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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말고 이 사람이 되었어야 ㄷㄷㄷㄷㄷ
서재필
전남 보성출생(당시 아버지가 보성군수)
미군정 당시 미군정 최고정무관으로 있었고
미국이 한국 초대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인물
이승만하고 비교해서 경력이나 인물의 격으로서 하늘과 땅 차이
18살에 과거급제하고
갑신정변때 겨우 20살의 나이로 지금의 육군참모총장인 병조참판이 되어
청년 사관생도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며 고종을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기는 역할 함
(저렇게 앳된 얼굴로 고종을 호위하며 군사를 이끌었음, 사진은 23살때 미국에서 찍은 사진)
이때 군사 경력으로 이후 미군에서 복무하게 됨(아마 한국출신으로서 첫 미군입대자가 아닌가 싶음)
갑신정변 실패로 역적이 되어 홀로 일본으로 도피했는데
이 때 부모형제를 포함해 친가 외가 가족들이 고종의 명에 의해 역적의 가족이라 몰살당하고
2살난 서재필 자식은 가족들이 다 죽어 혼자 방치되었다가 굶어 죽었음(세간의 이야기로는 서재필 부인이 음독자살했는데 죽은 어미의 젖을 먹고 독약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일본에서 냉대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하여 미국국적 얻어 필립재이슨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함
(이후 죽을때까지 스스로를 서재필이라 하지 않고 항상 필립 재이슨이라고 함)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역적 사면령이 내려져서 조선정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귀국했고
독립신문 만들고 만민공동회 조직하여 외세 반대 운동 지원하다가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조정내 보수 대신들의 추방운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음
이 때 미국으로 돌아가는 서재필에게 가지말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때 서재필이 '너희 나라'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니 돌아가는 거다라고 말함
(갑신정변때 가족 몰살한 마음의 상처랑, 오라해놓고 이제는 추방시키니 열받을 만도함. 망명 이후엔 자기 조국은 미국이라고 생각한듯)
이후 일제 침략시기 미국에서 안창호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주장을 미국정부나 국회의원 들에게 소개하며 도움을 주는 등
미국내 지한파로서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줬음
조선 광복 후 미국에 의해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었고
미국은 한국 민주정부 수립 후 서재필을 한국 초대대통령으로 앉히려고 했으나
서재필은 자신으로 인해 한국에서 정치분열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다고 거절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
미군정청 끝나고 민주정부가 세워지자 미국으로 귀국했고
한국에 6.25가 일어난 것을 보고 탄식하다 1951년에 사망함.
서재필 일대기 보면 볼수록 이승만 말고 서재필이 되었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항상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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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실패로 역적이 되어 홀로 일본으로 도피했는데
이 때 부모형제를 포함해 친가 외가 가족들이 고종의 명에 의해 역적의 가족이라 몰살당하고
2살난 서재필 자식은 가족들이 다 죽어 혼자 방치되었다가 굶어 죽었음(세간의 이야기로는 서재필 부인이 음독자살했는데 죽은 어미의 젖을 먹고 독약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고종 이새낀 진짜 잘한 일이 뭘까요
갑신정변은 일종의 쿠테타 인데...
쿠테타 가담자의 가족을 정리하는건 일반적인 처리죠.. 그건 고종말고 누가와도.. 마찬가지 아닐까해요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눈이 조금만 더 틔여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죠...ㅠㅠ
갑신정변은 진짜 문제가 많은 쿠데타여 가지고 일본 공사관 사주 받아서 일으킨 쿠데타고 이것 때문에 엄청 많은 문제가 뒤따르게 되죠...
조선 망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건 중 하나죠... ㄷㄷㄷㄷ
고종이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기용했던 관료들 역적으로 몰아붙여 죽인게 한두번이 아니에요. 김홍집에게도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제발 총리해달라고 부탁해서 김홍집이 어쩔수 없이 수락했는데 아관파천 이후에 어명 내려서 역적으로 지목하여 죽여버렸죠.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서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죠.
