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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살인 다단계

사내는 꼭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그의 인생은 좋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업을 가졌다.
마음이 맞는 오랜 친구들도 있었고, 불타는 연애도 해봤다. 여행도 자주 다니고, 즐거운 취미도 많았다. 
웬만큼 해보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해봤지만 단 하나. 사람을 죽여보진 못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굴 죽이고 싶을 만한 원한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사람을 죽인 뒤에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떻게 바뀔지도 궁금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상상만 했었다. 한데, 우연히 묘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살인 다단계란 게 존재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자세한 정보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 가입하면 살인을 할 수 있다는 정보였다.
관심을 가진 사내가 끈질기게 알아보며 도착한 곳은, 어느 시장의 정육점이었다.

" 죽을 사람한테 고기나 푸짐하게 먹이고 싶습니다. "

사내가 암구호를 말하자마자, 정육 주인이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주소 하나를 적어주었다.
그 비밀스러운 행동 자체만으로도 사내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영화에서나 보는 상황 속에 자신이 들어간 기분.

사내가 찾아간 주소는 용산의 오피스텔 중 하나였다.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리고, 가면을 쓴 남자가 나왔다.
말없이 사내를 살피는 가면.
사내는 왠지 기가 죽는 것을 느끼며, 괜히 쪽지를 들어 보였다.

" 아..저.. 주소를 받고 도착했는데.. 그- "

가면은 사내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 지금 결정해야 합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
" 네? 아~ 그. 저...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를 좀- "
" 아뇨. "

고개를 흔든 가면이 단호하게 말했다.

" 가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한번 가입을 하면 절대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
" 아. "

사내는 잠깐 갈등했지만, 어차피 그럴 목적으로 찾아온 곳이었다.

" ...가입하겠습니다. "
" 환영합니다. 들어오시죠. "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가면을 벗고 문을 활짝 여는 남자. 나이가 꽤 많은 중년인이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원룸은 텅 비어, 의자 2개만이 마주 놓여있었다.
두 사람이 착석하자마자, 중년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 저희 살인 다단계는 3가지 등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브론즈, 실버, 골드. 방금 막 가입하신 회원님은 현재 브론즈 등급으로 활동하게 되십니다. "
" 네에.. "

중년인은 품에서 구릿빛 카드를 한 장 꺼내어 건넸다. 

" 회원증입니다. "
" 아 "

구석에 음각으로 작은 m자 하나만 새겨진 단순한 디자인의 카드였다. 
자부심 어린 얼굴로 설명하는 중년인.

" 쓸만할 겁니다. 저희 살인 다단계의 회원들은 사회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경찰, 병원장, 방송국 PD, 국장, 검사, 장군, 정보부, 국회의원...그리고 전직 대통령이었던 분까지. "
" 대, 대통령?! "

뜻밖의 규모에 눈이 커지는 사내! 이런 거대한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은 중년인이 자신의 금빛 회원증을 꺼냈다.

" 생활 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은근히 카드를 노출해보십시오.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사고를 치고 간 경찰서에서 회원의 도움으로 훈방조치만 받은 적이 있었고, 방이 꽉 찼던 휴가지 호텔에서도 따로 빈방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반값 할인 정도는 작은 일이고, 제 아들의 결혼식에선 월드 스타 '김남우'가 와서 축가를 불렀습니다. "
" 월드 스타 김남우요?! 와-! "

숨김없는 사내의 감탄에 빙긋 웃는 중년인.

"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희 회원들끼리는 깊은 유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본 사람과 죽여보지 못한 사람. "
" ... "
" 사람을 죽여본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인간의 삶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지... 회원님들은 대부분 사고관이 바뀌고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 여러 요직에서 충실히 자리하고 계신 회원님들이 그 증거죠. 평범한 일반인들과 눈을 뜬 사람들끼리의 차이. 아마 활동하다 보면 회원님도 알게 될 겁니다."
" 으음... "

놀라운 내용이었지만, 사내는 불안했다. 정말 흔한 다단계의 수법처럼 감탄스러운 내용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 그럼 회비나 뭐, 그런 돈이 얼마나 드는 겁니까...? "
" 없습니다. "
" 네?? "

자신 있게 고개를 흔드는 중년인.

" 저희 살인 다단계는 회원님들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 목적은 살인이지, 물건을 파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요직에 계신 분들이 가끔 자발적 기부를 해주시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완전 무료입니다. 사실 저도 돈 한 푼 내본 적 없습니다. "
" 아아-! 그렇습니까? "

사내의 얼굴이 밝아지고, 중년인은 푸근하게 웃었다. 

" 아시겠지만, 저희 살인 다단계는 절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
" 네?? "

살인을 하는데 나쁘지 않다? 사내의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었다.

" 등급마다 살인의 기회가 다릅니다. 간단히 말해서 브론즈 등급은, '사형수'들을 죽여볼 수 있습니다. "
" 아~아 사형수...! "
" 요직을 차지하고 계신 회원분들이 감사하게도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럼 브론즈 회원님들은 사형집행일에 참여하여, '버튼'을 눌러볼 수 있습니다. 상상해보시겠습니까? "

표정을 달리하며 그리듯 손짓하는 중년인.

