력은 어찌되었건 항상 반항하기만 하고 투서만 보내는데다, 그런 걸 넘어 무례하기 짝이 없다. 군인이면서 술도 마시지 않고 술자리에서도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깔아보기만 하니 당연히 미움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도조에게만 그런게 아니고 2.26 사태 당시에는 황도파 소속으로 반란군에 참여시키기 위해 도쿄 경비대 사령부를 방문한 아라키 사다오 대장을 보고는 "이 얼간아. 너같은 바보자식이 대장 계급장을 달고 있으니 이딴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진 거다"라고 퍼부었답니다. 그때 이시와라 계급이 대좌;;;;;;;; 그러니까 대령이 대장에게 ㅎㄷㄷㄷㄷㄷ;;;;;;;;;
일본군 조직을 생각하면 이런 성격으로 거의 진급이 불가능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워낙 성적이 좋고 독특한 견해가 많아서 그런지 사단장까지 진급은 합니다. 도조가 실권을 잡으면서 군에서 잘리고 심지어 특별고등경찰(그 악명높은 특고!)이나 헌병들에게 감시까지 당하긴 하지만요.
군 시절 일화들도 재밌습니다. 센다이 4보병연대 연대장 시절에는 마굿간에서 토끼를 기르게 했다고 합니다. 동북지방에는 가난한 병사들이 많으니 제대할때 돈이라도 보태라고 기르기 쉬운 토끼를 부업으로 기르게 한거랍니다. 제대하는 병사들도 직접 배웅을 했다고 하는데, 한번은 중대장이 제대병사들을 상대로 훈시를 하는데 비가 오는데도 계속하자 중대장에게 호통쳐서 끝냈다고 합니다. ㅋㅋㅋ 이사와라 경력의 끝인 16사단 사단장 시절 일화는 더 재밌습니다. 일본 육군은 육군기념일이 되면 3시간 넘게 열병식과 분열행사 같은 쇼를 일반인 상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시와라는 사단장이 되고 나서 행사 준비를 하나도 안하는 겁니다. 참모들이 당황해서 물어 보는데도 이전에 해봤으니 괜찮다고만 하고 준비는 無. 행사 당일 시민들이 열병식을 보러 구경을 왔는데, 이시와라는 말타고 한 바퀴 휙 돌고는 "해산"하고 끝내버렸답니다. 3시간짜리 행사 따위 5분만에 끝, 병사들은 바로 외출. ㅋㅋㅋㅋ 구경하러 왔던 시민들은 당황했지만 병사들은 신났겠죠.
한국군 똥군기, 악습을 어지간히 겪어보신 예비역 여러분들은 아마 충분히 이시와라 휘하 병사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죠. 그 외에도 세계최종전쟁을 위해 중국과 화해하고 아시아 각국을 참가시켜 동아연맹을 만들어 서구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도 합니다. 동아연맹 건설을 위해 조선에 대해서도 상당히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둥 제법 솔깃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시와라 역시 제국주의 일본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시와라는 다나카 지가쿠가 설립한 일련종 계열의 국주회 신도였습니다. 법화경 이외에 다른 경전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굉장히 과격한 형태의 일본 특유의 불교가 일련종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초기 니치렌이라는 승려가 기원이죠. 원래 과격한 일본 특유의 불교 교단인데다가 천황숭배와 같은 일본식 국수주의가 결합된 단체가 국주회 였습니다. 따라서 이시와라의 동아연맹론을 너무 과대평가하면 안됩니다. 동양식 왕도 정치를 내세워서 조선,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대한 온건론을 내세우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시 천황숭배에 기반한 '팔굉일우'사상(여덟 기둥으로 하나의 집을 삼다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팔굉일우'라는 군국주의 표어 자체가 다나카 지가쿠가 처음으로 썼다고 합니다.
"지가쿠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장래에 한번은 반드시 전 세계를 흔드는 큰 전란이 올 것이며, 각국은 모두 그것에 지긋지긋해서, 참된 평화를 요구하게 되는 때가 와서 막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진작부터 평화를 위해서 세워져 있던 일본이 자연스레 '최후 평화의 사명'으로 등장해서, 세계의 갈앙(목마른 자들이 물 찾듯 우러러 봄)하에 그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중략)
그때 싸움을 영원히 맡아서 관리하는 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것을 맡아서 관리해야 할 자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이의없는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나라가 어디일까. 세계 평화의 솔선자! 세계 문명의 정리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세계에 다시 없는 덕교가! 이들을 구비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 이외에는 없지 않은가." (같은책, 173~174쪽)
세계 전란 운운하는 부분에서 보듯 이시와라의 세계최종전쟁론이나 문명간의 대전 같은 개념은 그러니가 다나카 지가쿠에게서 비롯된 것이죠. 이시와라의 주장을 들어 볼까요.
