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그저 감각과 저장된 기억에 의존하는 기계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단독적인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사후세계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집니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 이상의 것이면서도 그것에 관여치 않고 그것을 포용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정의한다고 볼 때 비로소 사후세계는 의미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식의 독립적 실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분분할 수 있고,
심지어 초의식적 현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과학적 검증을 하면 불분명한 증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를 뿐이니 일단 논외로 하고...
의식의 독립성을 가정할 때, 죽음 이후 TV 화면이 꺼지듯이 의식 역시 중지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TV채널로 바뀌듯이 의식에 담기는 내용만 달라질 뿐
의식은 연속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일단 의식을 육체에 수반된 현상이 아닌 그 어떤 무엇으로 가정하는 한
의식의 중단을 설정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중슬릿 실험에서도 언급하다시피 관측자의 존재로 인해 빛은 파동이 아닌 입자로 성격을 달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단히 작고 섬세하다고 여겨지는 의식의 차원에서도
무엇인가를 갈망하거나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거나 하는
생전의 관측자의 영향이 잔류하는 한 파동이 아니라 입자로 실재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즉, 임종하는 순간의 '안타까움'이나 '걱정'과 같은 감정은 강력한 관측자의 존재로 상정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의식이 파동화되어 검은 TV화면처럼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입자화되어 다른 TV화면에 접속된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의식이 완전한 '무'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계속적으로 의식에 뭔가가 재생되고,
이는 환생이든, 윤회이든, 사후세계이든 간에
단지 죽음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 이후의 '잔류 세계'를 가능케 한다는 겁니다.
잔류하는 감정으로 인해 반복되는 잔류세계.
그것이 일단 사후세계로 이름붙여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현실에서의 존재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신경망 속에 남은 전기적 신호들이 잔류 에너지로 활동하면서
그 잔류하는 것들이 무수한 환상을 그려내고
그것이 사후세계로 인식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잔류에너지라는 것이 아주 극도로 낮은 에너지 수준으로도
의식의 존재를 가능케할 수 있다면
죽어서 시체가 썩어 사라져도 대기 중에 남은 극소량의 에너지만으로도
의식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인간들과의 연결은 끊어지는 것이겠지만,
아주 특이한 감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포착되어
'무의식'이니 '조상신'이니 '혼령'이니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여간 의식이라는 것의 실재를 가정할 경우
의식을 '무'로 되돌리지 못하는 한 극소량의 에너지에도 반응하는 의식체를 상정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무수한 사후세계 내지는 잔류세계를 가정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가정은 인간의 '탄생'을 보다 심각한 현상으로 확장하여 바라보도록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죽은 이후의 사후세계가 있을까 없을까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나'는 어떤 누군가의 잔류사념으로 인해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1회차로 최초로 생겨난 생명체인가 하는 의문말입니다.
따라서 사후세계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카르마 내지 윤회의 문제와 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카르마의 문제가 제기되게 되면,
과연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인가부터 의문을 갖게 되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이후까지 온갖 사념들에 속박되어 있고,
살아서는 갖가지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 고통이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상을 지닌 생명체에 공통되며,
따라서 이 우주에 절망하게 된다고 친다면...
어떤 공포와 불안에도 굴하지 않고 문득 솟아나는
내면으로부터의 진실되고 굳건한 마음,
모든 윤회전생과 잔류세계를 파괴하고
단 하나의 진짜를 드러내는 그런
궁극적인 '나' 에 대한 열망이
필요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