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인공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인
로사라오 리바티노(Rosario Livatino).
1952년 10월 3일 시칠리아섬 카니카티에서 태어난 리바티노는
1971년 팔레르모 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1975년 졸업한 뒤
1977년부터 1년간 아그리겐토 등기소 부국장을 거쳐
1978년 칼타니세타 법원의 치안판사
(우리나라의 검사처럼 수사와 기소를 담당하지만 소속은 법원인 판사)
로 임용되었다.
이후 27세가 된 1979년부터
부심판사로 보직을 옮기기까지 10년 동안
뇌물범죄 등 부정부패 사건, 마피아 범죄 등을 맡아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고 부당이익을 몰수하는 등
시칠리아 마피아 및 이들과 유착된 시칠리아 정계와 재계를 조준했다.
마피아들은 다른 공직자들을 매수했듯이
리바티노도 구워삶아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출근할 때마다 성당에 잠시 들러 기도를 바치고
종이에 문서를 작성한 후 서명할 때 STD,
'하느님의 보호 아래'를 의미하는 라틴어
'Sub tutela Dei'의 약자를 적는 등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리바티노는 마피아의 포섭에 응하지 않았다.
회유가 통하지 않자 마피아는 신변을 위협했지만
리바티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마피아는 암살자를 고용해 살인을 사주한다.
1990년 9월 21일,
당시 상황을 목격한 피에트로 나바의 증언에 따르면
경호 인력 없이 법원으로 출근하던 리바티노가
고속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마피아가 보낸 암살자 4명이 고의적으로 차를 충돌시켜
교통사고를 일으킨 후 총을 쐈다.
리바티노는 차에서 내려 고속도로 옆 들판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여서 얼마 가지 못하고
금방 암살자들에게 따라잡혔다.
그렇게 리바티노는 마피아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판사나 검사들이 마피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1971년 이후로 리바티노가 8번째였고
백주대낮에 치안판사를 쏴죽일 정도로
마피아의 영향력이 시칠리아에서 매우 컸기 때문에
리파티노가 피살되는 걸 목격한 피에트로 나바는
경찰에게 위 증언을 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가족과 함께 다른 곳으로 몇 차례 이사하다가
해외로 이민가기까지 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리바티노의 동료들은
마피아 범죄 수사 최전선에 있는 치안판사들이
제대로 된 경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며 정부를 성토했다.
정의 실현을 위해 마피아와 맞서 싸우다 피살된
미혼의 젊은 치안판사를 추모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1993년 5월 9일 아그리겐토를 사목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리바티노의 부모와 만난 자리에서
리바티노를 '정의와 신앙의 순교자'라고 언급했지만
교회 차원에서 '순교자'로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아그리겐토 주교 카르멜로 페라로는
리바티노의 스승이었던 이다 아바테 교수의 의뢰를 받아
시복시성에 필요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해
1995년 교황청 시성성에 리바티노의 시성 청원서를 접수하면서
시성 절차 중 첫 번째 단계인 '하느님의 종'이 되었고,
25년이 지난 2020년 12월 21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리바티노의 죽음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로 인정해
시성 절차 중 두 번째 단계인 '가경자'가 되었다.
세 번째 단계인 '복자'와 네 번째 단계인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대상자에 의한 기적이 일어났음을 각각 공인받아야 하는데
순교자의 경우 순교를 기적으로 간주하여
두 차례의 기적 심사 중 한 번이 면제된다.
그리고 2021년 5월 9일 어제,
교황청 시성성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이
교황을 대리해 집전한 리바티노의 시복식이
아그리겐토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28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목방문했던 날에 맞춰 거행된 이번 시복식에는
리바티노가 피살 당시 입었던 혈흔이 얼룩진 셔츠가
성유물로 모셔져 사제의 축복을 받았다.
복자 로사리오 리바티노의 축일은 10월 29일이며
성화로 묘사될 때는
법조인을 상징하는 형법전(Codice Penale)과 법복,
신앙심을 상징하는 복음서(Vangelo)와 STD가 적힌 종이,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가 함께 그려진다.
타케나카 한베 2021/05/10 13:08
진정한 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