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가 돌아오니, 종들이 흙을 파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무덤과 같았다.
이자는 어리석은 체하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집 안에다 무덤을 만들었느냐?" 하니, 종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무덤이 아니라 토실입니다." / 하기에,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 하였더니,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들에게 편리하니, 아무리 추울 때라도
온화한 봄 날씨와 같아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므로 참 좋습니다." 하였다.
이자는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여름은 덥고 겨울이 추운 것은 사시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만일 이와 반대로 된다면 곧 기이한 것이다.
옛적 성인이,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만한 준비가 있으면 족할 것인데,
다시 토실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바꿔 놓는다면 이는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은 ~
(중략)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이것은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뜻이 아니다.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더니,
종들이 두려워하여 재빨리 그것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땔나무를 마련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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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노비들이 과일 보관하려고 땀흘려 방한창고 만듬
2. 주인이 하늘의 이치가 어쩌고 하면서 맘에 안든다고 때려부숨
3. 크흡 나 좀 멋진듯(흐뭇)
이런 등신들이 상전이랍시고 윗대가리로 설치고 다니니 민란이 끊이질 않지.
나도 국어시간에 이거읽으면서 이게 뭔소리지 하고 읽음ㅋㅋ
털옷 입고 베옷 입는 건 이치에 맞고 토실 만드는 건 이치에 안 맞고 이야 이게 바로 코걸이랑 귀걸이네
저런놈들때문에 발전이없엇는거같다
지는 따뜻한 방안에서 저 글 씀 개새2끼
나도 국어시간에 이거읽으면서 이게 뭔소리지 하고 읽음ㅋㅋ
ㅋㅋ
꼰대
이규보는 그냥 무신정권에 붙어산 진드기 아니냐
저런놈들때문에 발전이없엇는거같다
이런 등신들이 상전이랍시고 윗대가리로 설치고 다니니 민란이 끊이질 않지.
3스타 같은 놈
털옷 입고 베옷 입는 건 이치에 맞고 토실 만드는 건 이치에 안 맞고 이야 이게 바로 코걸이랑 귀걸이네
지는 따뜻한 방안에서 저 글 씀 개새2끼
이규보네요. 슬견설 읽을 때도 뭐야 이 똘아이놈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보통 진상이 아니었군요.
지 편하라고 만드는건데 진짜 ㅋㅋㅋㅋ
지금도 꼰대는 답이 없는데 저때는 대부분이 다 슈퍼 꼰대였잖아..ㅂㄷㅂㄷ
본시 사람은 옷자체가 없이 태어나는데 왜 옷을 입는지는 절대 안따져요
멍청한 꼰대가 상전이라고 모셔주니 똥오줌 분간 못하네
저 양반이 동국이상국집이랑 동명왕편 쓴 이규보
그나마 강직하다고 평가받는 사람 마인드가 저따구였으니
지는 겨울에 나무 왜 때냐
와 타임머신타고 저놈 끌고와서 존나게 밟아버리고 싶다...앰이 없구만
지금 시대에도 저런 집단이 있지, 안예모라고...
어휴 동방탈레반새끼들 ㅋㅋ
고려가 아니라 조선시대 같은데 유명한 성리학자 일화
이규보는 고려의 문신입니당
이자는 어리석은 체하며 말하기를, = X
진짜 어리석은 새끼 = O
꼰대 쓰레기 새끼
저래놓고 자뽕에 취해 저 글을 따닷한 방에서 적었을것 같다. ㅋㅋㅋㅋ
후세사람들이 이런 일화를 읽으면 날 더욱 존경할거야! 이러면서
하여간 문과 뿅뿅들...
저러고 땔감은 왜구해
대학에서 한국사 배울 때 교수님 왈
"니네들 지금부터 성리학이 뭔지 가르쳐 줄 건데, 장담컨데 10분 만에 다 졸거다"
-정말로 10분 후 반 수가 졸음-
그런데 그 졸린 와중에 배운 내용이
저 이규보가 하는 말의 맥락과 맞아 떨어짐
성리학이라는 거 자체가 유학을 유교 수준으로 격상 시킨 것으로
만물에는 해당하는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에 맞게 운용해야 한다는 사상
과거 공자 맹자의 인의예지를 거기에 접목시켜서 해설하고
나아가서 사람 뿐만이 아니라 사물도 거기에 맞게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
저기서 사계절 날씨에 반발하여 보온창고를 짓는 것도 사계절의 이치에 반하는 행동이니
허물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 성리학과 맞닿은 이해임
물론 이후에는 그런 이해도 사람들을 거치며 발전하여 (이이, 이황 등등)
지금 우리들이 봐도 딱 짚을 모순들 (그럼 이치에 어디까지 순응해야 한다는 기준이 자의적이 아닌가?)도
보완이 되어 가지만, 어쨌든 고려 중후기의 성리학 자체가 저런 성격을 띈 것은 사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