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면접에서 또 떨어졌다. 가을이 도착하고 겨울이 출발하려는 이 무렵까지 면접에서 4번 서류에서 10번 떨어졌다. 대학원만 졸업하면 어떻게든 취직하지 않을까 하던 막연한 희망과, 사주에서 올해는 지원하면 취직할거라던 말에 기대했는데, 미신같은걸 잘 믿지 않는 냉철한 infp 이공계 박사인 내가 처음 예상한 것처럼 전부 빗나갔다. 아니 근데 지원하면 취직한다는건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닌가? 지원을 해야 붙지. 암튼 차라리 서류에서 떨어지는건 괜찮다. 면접에서 떨어지는건 더럽게 아프다. 원래 높은곳에서 떨어지는 물체가 심각하게 박살나는 법이다.
2.
생각해보면 여태 막연한 희망에 기대어 살아왔다. 고등학교땐 어떻게든 대학가겠지, 대학에선 어떻게든 대학원 가겠지, 대학원도 뭐 졸업하겠지 하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왔다. 이젠 어떻게 되지 않는다. 막연한 희망의 바탕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자랑이지만 고등학교땐 학교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었고, 공부도 좋아했고 성적도 나왔다. 대학에서도 그랬다. 나름 좋은 서울권 대학도 붙었고 성적도 좋았고 동아리도 이끌어 봤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군대도 다녀온놈이뭘 더 하겠다고 대학원을 쳐가는지 취직이나 할 것이지. 혹시나 대학원에 갈 생각이 있는놈들은 가지 마라. 돈과 시간이남아돌아서 할게 없고 연구는 하고싶으면 그때 대학원 가지마. 그시간에 차라리 다른걸 해.
3.
근데 사실 이건 돌이켜보면 내 의지가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전부 내가 하고싶어서 한거라기보단 해야해서 한 것들이다. 학생은 공부해야 하니까. 다들 동아리활동을 하니까. 동아리는 누군가 이끌어야 하는데 아무도 지원하지않으니까. 취직하기엔 전문성이 조금 모자란 것 같으니까. 연구는 해야하니까. 졸업은 해야하니까. 내가 하고싶어서 한게뭐가 있었지? 아니 근데 이제 졸업도 했고 취직도 해야하는데 왜 못하지?
4.
좋아하는것들도 생각해보면 누군가 이유가 있었다. 중학교 옆자리 애가 라노벨 보길래 따라서 봤고. 친해지니까 애니도자연스럽게 보고. 일본 여행도 옆에서 누가 가자해서 가고. 성우도 누가 괜찮다 해서 쳐다보고. 내가 스스로 좋아한게 있었나 싶다. 난 혹시 npc가 아닐까. 주어진 명령어만 수행하고 남는 시간엔 옆에 개체가 하는걸 따라하는 행동방식이 들어가 있는거지. 내 의지같은건 원래 없던거야.
5.
꿈같은건 없었냐고? 진짜진짜 어릴땐 우주비행사가 되고싶었다. 개멋있잖아. 근데 알고보니 우리나라는 우주비행사 되는게 거의 불가능 하더라. 여기서 사람들이 두종류로 나뉘는데, 그래도 끝까지 자기가 하고싶은거 하는 사람들이랑, 현실에타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난 보면 어느쪽인지 알겠지.
6.
타협해서 우주랑 관련된거 해보고 싶어서 이공계로 갔다. 물론 글쓰는거 오지게 싫어해서 간것도 있다. 일기 쓰는거 너무싫어. 수학은 문제만 풀고 답만 딱 쓰면 되잖아 얼마나 좋아. 근데 이공계 대학원 오니까 내가 글 제일 많이 쓰더라. 젠장. 한국은 직업교육을 좀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근데 생각보다 우주 관련으로 갈 대학도 마땅히 없었고 나는 화학을 잘했으니까 또 타협해서 화공 갔다.
7.
