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설 연휴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사자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불펜에 진작 소개한 바 있는 유명한 다큐 시리즈 “Africa's Hunters”의
두 번째 시즌 세 번째 에피소드 “Kings of Nsefu”입니다.
아마 제가 작년에 올렸던 ‘막둥이’라는 아기사자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 녀석 말입니다.
이 막둥이의 아버지들인 두 마리의 수사자 형제가 오늘의 주인공들입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잠비아로 가보자.
이 나라에는 사우스루앙과 국립공원이 있다.
오늘은 이곳에서 지내는 사자들의 이야기다.
여기 수사자 두 마리가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며,
한 프라이드의 리더이자 보호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 끈끈한 우애를 지닌 형제다.
루앙과 협곡의 왕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이른 아침,
한 무리의 사자 가족이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다.
루앙과 협곡 일대를 지배하는 은세푸 프라이드다.
은세푸 프라이드를 이끄는 것은 수사자 형제 두 마리다.
그들은 3년째 은세푸 프라이드와 루앙과 협곡을 통치하고 있다.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함이 없다.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순찰을 돌며,
영토와 가족의 안위를 살핀다.
덕분에 그들의 처자식들은 안심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자식들 중에는 불페너들에게 친숙한 막둥이도 있다.
그들이 이런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데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견고한 우정이다.
이 쌍둥이 형제는 함께 태어난 이래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둘 중에서도 리더는 치프(Chief)다.
보다 자신감 넘치고 용맹한 그가 사실상 형 노릇을 한다.
놋치(Notch)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고 차분한 성격이다.
그는 형의 리드를 기꺼이 따르는 충실한 조력자다.
그들 왕국의 영토는 매우 광활하며,
루앙과 강이 서쪽 국경선이 되어준다.
치프는 오늘 아침도 강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며,
이곳의 왕들이 건재함을 분명하게 알린다.
오늘도 평화롭다.
하지만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침입자는 언제나 있다.
오늘도 떠돌이 수사자 한 마리가 강기슭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침입자가 문득 긴장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치프가 토하는 사자후가 들려온 것이다.
아직 어린 침입자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은세푸 왕국의 평화는 이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은세푸 왕국의 서부 국경선인 루앙과 강.
그 강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계절이 건기로 바뀌어간다는 뜻이다.
건기가 다가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형제의 가장으로서의 책무가 더욱 막중해진다.
물이 부족해지면 초식동물들이 강으로 모일 것이며,
경쟁적인 떠돌이 수사자들이 그 뒤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치프와 놋치 형제는 당분간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할 거란 얘기다.
막둥이와 형제들은 이제 고작 한 살일 뿐이다.
그들의 미래는 두 형제가 보호자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은 지난 이야기에서 아기 막둥이를 괴롭혔던 손윗 형들이다.
그들은 어느덧 세 살이 되어 독립을 코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육아는 물론 암사자들의 몫이지만,
수사자 형제의 보호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치프와 놋치는 영토 순찰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점점 가족들 곁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난다.
자리를 비운 형제 왕들 대신 다른 존재가 프라이드를 방문한다.
혹멧돼지다.
물론 혹멧돼지는 좋은 사냥감이다.
제 발로 걸어온 식량을 향해 암사자가 돌진한다.
하지만 혹멧돼지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돼지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줄행랑을 친다.
다른 암사자들도 뒤늦게 거들고 나서지만,
혹멧돼지는 카메라가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결국 암사자들은 허탕을 치고 만다.
다시는 돼지소닉을 우습게보지 말자.
하지만 암사자들의 사냥은 중단되지 않는다.
사냥감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눈앞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푸쿠들처럼.
암사자들이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또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진다.
표적이 된 푸쿠는 강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도모하려 한다.
암사자들은 일견 추격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무리에도 유독 집요한 개체가 있게 마련이다.
은세푸 프라이드도 마찬가지다.
과감히 물속에 뛰어든 암사자가 기어이 푸쿠를 덮친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저녁거리를 운반한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드는 불청객이 있다.
악어다.
암사자와 악어 사이에 힘겨루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악어가 한 마리 더 가세하자 암사자가 결국 물러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세푸 가족들이 떼로 몰려온다.