" 유리문 너머로 겁에 질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통달한 표정일지도 모르지만, 그 깊은 곳에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죠. 저는 이 손가락 하나로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실제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버튼 한번 누르는 것만으로, 목을 매달고 버둥거리다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죠. "
" ... "
" 아십니까? 원래 교수형의 버튼은 3개가 준비되고, 3명의 사람이 동시에 누릅니다. 3개의 버튼 중에 진짜는 하나뿐인데, 누가 사형수를 죽였는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혼자서 3개의 버튼을 다 누르죠. 처음 버튼을 누를 때의 떨림을 아실까요? 정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누릅니다. 그래서 만약 가짜를 누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분명 상대를 죽이기 위해 버튼을 누르는 건데도, 그가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음이든, 그다음이든 버튼을 눌러 결국 그를 죽이지만 말입니다. 해보시면 아시겠지만..정말 신비롭고 놀라운 경험입니다 살인은. "

중년인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내. 자신도 어서 경험해보고 싶은 걸 숨길 수 없었다.
한데,

" 그러나 안타깝게도...현재 브론즈 등급의 살인은 어렵습니다. "
" 네?? "
"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형이 1997년에 이루어졌던 것을 아시죠? 그래서 그 이후 가입하신 브론즈 계급 분들은 살인을 해보지 못하고 계십니다. "
" 네에?! 아니 무슨...! "

크게 실망하는 사내. 이렇게 장황한 설명 끝에 하는 말이, 살인을 할 수 없다고? 허탈했다.

" 그럼 사형이 금지된 그동안에는 살인도 없고, 이름만 살인 다단계였단 말입니까?! "
" 아니요. 실버 등급이 있습니다. "
" 아! 실버...! "

다시 눈이 반짝이는 사내.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 실버 등급은, '자살자'를 죽여볼 수 있습니다. "
" 자살자요? "
" 예. 실제 자살 직전인 사람을 섭외해서 저희가 대신 죽여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저희는 절대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 아아.. "
" 물론 자살자에게 소정의 보상을 드립니다. 가족이 없다면 장례를 책임져드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남기고 싶다면 저희가 얼마간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체험이 있다면 이뤄주기도 하고, 죽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하지요. "
" 아아... "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음흉해지는 중년인.

" 결정적으로, 실버 등급은 '손맛'이 다릅니다. "
" 손맛이요? "
" 브론즈야 그냥 버튼을 누르는 식이었지만...실버 등급은 좀 더 직접적인 살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직접 밧줄을 감아 당길 수도 있고, 총으로 쏠 수도 있습니다. 칼이나 도끼, 그리고 조금 거부감이 드는 얘기이겠지만...전기톱을 애용하는 유명한 회원님도 계십니다. "
" 헐.. "
" 물론, 자살자분의 동의를 얻었을 경우에만 말입니다. 큰 도움을 받으신 분들은 거의 허락하시기는 하는데.. 아닐 경우에는 그냥 최대한 편안하게 죽여드리죠. 그 경우에도 그 손맛은 브론즈와 비교가 안 됩니다. 버튼을 눌러 죽이는 것과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 그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
" 예, 예..! "

사내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사실, 교수형보다는 이쪽이 그가 상상해왔던 살인이었다.

" 그럼, 실버 등급은 어떻게 올라갈 수 있습니까...? "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중년인. 곧,

" 자살자를 세 분 섭외하시면 됩니다. "
" 네에?! "
" 저희는 '살인 다단계'입니다. "
" 아...! "

사내는 놀랐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래서 살인 다단계였구나!

"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우리나라는 자살 1위 국가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세 등급 중에 실버 등급이 가장 많으니까 말입니다. "

중년인의 말에도 사내의 인상은 어두웠다. 
그냥 버튼을 눌러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 차려진 무대에서 사람만 죽이는 것은 좋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 자살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어달라고 부탁하고 다닌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고민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기본적으로 1년에 1명씩 자살자를 구해와야 합니다. "
" 예?! "
" 회원 규칙입니다. 그래야 조직이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
"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게 있었으면 미리 말해줬어야 할 것 아닙니까?! "
" 미리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인입니다 살인. "
" 아..으...! "
" 사람을 죽여보고 싶은 거라면, 그만한 각오는 하고 가입하셨어야죠. "

사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 섣불리 가입한 자신의 판단이 후회됐다.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딱 3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탈퇴 불가능, 비밀 엄수, 1년에 1명 자살자 섭외하기. "
" 으... "
" 그럼 전 이만!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

중년인이 가볍게 묵례하고 사내를 지나쳐갔다.
다급해진 사내가 급히 돌아보며 물었다!

" 자, 잠깐만! 3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우뚝 멈춰선 중년인은, 뒤돌아 빙긋 웃었다.


" 마지막 골드 등급은 누구를 죽여볼 수 있을까요? "

" !! "

중년인의 미소는 사내를 소름 끼치게 했다.

" 저희는 절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희가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죽을 사형수, 자살자, 그리고 저희 살인 다단계 회원들뿐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아요. "

댓글
  • 질풍의라빈 2017/05/12 18:20

    김남우가 월드스타라니! ㅋㅋ
    잘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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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7/05/12 18:25

    항상 남겨주시는 댓글 참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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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동이 2017/05/12 19:10

    언제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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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arkssang 2017/05/12 19:41

    오랜만에 복날님 플필을 누르니 글이 엄청 쌓였군요.. ㅎ  석달 열흘 봐도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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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뜻발그미 2017/05/12 19:58

    자살자 늘릴려고 정치를 개판으로 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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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머스의눈 2017/05/12 20:30

    이야 아이디어 뱅크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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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삿일 2017/05/12 21:40

    역시 복날님 이야기는 참신하고 재미나요 ㅋㅋ
    글을 읽고 나서 이제는 보너스 트랙도 혹 있을까 기다려지네요.
    이번 글에서는 '자살 경매', '자살자 품귀 현상' 이런 소재는 어떨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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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ebwbxksk 2017/05/13 02:00

    오!!!!!!!!!
    재밌었어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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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햄슽어 2017/05/13 03:09

    크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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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묻어가자 2017/05/13 06:25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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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나다라 2017/05/13 11:29

    복날님~~계속 찾아서 보고 있어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계속 읽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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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늑대 2017/05/13 14:26

    크 역시...재밌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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