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늙은 개 조이 이야기
1.
조이를 처음 만난건 2002년 여름 무렵.
조이를 처음 만난건 2002년 여름 무렵.
조이의 나이와 생일, 어디서태어났는지 그런건 아직도 알지 못한다.
조이를 처음 만났을 때, 조이는 비를 맞으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고 몇달을 밖에서 살았는지 털 뭉치에는 철조각부터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다 붙어있었으니까.
조이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주사를 몇 대 놓아주고 미용을 해 주니 얼마 되지 않아 제법 귀여운 말티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무렵 동네에는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습니다. 품종은 말티즈, 이름은 조이"라는 벽보가 붙어있었고, "조이야"라고 불렀을 때 그 아이는 그게 자기 이름으로 생각하고 있는듯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습니다"의 주인은 자신의 강아지를 찾았다고 했고, 어찌저찌 조이는 나와,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2.
순종 말티즈라고 하기에는 조금 덩치가 큰 아이였지만 희고 윤기나는 털 덕분에 조이는 정말 예쁜 강아지였다.
순종 말티즈라고 하기에는 조금 덩치가 큰 아이였지만 희고 윤기나는 털 덕분에 조이는 정말 예쁜 강아지였다.
그렇지만 오랜기간 유기견으로 살았던 때문인지, 사람(특히 성인 남성)을 보면 경계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은 꽤나 오래 고쳐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이는 약간의 자폐성향이 있었던 터라 사람들이 예뻐해주면 덩달아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가 아니라, 사실 약간은 고양이에 가까운 성격이 아니었나 싶다.
3.
조이가 오기 전부터 우리집에 있던 강아지 "깜씨"는 검은말티즈다. 정확히는 말티즈와 검은 푸들로 추정되고, 이 녀석의 출생 또한 기구한데 여기까지 쓰면 조이 이야기가 아니므로 패스.
조이가 오기 전부터 우리집에 있던 강아지 "깜씨"는 검은말티즈다. 정확히는 말티즈와 검은 푸들로 추정되고, 이 녀석의 출생 또한 기구한데 여기까지 쓰면 조이 이야기가 아니므로 패스.
조이(♀)는 깜씨(♂)와 한 집에 살면서 나름 괜찮은 파트너였던것 같다. 성격이 개구지고 사교적인 깜씨와 달리 조이는 시크하다가도 버럭하는 한 방이 있는 아이였는지라, 평소에는 깜씨가 조이를 괴롭히는 구도이다가도, 정말 맛있는 간식을 준다거나 조이가 기분이 안 좋을때는 깜씨를 한방에 깨갱하게 만들기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컷과 암컷 강아지가 함께 있다보니 깜씨는 고환을 절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이가 상상임신을 해서 끙끙대는 일도 있었고, 방에서 마운팅(;;)을 하는 모습에 당황하여 두 녀석을 힘으로 떼어 놓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강아지와 15년을 산다는건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아이와 함께 살았던 시간, 내 곁에서 존재해 준 생명체라는 사실, 나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약한 존재라는 사실, 그런것들로 인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큰 의미인것 같다.
굳이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가족".
조이와 나는 피를 나눈 적도 없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 적도 없지만 '가족'이라는 표현 이상으로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들이 그렇듯, 강아지를 '오랜 시간' 키워온 모든 이들이 그렇듯 조이는 나에게 있어 혈육 이상의 가족이다.
4.
나와 늙은개 조이. 이 글의 제목이다. 나의 늙은 개 조이가 아니라, 나와 늙은 개 조이.
나와 늙은개 조이. 이 글의 제목이다. 나의 늙은 개 조이가 아니라, 나와 늙은 개 조이.
조이는 단 한번도 나의 소유물인 적이 없었다. 조이는 조이의 삶을 살았다. 어느 집의 귀한 애완견으로 구매되었다가, 어떠한 이유에선지 그 집을 나와 유기견으로 살았고, 인생의 대부분은 우리집에서 깜씨와 더불어 반려견으로 살아왔다.
조이의 삶은 무척이나 파란만장했다. 글에 쓰지 못한 다양한 일들이 있었고, 죽다 살아난 적도 여러번. 그러한 삶의 족적을 지나다 보니 자신만의 곤조를 꼿꼿이 지키는 성깔있는 할매견으로 조이는 늙어갔다.