역사의 만약은 없죠
서재필이 이런 인물인줄 몰랐네요
서재필=친일파
초기 개혁파는 모두 친일파. 당시 중국에서도 개혁파는 친일파. 중국의 아버지 쑨원도 처음엔 친일파였음.
네, 대한민국 노예 해방도 일본 입김이였죠.
김구 주석께서...
이승만은 그냥 미군정에 ㄸㄲ 잘 빨아줘서...
김구는 중국인에 300명 병력 보유. 일본과 전투한 적 없음.
일본이 중국 해안가 점령하자 중국 내륙으로 도망감.
서재필은 1863년 논산 출신이다.
서재필이 1864년 11월생이라고 한 최근의 보도는 잘못이다. 그는 음력 1863년 11월 28일생, 양력으로는 1864년 1월7일생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최근 그의 생가라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전남 보성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물론 그의 어머니인 성주 이씨가 친정에 가서 그를 낳았으므로 보성이 그의 생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일곱살 때까지 성장했다고 하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서울로 가기까지 성장한 곳은 논산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첫 부인 광산 김씨의 묘소가 있는 곳도 논산이다.
서재필은 1890년 이후 자신을 서재필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3분의 1도 안 되는 26년 간에 불과하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 된 것은 1890년 6월이었으며, 그후 그는 자기를 서재필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시민권을 얻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법원에서 행한 선서에서 ‘이후 조선국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였던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가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1893년 가을이었으며, 1894년 6월에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하였다. 1893년 8월14일 워싱턴으로 서재필을 방문했던 윤치호는, 그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일본이 조선 정부에 권고하여 추진하였던 갑신정변 망명자 귀환 사업에 호응하지 않았던 이는 서재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25일에 귀국하였다. 물론 그의 여권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고 이름 역시 필립 제이슨이었다.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
서재필은 박사가 아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이다.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안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대학에 등록하였다.
그는 3년 후인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년 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때부터 닥터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닥터는 박사가 아니라 의사라는 뜻이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의 개인 업적이 아니다
실제로 먼저 신문 발간 구상을 한 것은 유길준을 비롯한 김홍집 정권이었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권은 무너졌으나 새로 등장한 박정양 이완용 정권은 친미파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미국인인 서재필은 신문 발간 작업을 오히려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에 필요한 모든 비용과 편의를 아낌없이 배려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 발간은 개혁파 관료들의 개혁 이념을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 정부가 추진한 것이었고, 서재필은 이를 맡은 실무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문 건립과 관련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은문은 그가 헌 것이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 당시 헐려 있었던 상태였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여야 정확하다. 서재필은 자서전 등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자기가 출자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왕실은 물론이고 각계 각층의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는 것이 당시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서재필은 추방된 것이 아니었다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서재필이 고국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을 추방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점은 그가 ‘나를 추방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뿐이며 미국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The Independent》1898. 1. 22)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추방이 아니라 자진 귀환일 뿐이다. 이는 그가 돈을 받고 난 다음 ‘만일 봉급을 2배로 올려준다면 남아 있을 생각도 있다’(《윤치호 일기》1898. 4. 22)고 말한 기록에도 확인된다.
서재필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느라 무일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아닌 문방구상인, 인쇄업자로 변신하였다. 1904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자리를 옮겼으며 1914년부터는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상회(Phllip Jaisohn & Company)를 세워 1924년까지 운영하였다. 물론 이 사업에 들어간 자금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돈이었다. 한때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본점을 두고 두 곳에 분점을 운영할 만큼 번창하였다고 한다.
서재필은 조국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월신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뒤부터였다. 더욱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서재필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동북부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연합대회를 주도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서재필은 1921년까지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이 얼마나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이 때의 공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차원을 벗어나 서재필이 전 재산을 이 활동에 쏟아 부어 무일푼이 되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런 신화는 서재필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 오히려 당시의 기록을 통해 재미 동포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 헌신적인 모금 운동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2천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 활동 자금을 전적으로 자기가 댔다는 서재필의 회고는 과장이다.
