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수준의 일반적인 세계사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보통 476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어린 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한 해입니다. 그런데 사실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고,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건재히 살아남았습니다. 심지어 서로마의 시체 위에 탄생한 게르만 왕국들은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였고, 그의 대리인의 자격으로서 통치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왕국들이 중국천자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듯이 고트족, 프랑크족 등 또한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였고 그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게르만 왕국들은 물론 완전한 자치를 누렸고, 그들은 대게 동로마 황제의 명령이나 요청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정복자들은 자기들이 차지한 영토에서 소수였고,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는 현지의 로마인들의 협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법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수도교를 고치고 성당을 보수하고 또 원형극장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민족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 현지 한족들과 동화된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옛 로마강토(스페인, 프랑스)에서 게르만어가 라틴어를 결국 대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과거와 같은 찬란함을 뽐낼 수 없었지만, 로마세계의 근본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교통루트, 스페인에서 터키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시스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생활, 그리고 기독교를 매개로 한 공동체 개념 등 말입니다.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한 고트족의 대왕 테오도릭 또한 사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8세부터 18세까지 인질생활을 한 인물로 "로마적인 것(Romanitas)"를 몸소 체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과거에 비해 훨씬 약화된 게 사실이었고, 당대 로마의 엘리트들은 본인들이 살던 시대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었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로마의 황제는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할 사명(Make Rome Great Again)"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이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입니다.
(유스티니나누스 대제 모자이크, 라벤나 성당)
그는 로마의 부흥을 위해 지금껏 인류가 보지 못한 대성당을 지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거룩한 지혜라 불린 이 대성당은 로마의 판테온을 모티브로 하여 그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화려하게 지은 고대 건축물의 신비였습니다. 유럽이 이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을 짓기까지 무려 천년이나 지나야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건축기간이었습니다. 단 5년... 비현실적인 속도입니다. 중세 대성당들이 짓는 데 평균적으로 200년 정도 걸렸던 던 걸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속도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기적에 가까운 속도입니다. 그런데도 압도적인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한 성당이었고,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성당을 짓고 나서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죠. 수백년 후에 이곳을 방문한 러시아 사절단 또한 "천국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분명 이런 곳에 거주할 것이다"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유스티니아스는 건출물과 같은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다시 쌓아오렸습니다. 그는 역대 로마황제들의 칙령과 법해석을 집대성하여 로마법대전을 편찬했습니다. 로마법대전은 법이론과 판례 그리고 칙령등을 모아놓은 문서로 로마법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모음집입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의 가장 야심찬 사업은 당연 "로마 고토회복"이었습니다. 그는 지중해세계를 다시 로마의 확고한 지배 아래 두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페르시아와 먼저 평화를 맺고,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놀랍게도 성공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최전성기
사실 로마제국의 가장 생산적인 지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안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록 브리타니아(영국)과 갈리아(프랑스)는 회복하지 못했어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을 회복한 것만으로도 사실상 로마를 거의 재통일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서기 541년 라벤나 탈환은 아주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죠.