5.
지난 해 여름 깜씨가 죽었다.
지난 해 여름 깜씨가 죽었다.
몇 달 정도 배에 멍울이 뭉치고 쇳소리를 냈다. 병원에서는 열 네살 먹은 깜씨의 몸을 수술하는 것을 권하지 않았고, 전신마취 후 깨지 못할 아이를 무리하게 수술하기 보다는 평안하게 가족이 함께 보내기를 권했다.
어머니는 깜씨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평소 좋아하던 간식을 마음껏 주셨다. 어느날인가는 소고기를 주셨는데 깜씨는 정말 맛있게 소고기를 먹었다. 그 녀석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조이와 머리를 들이받고 싸우면서 게걸스럽게 소고기를 먹지 않았을까 싶다.
그게 깜씨의 마지막 날이었다. 깜씨는 그날 새벽경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이는 그날 새벽부터 다음날 낮, 어머니가 죽은 깜씨를 발견하기 전까지 깜씨의 곁에 둘이 있었다.
깜씨는 천에 돌돌 싸여져 집 뒤의 낮은 산에 묻혔다고 한다.
나는 죽은 깜씨를 본 적이 없고 깜씨를 묻는 것 역시 돕지 못했기에 깜씨가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 그 아이를 묻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날 새벽 잠에서 깨 화장실에서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울었던 기억만이 있다.
6.
다시 조이의 이야기.
다시 조이의 이야기.
조이는 깜씨가 죽었던 그 밤, 깜씨의 곁을 지켰던 유일한 가족이었다.
깜씨가 15살에 죽었고, 조이 역시 그와 비슷한 나이였으니 조이 역시 사람으로 치면 80살이 넘은 노인인 셈이다.
조이는 깜씨가 죽은 그 무렵부터 짖지 않는다.
조이는 그 이후로 급격하게 우울해졌지만 조이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예전에는 강아지 두마리가 함께 지냈지만 이제 조이는 혼자 남게 되었다.
간식을 두고 머리를 받으며 싸울 강아지도 없고, 장난을 거는 강아지도 없었고, 가끔씩 마운팅을 해대던 수컷 녀석도 없었다.
조이는 외로웠던것 같다. 하지만 취업과 결혼, 출산, 그리고 가족사가 바빠지면서 사람들은 홀로 남겨진 강아지에게 많은 관심을 주기 어려웠고 조이는 그렇게 늙어갔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갈아주고 밥을 새로 채워주고 똥을 치워주는 것, 일주일에 한번정도 목욕을 시켜주고 집 근처를 산책시켜주는 시간이 아마도 조이에게는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뭐 사실 조이가 실제로 어땠을까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7.
깜씨의 죽음 이후 조이는 급격하게 늙어갔고,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깜씨의 죽음 이후 조이는 급격하게 늙어갔고,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늙은 강아지에게서 보이는 한 장소만을 뱅뱅 도는 행동, 자신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행동이 나타났다.
이러한 행동은 점점 심해졌고, 안아주면 불안해하고 오히려 적으로 느끼고 할퀴기만 했고 어느 순간 '이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강아지의 치매를 늦출 수 있다는 영국산 약을 직구해서 매일 간식에 타서 먹이기도 했고 주말 산책 때는 아이가 익숙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려 애썼다.
예전에는 한달음에 뛰어서 지나다녔을 곳을 이제는 돌아올 무렵에는 걷지 못하는 노견을 품에 안고 돌아와야 한다는 점이 달라진 점이기도 했고.
8.
지금의 조이는 사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지금의 조이는 사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밥을 줘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어서 과식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물통에 코를 박고 잠을 자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그냥 있는 경우도 있다.
조이는 더 이상 '목적을 가지고' 걷지 않는다. 한 곳을 뱅뱅 돌면서 불안해하다가 다시 벽에 머리를 박고, 지치면 또아리를 틀고 잠이 들었다가.
이런 조이를 바라본 것이 이제 1년. 조이의 등은 이제 굽을 대로 굽었고, 윤기나고 부드러웠던 흰 털은 이제 푸석한 백발이 되었다.
9.
나와 늙은 개 조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와 늙은 개 조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뭔가 극적이고 행복한 결말을 쓰고 싶지만, 강아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의 '결말'은 '해피엔딩'이기 어렵다.