사자들은 쪽수 싸움에서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한다.
두 번째 훼방꾼, 하마다.
원래도 사자를 싫어하는 하마들이,
자기네 영역으로 사자들이 들어오는 걸 환영할 리 없다.
결국 입맛을 다시며 쫓겨나는 은세푸 가족.
공연히 악어들 좋은 일만 시켜줬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한 살짜리 어린 수사자 한 마리가 강 건너편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굼뜨고 소심한 걸로 보아 이 녀석이 바로 막둥이인 것 같다.
막둥이가 강물에 발을 적시며 이빨을 드러낸다.
몹시 두렵다는 뜻이다.
그런 막둥이에게 어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주는 것.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결국 막둥이가 용감하게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어미는 꼼짝도 않은 채 나직한 소리로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엄마의 응원에 고무된 막둥이가 한층 맹렬하게 물을 첨벙인다.
결국 무사히 강을 건넌 막둥이가 어미에게 다가간다.
막둥이는 여지껏 늘 그래왔다.
항상 느리지만, 끝내 엄마를 실망시킨 적은 한번도 없다.
은세푸 가족들이 이처럼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니,
순찰을 마친 아버지 형제가 무사히 귀갓길에 올랐다.
치프와 놋치는 3년째 은세푸 프라이드를 다스려 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동안 왕국의 영토는 꾸준히 넓어졌고,
그에 따라 순찰은 점점 버거운 일이 되어간다.
결국 형제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한다.
둘의 역할을 따로 나누는 것이다.
둘 중에서 더 용감하고 적극적인 치프.
그가 루앙과 협곡의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른다.
혼자서 영토의 먼 외곽까지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치프의 떠나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놋치.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과 떨어져본다.
놋치는 근거리를 지키며 가족을 돌보기로 했다.
단 둘이서 거대한 왕국을 지켜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며칠이 지났다.
형제 왕들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세푸 가족들은 한가롭게 낮잠을 즐긴다.
그런데 문득 암사자 하나가 잠에서 깨어 날카롭게 눈을 빛낸다.
어디선가 낯선 수사자들의 포효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 살짜리 아성체도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그보다 한참 어린 막둥이와 그의 형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성체가 된 맏딸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는 여태까지 첫 경험을 하지 못했다.
사자들은 되도록 근친상간을 금하는데,
그녀 곁의 성체 수사자는 아버지들뿐이기 때문이다.
낯선 수사자들의 등장은 가족에게는 큰 위협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첫 경험을 할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가족들 곁에 머물고 있던 놋치도 이 낯선 사자후를 들었다.
놋치가 침을 흘린다.
이는 그가 몹시 긴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언제나 형에게 의지해왔다.
형 없이 홀로 적들과 싸운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일단 그 날은 별일 없었다.
놋치는 들개들이 기껏 잡은 먹이를 뺏어먹기도 했고,
(들개들: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의 세 살짜리 아성체 아들은
표범이 나무 높이 널어놓은 먹이를 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아무튼 별일 없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된 치프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빼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놋치가 형을 마중하러 나선다.
소심한 놋치라기엔 이례적으로 적극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그에겐 치프가 소중하다는 뜻이다.
놋치가 언덕에 올라 먼 곳을 내려다본다.
평소라면 혼자 갈 엄두조차 못낼 정도로 먼 곳이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언덕을 내려간다.
지금 그에게 형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나 가도 가도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 걷던 놋치가 큰 강을 만나 머뭇거린다.
건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이 깊고,
사자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하마들이 세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놋치는 더 망설이지 않고 강을 건넌다.
형을 찾아야 한다.
결국 놋치는 형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는 엄청난 용기를 냈다.
그토록 큰 용기를 낸 보람이 있었을까?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의 형이 있었다.
치프는 무사했다.
단지 피곤해서 쉬고 있었을 뿐이다.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한 형제는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급기야 놋치는 형을 베개처럼 베고 눕는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이들의 우정은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다.
그 위에,
힘들었던 방랑기를 넘기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고
가족들을 지켜온 오늘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겨온,
수사자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전우애가 더해진 것이다.