역사가 여기까지만 진행되었다면 유스티니아누스는 명실상부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로마 최고의 황제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행운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그는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이 단 한 세균의 장난으로 모두 무위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14세기 유럽을 초토화시킨 흑사병의 원인이 된 병균입니다. 이 병균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 확실한 정설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신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중앙아시아 또는 중국에서 발원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전염병이 처음 보고된 것은 라벤나 탈환과 같은 해 541년 이집트에 위치한 펠루시움이란 도시에서였습니다. 고대로부터 무역항으로 명성이 높았던 도시로 과거 카이사르와 자웅을 겨루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또한 이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처음 기록된 것이 펠루시움이지만, 다른 도시에서도 이미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비행기를 통해 전염병이 순식간에 전세계로 번졌듯이 과거에는 주요 항구 등을 통해, 무역 네트워크와 대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이는 로마 입장에서 특히나 치명적이었는데, 로마는 당대 그 어느 문명보다 도시화율이 높았던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요 도시들도 대부분 지중해 해안을 따라 탄생한 항구도시들이었죠. 이에 로마의 뉴욕이라 불릴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서기 542년에 이르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전염병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프로코피우스와 같은 당대 역사가는 하루에 수만명이 죽고 시체가 산을 쌓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대의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수치는 물론 온전히 믿을 수 없고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특히 현대와 같이 의학기술이 발전한 세계에서도 전염병을 통제하기 어려운데, 고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어떤 학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당대 인구의 1/3이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전염병이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에 미친 영향은 실로 거대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로마제국 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던 이집트가 괴멸적 타격을 입었던 게 컸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세수와 병력도 감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국방과 행정을 위한 자원은 계속 필요로 했으니 유스티니아누스는 무거운 세금을 계속 부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다시 악순환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역, 농업생산, 공산품생산, 병력동원 모두 감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현대사회도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는데, 고대 세계에서의 피해는 더욱 더 컸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전염병의 결과 541년 승리할 것만 같았던 이탈리아 재정복 전쟁의 전황도 불리하게 돌아갔으며, 결국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다가 서기 554년에 가서야 종결되었습니다. 비록 유스티니아누스의 승리였지만 상처뿐인 승리였고, 로마는 다시 그 힘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역병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로마제국은 후일 페르시아 상대로도 국가가 존망을 가르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곧 이어 새로이 부상한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제국의 알짜배기 영토였던 레반트와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도시화율이 낮았던 게르만 사회가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세계를 상대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로마의 대주교(교황)은 결국 이들 게르만족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부활하지 못했지만 그 잿더미 위에 게르만족과 살아남은 로마유민(가톨릭 교회)이 손을 잡아 유럽을 탄생시켰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만약 이 팬데믹이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재밌네요.
항상 즐거운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로마의 적통 수준이 아니라 사실 로마 그 자체인 비잔틴이 일부 사람들에게 그리스인의 제국 등의 표현으로 멸시당하는 이유의 일부이겠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황제임을 모두 인정함에도 그가 남긴 로마 노바로의 천도는 인정하지 않으니.. 그나마 글에 언급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업적으로 로마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나 했지만 역병으로 인해 휘청거렸고 끝내는 로마의 대주교좌와 로마 노바의 대주교좌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로마는 중세 내내 서방세계의 주류가 아닌 변방에 머물게 된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번에 불펜에서 로마는 위생이 좋아서 전염병 따위 한번도 없었다고 박박 우기던 사람 기억나네요.
안타깝네요 하필 전염병이 그 시기에...대성당을 그렇게 빨레 지을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네요 기술과 자금력의 승리인가
성소피아 성당을 보고 그 옛날에 이런 건축물을 지은 것에 경외감을 느꼈는데 그게 5년 만에 지어졌다구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관련한 사후의 일화가 있죠.
13세기 십자군이 제국을 정복했을때 황제들의 무덤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이 자행됩니다.
그중 유스티니아누스의 관을 부수자 내부에서
살아있는듯 생생한 모습 그대로의 노인이 드러났다는군요.
공기 밀폐나 소독 처리의 결과일텐데
십자군조차도 특히 사제들은 그가 누구란걸 알았기에
놀라 허겁지겁 존경의 뜻을 표한후 서둘러 금은보화를 챙겨 가버렸죠.
시신이 어디에 재매장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와 관련해 카톨릭이 동서교회 분열기 이전 황제와 그후 황제를 구분하는 의식이 있었으리란 주장도 나왔었죠.
엠팍에서 이런 글 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네요, 감사합니다
맨날 N팍글이 좌담 오르는 것보고 짜증나서 안들어왔는데, 정말 간만에 빛과같은 글을 올려주시네요..
잘 보고가요
journeyman// 뜬금 사이트 비하?
식음수 흘려보내는 파이프를 납으로 만들어서 중금속 중독도 한 몫 했다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