뭐 잘 안되도 전화기의 화 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하는거도 있었지. 근데 전이랑 기는 몰라도 화는 노답인거 같다 이젠. 하필 또 신소재를 해가지고. 새로운 소재는 아무도 안해서 새로운거고 아무도 안하는건 기업도 안한다. 세상은 너무많이 변했다. 요즘 사람 뽑는건 ABC다 A.I. Battery Cheonjae. 좀 그럴듯 하지? 이거 생각하고 좀 뿌듯했음. 암튼 인공지능이랑 배터리 말곤 각분야 천재들만 어떻게든 취직하더라. 실적도 실력도 전공도 애매한 나는 이제 30중반을 바라보려하는 취직 못한 포닥 (aka 늙은 대학원생)이 되었다.
8.
암튼 취직 못하다 보니 사람이 점점 꼬여간다. 다른 사람들의 친절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남의 성공을 질투하게 된다. 배터리 연구하던 후배가 졸업도 전에 취직하는게 부럽다. 잘 안됐단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 다음에 더 좋은 기회 있을거란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다. 한국에서 S계열사 L계열사 보다 좋은 기회가 어딨냐. 헛소리 말고 그냥 힘내란 소리만 하면 좋겠다.
9.
그러다보니 평범한 대화도 못하겠다. 고등학교 동창놈들 그지같이 사는데 재난지원금 못받는다고 징징대는데, 니가 주식을 하고 대출끼고 집을 사니까 그지같이 살지 멍청아. 지가 돈많고 지가 선택한거가지고 왜 취직못한 늙은대학원생 앞에서 헛소린지. 자랑인가? 자랑 맞는거 같다. 나도 자랑 아니냐고? 대학원 가고 박사 딴거 니 선택 아니냐고? 자랑 맞다. 근데 학위는 앞에거랑 다르게 자랑하는거 말곤 쓸데가 없다. 봐줘.
10.
암튼 그렇다. 쉽지 않다 인생은. 내가 뭘 하고싶은지 모르겠다는걸 알겠다. 생각해보면 쓸모있는 할줄아는것도 없다. 그러니까 취직이 안되지. 기업 인사시스템은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쓸모없는 날 잘 거르고 있다. 차라리 하고싶은거라도 해볼걸. 만약 천체물리를 했다면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그런 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협할게 뻔하니까. 난 첫째고 돈은벌어야한다. 그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원때 용기는 내봤다. 타과지만 천체물리 수업 들어보겠다고 신청 했거든. 근데 들어가니까 교수가 타과가 왜들어와있냐고 헛짓하지말고 나가라더라. 헛짓 맞다. 화공이 그거 들어서 뭐하냐. 그시간에 연구하는게 낫지. 근데 그게 내 마지막 꿈이었어.
11.
그래도 어쩌겠어 또 지원 해야지. 또 떨어지고 박살 나야지. 뭘하고싶은지 몰라도 뭐든 해야지 먹고 살지. 그냥. 그냥 징징대고 싶었어. 징징댈 대도 더이상 없다. 혹시 글읽다가 누가 떠오르면 그사람이 글 쓴거 아니다. 구라가 많이 섞였으니까암튼 그사람 아님. 불특정 다수한텐 속내를 보여도 아는사람이 내 속을 아는건 좀 많이 부끄러워.
12.
이런 똥글을 다 읽다니 정말 대단하고 고맙다. 그래도 이런걸 쓰는 이유는 똥싸고 나면 개운한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과 고민을 배설하고 개운해지고 싶었어. 태풍 지나고나면 추석이 지나고나면 좀 추워지겠지. 잉여인간인 나는 차라리 장작이라도 되면 좋겠다. 따뜻하게 하는 쓸모라도 있지. 그러니까 장작탭이야. 이런 고민하는게 나뿐이면 좋겠다.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냥.
원래 사람이 좀 몰리면 시야가 좁아짐
JUNIEL♥ 2021/09/17 08:05
어디든 취업 가능 할 거야
키야호 2021/09/17 08:07
원래 사람이 좀 몰리면 시야가 좁아짐
시뻘갱이 2021/09/17 08:08
마음이 아파
나도 이럴거 같아서...
꾸웨에엑 2021/09/17 08:11
반도체 쪽 지원해보지 그랴.
bosenova 2021/09/17 08:13
근데 박사까지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금수저라는 얘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