수사자들이 편하게 놀고먹는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매우 어리석은 소리다.
그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있다.
그들의 삶은 몹시 치열하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진다.
야행성 동물인 사자들의 시간이다.
아성체 사자들은 웬일인지 사냥 훈련에 열중했고,
형과의 재회로 한결 마음이 푸근해진 놋치는
모처럼 우두머리 암사자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타고난 리더인 치프는 다르다.
고작 반나절의 휴식만 취한 치프는
아직 돌아보지 못한 영토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이윽고 그는 우렁찬 사자후를 토해내며
동쪽 국경선을 살피러 다시 순찰을 나선다.
그러나 치프가 동쪽으로 떠난 까닭에,
왕국의 서쪽 국경지대인 루앙과 강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낯선 떠돌이 수사자 두 마리가 그 틈을 파고든다.
침입자들이다.
아직 갈기도 덜 자란 이 풋내기 수사자들은
첫 도전의 무대로 은세푸 왕국을 골랐다.
젊은 침입자들은 조심스레 왕국의 동태를 살핀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다른 수사자의 기척이 없다.
동쪽으로 떠난 치프는 물론 놋치도 아직 그들의 침입을 모른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들이 비로소 큰소리로 포효한다.
눌러앉겠다는 뜻이다.
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건기가 지속되며 작은 물웅덩이들이 다 말라버리자,
버펄로 등 초식동물들이 강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탐스러운 식량덩어리들을 따라 떠돌이 수사자들도 몰려올 것이다.
버펄로 무리가 서쪽 국경의 루앙과 강을 북새통으로 만들던 바로 그때,
동쪽 국경에서는 치프가 순찰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얼굴에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며,
그 어느때보다 지치고 힘든 기색이다.
홀로 순찰하는 그의 뒷모습이 전에 없이 쓸쓸해 보인다.
며칠이 지났다.
놋치는 여전히 가족들 곁을 지키고 있다.
놋치는 초조한 기색이다.
응당 돌아왔어야 할 형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낯선 수사자들의 포효가 들려오고 있다.
그는 아직 형 없이 홀로 적들과 싸울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다른 가족들도 낯선 사자후를 들었다.
아직 숫처녀인 맏딸도 마찬가지다.
맏딸이 무의식적으로 낯선 사자후를 향해 움직인다.
그녀는 사자후의 주인들이 가족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통제하기 힘든 본능이 그녀를 이끈다.
이윽고 사자후의 주인을 발견한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다.
젊은 침입자도 그녀를 봤다.
그는 포효를 멈추고 그윽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린다.
이윽고 암수상열지사가 치러진다.
암사자에게도 수사자에게도 모두 첫경험일 것이다.
거사를 마친 암사자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간다.
그녀는 욕구를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족을 등질 생각은 전혀 없다.
수사자 또한 현타가 온 듯 멀거니 앉아 있다.
침입자들은 프라이드를 통째로 노릴만한 배짱이 아직 없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치프가 있었거나 놋치가 엄한 아비였다면,
맏딸의 일탈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녀의 첫경험은 명백한 위험 신호다.
몇 주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런데 대체 웬일인지 치프가 돌아오지 않는다.
놋치는 매일처럼 형이 떠난 방향을 바라본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
형은 왜 안 오는 걸까.
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놋치는 가장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틈틈이 가족들 곁으로 돌아와 처자식의 안위를 살핀다.
그는 분명 자상한 아버지다.
그러나 지금 가족에게 필요한 건 자상한 아빠가 아니다.
믿음직한 보호자다.
놋치도 그걸 알고 있다.
형이 사라진 후 확실히 그는 풀이 죽었다.
그런 놋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우두머리 암사자.
그녀의 눈길이 몹시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문득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들어 있다.
치프가 떠나던 밤에 놋치와 동침한 결과다.
임신 중인 우두머리 암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녀가 향하는 곳은 젊은 침입자들의 포효가 들려오는 곳이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서,
몸을 허락한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선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이것은 가짜 교미다.
그녀가 몸을 허락했으므로,
젊은 침입자들은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모를뿐더러,
막둥이 등 어린 사자들을 해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비책이다.
