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이 잦아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고 있을 뿐인데 추억에 잠기는 일들이 더 많아졌다.
옛 기억들은 마치 눈과 같다. 내리던 눈이 아름다운 것과 별개로 퇴근하는 길을 걱정하는 것처럼. 좋았던 추억들과 별개로 바꿀 수 없었던 일들을 후회한다. 새하얗게 쌓인 눈이 아름다운 것과 상관없이 눈 녹은 길거리가 지저분해지는 것처럼. 행복했던 기억들과 상관없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쳇.
[우리 회사 앞으로 좀 와 줄 수 있어?]
[지금이 몇 신지 알아?]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알았으니까. 또 기다리게 하지 마!]
그녀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그녀가 무척 힘들거나 했던 날마다 나를 찾았다. 그녀가 약속시간에 늦지만 않는다면 좋았을 것이다.
[도착했어?]
[아! 왜 안 와? 약속 시간 좀 지켜!]
항상 늦었다. 먼저 나오는 법은 절대로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아는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하는 게 싫었다는 걸 몰랐다. 그녀가 그저 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를 기다리느냐’ ‘누구랑 만나느냐’ 하는 등등의 질문들을 받는 게 싫었다는 걸 몰랐다.
대학생 남자친구랑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게 불편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 이유들을 내게 설명하기 어려웠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녀가 힘들었던 날에는 함께 술을 마셨다. 우린 만날 때마다 관계를 가졌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왜 힘든지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내게 말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에이~ 그건 그래도 네가 잘못한 거 같은데? 그 사람이 너한테만 그런다며? 그럼 네가 방법을 바꿔야지. 상사를 바꿀 수는 없잖아.”
“야. 뭘 잘못했어야 바꾸지. 그냥 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하직원들 편 가르기나 하는 게 정상이냐?”
“아니. 내 생각에는 어느 한쪽에만 문제가 있어서 트러블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 손바닥 한쪽으로 박수를 칠 수 있냐?”
“뺨은 때릴 수 있지.”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내가 너무 아는 척을 했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척 굴었다. 사실은 직장인 여자친구 앞에서 자존심만 세우려는 것이었다.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도 직장생활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난 그냥 뭣도 모르는 등/신이었다.
그저 그녀를 만나서 관계를 갖는 게 좋았다.
그녀가 무척 힘들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동성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불렀다. 이미 많이 취해 있었고 난 그런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대신 바로 모텔에 가게 될 줄 알았다.
“하아. 나 오늘 진짜 힘든데”
“내가 안아줄게”
그날부터 점점 멀어졌다. 그녀의 연락이 줄어들었고 나도 졸업을 준비하면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대신 그녀가 약속시간을 잘 지키기 시작했다.
이맘때였던 것 같다. 그녀가 내 취직을 축하해줬다. 눈이 녹으며 지저분해진 거리를 함께 걷다가 그녀가 말했다.
“이제 우리 더 만나기 힘들어지겠다.”
“그런가?”
한동안 연락을 받지 않던 그녀가 이제 연락을 그만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달리고 그럴 정도의 여력이 없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직장에 적응하는 일이 군대보다 힘들었다.
이별의 고통도 별로 없었고 그리움도 많지 않았다.
그저 좀 힘들었던 날이면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가 했던 말들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되었고 미안했다.
힘들었다. 출근하는 게 두려울 정도로 힘든 나날들이 계속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주말이 찾아왔고 또 다른 한주가 시작되었다.
그 날도 엄청 피곤했던 날이었다. 또 한주를 버텨낸 내게 상을 주고 싶었다. 모처럼 근사한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괜찮은 식당이었지만 나 말고도 혼자 술과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를 만났다.
이제 막 내 음식이 나왔는데 그녀가 식당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였다. 언젠가 그녀의 휴대폰 속 사진들로 봤던 그녀의 부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던 것 같다.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시선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는 노력을 하느라 꽤나 곤욕을 치렀다.
난 별로 먹지도 못하고 일어났다. 시켜놓은 술은 절반도 마시지 못했다. 내가 일어날 무렵 식당에 들어온 남자가 그녀의 가족들과 합석했다. 그는 절대로 그녀의 가족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족에게 소개할 정도의 남자가 있다는 사실보다. 맛있는 음식을 남긴 게 아쉬웠다. 그 정도로 그 식당은 괜찮았고 이미 그녀는 내게서 희미해져 있었다.
다음날 나도 우리 부모님들을 모시고 그 식당으로 향했다. 내겐 아직 부모님에게 소개할 여자가 있진 않았지만 좋은 음식을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 식당에서 그녀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어제처럼 시선을 피하려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나처럼 술을 남기지 않았다. 남은 술을 술잔대신 물 컵에 따라 마시고 일어났다.
그날 그녀를 따라 나갔으면 어땠을지 가끔 후회한다. 아니 생각한다.
끝.
북풍님 오랜만에 글 쓰시네요
북풍님의 필력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여운이...
북풍은 선추천 후감상
크..감상후 추천. 잘읽고갑니다
추천하려고 로그인~~!!
북풍님 여전히 흡입력이 좋은 글을 쓰시네요~
아련한 기억 ㅠ
옛생각이나서 찡하네요
싸이- 어땠을까 노래가 생각나네요. 잘 감상했습니다.
글을 참 잘 쓰네요.
장면이 선하게 그려지고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요.
오랫만이십니다~
크....
표현력이 대단하시네요
역시... 기다리고있었습니다. 북풍님^^
와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옛 생각이 나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보구 갑니다^^
북풍님 오랜만에 글 보니 좋네요..
찐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일들처럼 느껴져 글이 더 흡입력있게 다가옵니다 옛생각 많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뭐지...수많은 미디어들의 범람속에서 살지만 이런 정서는 느끼기 힘들었는데...노스윈드님 감사합니다.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언제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ㅜㅜ
북풍님 글 읽을때마다
저는 도입부분이 너무 좋아요.
어떤 공간을 묘사하거나
어떤 감정을 표현하거나...
오랫만에 보는 글이라 넘 반갑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