조이가 지금의 삶을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즐거움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것이 그 아이와의 마지막 의리가 아닐까 싶다.
나는 조이 덕분에 제법 많은 시간을 행복해 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배려와 사랑을 배웠고, 이유없는 애정을 배웠다.
조이는 나의 정서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긍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게 해 준 존재이고, 조이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몇몇 사람들 이상으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존재다.
강아지와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먼저 떠난 깜씨의 이야기도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조이와의 이야기 또한 아마 그럴 것이다. 많이 슬프고 많이 서운하고, 해주지 못한 것들이 자꾸만 생각나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인연이 그렇듯, 조이와 나의 이야기도 엔딩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본다. 나는 조이 덕분에 참 많은 순간을 행복해 했었고, 조이 또한 그랬기를 바래 본다.
파란만장했던 조이의 삶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기를 바래 본다.
조이와의 남은 삶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안다. 조이와의 이별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것도 안다. 아쉬움과 서러움이 남는 이별일 것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미안함을 지울수 없는 결말이라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2002년의 비오는 그날 너를 안고 병원으로 갔고, 그로 인해 너와 함께 15년을 살게 된 것과, 너를 가족으로 알게된 그 인연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충분히 행복했었고, 너에게서 충분하고도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까.
지금의 너는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너의 삶 또한 나로 인해 행복했기를 바래 본다.
'강아지와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라는 말이 공감이 가네요. 생을 뺀 "로병사"에 무슨 해피앤딩이 있을까요?
하지만 글에서 나온 것 처럼 함께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던 얼마 안되는 시간을 기억하며 친구에게 고마워하며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이
숨어있는 해피앤딩이 아닐까 싶어요. 완전한 해피앤딩은 영화나 소설에나 나오는 픽션일테니까요...
개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결국 언해피엔딩이겠지요.(헤어짐 자체도 남아있는 사람들한테는 슬픈일이고)
생명체는 늙어가면서 신체를 비롯한 모든게 하락세고, 정신도 약해지고 그런 상황이 우울해하는 건 어느 정도 예정된 길이거든요.
자연계였다면 무리 안에서 늙어 쇠약해지면 버림받는 일도 흔하고...
그런데 늙어서 그렇게 된다해도 그걸 가치판단하는 건 인간뿐이겠지요.
어쩌면 늙어서 쇠약해지고 병든다는 거까지 순리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늙어도 버림받지 않고 가족곁에서 사랑받으며 자연사로 떠날 수 있는 조이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결국 가치를 어떻게 두냐에 따라 해피냐 언해피냐...가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사실 죽는 순간보다 평생 어떻게 살았냐가 더 중요한 거 같기도 해요. 즐겁게 살다가도 마지막이 힘들었다고 불행한 인생(견생)이라고 하면 좋은 인생이었다고 할 인생도 별로 없을 거 같아서요. 아름다운 미인도 화려하게 성공했던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그게 과거가 되고 쇠약해진 노년만 남을 건데...슬프잖아요. 동물의 생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견생. 한 번 주인이 끝까지 키우는 게 15%정도밖에 안되는 현실 속에서..젊고 건강한 개도 안락사되는 현실에서 조이 유기견에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서 한 평생 살고 아마도 끝까지 그럴 거겠죠. 헤어짐은 슬픈게 당연하지만 ...
어..지금 글쓰고 있는데도 저조차 뭐라하는지도 모르겠고 횡설수설하고 있고, 잘 표현 못한 거 같은데요.
이별도 좋은 이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좋은 이별 이란 책이거든요. 상실을 애도하는 책인데...나중에 한 번 읽어보세요. 펫로스에도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저와 17년을 함께했던 이 아이도 이름이 조이였죠.
보고싶네요.
조이는 틀림없이 행복했을 거예요.
목이 막혀요. 울음 참느라 혼났네요. 많은 생각이 빙빙 돌지만 쓸 수 있는 게 없어요...
4묘집사입니다
저도 조만간 닥칠 이별을 글로 배워봅니다
처음부터 각오를 하고 키워도 결말은 언제나 같지요.
그리고 어떻게 준비를 해도 상상 이상으로 슬픈 결말 이지요.
어쩌겠습니까. 라이프사이클이 다른 두 생명체의 숙명인 것을...
그것마저도 감내해야 하는것이 산자의 몫인것을....
눈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