"그렇게 놓고 보면 아무래도 흐리멍텅한 우리들 동아와 갑자기 졸부가 되어 거들먹거리고 있지만 혈기왕성한 미주 지역, 그 둘이 결승에 남지 않겠는가. 이 둘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인류 최후의 대결전, 극단적인 대전쟁을 하게 된다. 그 전쟁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극히 단기간에 팍팍 결판이 난다. 그리하여 덴노가 세계의 덴노가 될지, 아니면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통제하게 될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운명이 결정되리라 생각한다. 즉 동양의 왕도와 서양의 패도 둘 중 하나가 세계 통일의 지도 원리가 될 수 있을지가 결정난다는 이야기다.
유구한 옛날부터 동방 도의의 도통을 전승받은 덴노가, 곧 동아연맹의 맹주, 그 다음으론 세계의 덴노로 추앙받는 일은 우리의 굳은 신앙이다." (같은책, 46~47쪽)
"서양 문명은 이미 패도로 일관하다 스스로 막다른 길에 몰리고 있다. 왕도 문명은 동아 각 민족의 자각 부흥과 서양 과학 문명의 섭취 활용을 통해, 일본 국체를 중심으로 발흥하는 중이다. 인류가 마음 속 깊이 현인신의 신앙을 대오각성하게 되면, 왕도 문명은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같은책, 85쪽)
"우리는 덴노를 신앙하고 마음으로 부터 황운을 보필하여 받드는 이가 모두 우리 동포이며 완전히 평등하게 덴노를 섬기고 받들리라 믿는다. 동아 연맹의 초기, 각 국가가 아직 덴노를 맹주로 우러러 받들지 못할 동안에는 일본만이 홀로 덴노를 모시고 있으니, 일본국은 연맹의 중추적 존재, 곧 지도 국가가 되어야 한다. (중략)
일본의 실력은 동아 모든 민족이 인정하는 바이다. 일본이 진심으로 덴노의 마음을 받들고, 겸양하면서 동아를 위해 앞장서서 최대의 희생을 치른다면 동아 각 국가로부터 지도자로 추앙받을 날이 의외로 급속하게 오리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러일전쟁 당시에 이미 아시아 나라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맹주'라 부르지 않았는가" (같은책, 89~90쪽)
어떻습니까? 황당하죠. 좋은 말로 포장을 하고 있지만 결국 천손강림신화에 기반한 유치한 천황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나 덴노이지 다른 민족에게 왜국 임금 따위가 뭐라고 숭배 씩이나 하겠습니까? 역시 보편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촌스럽고 폐쇄적인 일본 국수주의자 중의 하나일 뿐이죠.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신사참배와 천황숭배를 강요한 다른 국수주의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어느 나라나 국뻥은 있습니다. 영국인에게는 '백인의 짐' 같은 국뻥이 있었죠. 러시아는 제정 시절에 서유럽국가들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적 개혁에 반발한 국수주의자들이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내세워 국뻥을 들이켰죠. 서구는 타락했고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러시아 제국만이 세계를 구원할 의무가 있다 뭐 그런 헛소리인데, 이걸 뭐라고 지칭하는지는 까먹었습니다. 여하튼 나라마다 마약맞은 국수주의 헛소리는 있기 마련인데 일본인들에게는 천손강림신화에 기반한 천황숭배가 그것이죠. 예전에 모리 총리가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는 dog sound를 짖어댔는데 그게 이런 관념입니다. 가미카제 같은 것도 다 이런 관념입니다.
미국넘들은 그래도 '자유의 확대' 같은 국뻥이라도 보편성 있는 걸로 내세우니 어느 정도 먹히는 거라도 있죠. 왜놈 임금 따위가 뭐라고 참 나.......
어쨌든 참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세계최종전쟁론'
종교적 광기와 유치한 국수주의 사이에 가끔 번뜩이는 기묘한 통찰력의 결합. 실로 기묘한 책이었습니다. 흥미있으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얇아서 읽기 편합니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글에는 선추천!
깨알 같은 박정희.
만주국의 정통 후계자는 역시 3,4공화국과 유신정권의 한국...농담이었습니다.
오늘만 추천을 두 번 하게 하시는군요.
전쟁 이야기, 군인 이야기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데도 글이 잘 읽히네요.
그러고보니 저도 오늘 추천을 세 번 했는데, 두 번을 글쓴이에게 했네요.
평화운동가로 전업 ㅋ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국에 흥미 있으신 분들께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무지갯빛 트로츠키라는 만화도 추천합니다.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전혀 몰랐던 부분인데 신묘하네요 제국주의도 스펙트럼이 있었군요
저 책 내용에서
일본을 중국으로 바꾸면
불펜상주하는 영국 대문호가 주장하는 내용이네요
ㅋㅋ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동시대에 핵과 로켓을 실제로 개발하던 나라들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이시하라 간지가 엄청난 혜안 갖춘 인물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일본군 내에선 참 독특한 스타일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 없던것 같습니다
feat. 다카끼 마사오
이 책 읽어보고 싶은데 어쩐지 손이 안가서 미루고 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할게요.
얼간이 취급을 했다든지, "헌병대 외에 쓸데가 하나도 없는 계집 같은 놈"이라던가
앞에는 '~든지' 로 잘 써놓고, 왜 뒤에는 '~던가'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