더욱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최근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
그는 자기가 미국인임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하와이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
그가 조선인들에게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는 것이 있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
서재필은 스스로 미국에 묻히기 원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의 건의를 받아 들여 83세의 고령인 그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1947년 7월에 도착한 그는 이때에도 자기를 필립 제이슨이라 하였고 모든 발언은 영어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를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미국 국적이 문제였다. 그는 대통령 추대 운동자들로부터 미국 국적 포기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누구나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후대 사람들이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는 사실상 고인의 뜻에도 위배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사소하지만 틀린 사실들
첫째, 그는 18세 때 장원급제한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인 1882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최연소 합격자이기는 하지만 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원급제는 甲科 1등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그가 다녔다는 도야마(?山) 육군학교는 일본 육사의 전신이 아니다. 이 학교는 하사관학교로서 사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셋째, 이와 아울러 신문 대담에서는 서재필이 의대생 시절 암스트롱양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결혼했다고 하면서, 장인은 미국 연방 정부의 초대 체신부 장관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했다는 근거는 제시된 바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인 조지 암스트롱은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이자 초대 국장이었을 뿐이며 서재필이 암스트롱양과 결혼하기 전인 1871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에는 신부의 어머니가 화이트라는 사람과 재혼한 상태였다.
그러니 장인인 문방구를 처분하겠다는 서재필에게 반발하여 서재필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암스트롱 가문에 이혼이란 없다고 꾸짖었다는 것도 성립될 수 없다. 이혼 요구설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지만 별거상태였다는 것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넷째, 서재필이 의대에서 수석을 했으나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밀려 차석 졸업을 했다는 주장은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병리학 강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학생들에게 보이콧 당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그가 다시 들어간 의대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아니라 펜실베니아 대학이며 특별 연구생이었다.
여섯째, 서재필이 625가 일어나자 자진해서 김일성에 반대하는 방송을 했으며, 그때부터 북한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서재필은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누었을지 언정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었다. 그가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후 고국 땅을 밟은 것은 다 합해서 5년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두번 다 미국에서보다 훨씬 넉넉한 봉급과 지위를 주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여기고 환영하였으며 이 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이를 뿌리치고 자기가 선택한 나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김구는 중국인.
출생지는 태어난 곳이죠.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서 양육을 위해 서재필만 곧바로 논산으로 옮겨감. 논산이 출생지라고 한 건 지자체 띄워주려는거지 출생지는 다르죠.
중국인도 한국 광복을 위해 애국하는데
한국놈이 일본 앞잽이가 되어 매국노질 하는것에 분노 하리라 공감할 거라 생각이 들지 않을 수없읍니다
아직도 일본개 잔당들이 남아서 선동질이네요
굳이 본인 미국인을 자체라고 조국 버린 사람을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여러 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해야 할것 같네요
판단은 개인 몫.
충분한 내용을 알아야 합리적인 판단이 되겟죠
이승만이나 김구보다는 당시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가능했던 인물이었죠.
헐 서재필 하고 우리 집안이 관계가 있는 듯 하네요.... ㄷㄷㄷㄷㄷ
달성 서씨면 그렇죠. 당시 개혁파인 서광범도 서재필이랑 같은 집안이에요
고종을 호휘하며가 아니라 정변의 성공을 위해 왕의 신병확보를 목적으로 옮긴 것 아닌가요. 이 때문에 궁에 일본군을 주둔 시키는 등 일본과 결탁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한거구요
갑신정변 주동자 입장에서는 호위죠. 그리고 이 때 일본의 힘을 빌리는 걸 친일파라고 할순 없어요. 어쨌건 당시에는 일본이 앞섰던건 자명했던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한게 아니라 청나라 개입으로 실패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