보호자로서 놋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 달이 지나갔다.
하지만 치프는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른다.
그리고 놋치는 젊은 침입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한 왕은 사라졌고, 또 한 왕은 무능하다.
은세푸 프라이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성체들과 어린 사자들은 진즉에 꽁꽁 숨어버렸다.
놋치가 침입자들을 쫓아내지 못하니 스스로 살 길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경험 많은 암사자들마저 떠나가려 한다.
그녀들은 그동안 형제의 수족과 같았다.
놋치는 그녀들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차마 붙잡지 못한다.
그는 버림받았다.
은세푸 프라이드는 와해되었고, 놋치는 외톨이가 되었다.
며칠이 또 흘러갔다.
그동안 꼬박 굶은 놋치는 먹을거리를 찾아 어두운 옛 영토를 헤맨다.
그의 왕국은 무너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소심한 그는 무서운 하마와 코끼리를 피해 도망치기 바쁘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신세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행운이 찾아왔다.
성체 버펄로 한 마리가 진흙탕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것이다.
실로 커다란 공짜 식량이다.
그러나 소심한 놋치는 그 행운을 거머쥘 용기조차 없다.
강둑 위에 서서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다.
아침이 밝았다.
놋치는 여전히 강둑 위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
운 나쁜 버펄로는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고,
운 좋은 악어들이 실컷 배를 채우고 있다.
놋치는 자기 것이 될 뻔했던 식량으로 남들이 벌이는 만찬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다.
그때 문득 강 건너편에 다른 사자들이 나타났다.
이웃 왕국을 다스리는 프라이드다.
이들은 세 마리의 강력한 수사자들이 이끌고 있으며,
총 22마리로 구성된 대형 프라이드다.
그들의 등장에 탐욕스런 악어들조차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아직 많이 남은 먹이를 버려둔 채.
이웃 사자들은 원래부터 자기네 만찬이었던 듯 게걸스레 먹어댄다.
숨 죽인 채 그들을 훔쳐보는 놋치의 심경은 복잡하다.
한편으론 두렵고, 다른 한편으론 부럽다.
그때 식탐을 다 버리지 못한 악어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우두머리 수사자가 남은 사체를 끌고 강둑으로 올라간다.
아무리 찌꺼기라도 악어들에게 내주기 싫다는 뜻이다.
놋치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이웃 왕은 혼자 힘으로 강둑을 거의 다 올라갔다.
실로 대단한 수사자다.
악어들은 분통이 터지겠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이웃 왕은 가족들을 데리고 여유롭게 사라져간다.
그는 놋치에게 왕의 처신이란 어떤 것인지 생생히 보여줬다.
이웃 프라이드가 떠난 후에도 놋치는 여전히 가만히 있다.
그 자리에서 굶어죽기로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다.
하지만 놋치와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흐르고 건기도 더 심해진다.
따라서 더 많은 버펄로 무리가 강으로 몰려오고 있으며,
그 뒤를 따라 또 다른 떠돌이 수사자들이 흘러든다.
게다가 이번에 온 침입자들은 예삿녀석들이 아니다.
먼저 온 젊은 형제보다 나이도 두 배쯤 많고 몸무게도 두 배는 더 나가 보인다.
그들이 은세푸 프라이드 영토로 몰려온 버펄로들을 바라보며 눈빛을 번뜩인다.
먼저 왔던 젊은 형제는 상황 판단이 대단히 빠르다.
그들은 주저없이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그들은 떠났다.
다시 은세푸 영토로 돌아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남은 것은 새로운 침입자 형제다.
그들은 이곳이 원래부터 자기네 집이었던 양
하품까지 쩍쩍 해대며 여유롭게 지낸다.
놋치는 물론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
치프와 함께였어도 당해내기 힘들었을 적들 앞에 나설 리 없다.
성체 수사자인 놋치가 그러는 마당에,
다른 은세푸 사자들이라고 별 수 있을 리 없다.
다들 꽁꽁 숨어 있다.
자세히 보면 나무 밑에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두 어린 사자들은 막둥이와 그의 형제로 보인다.
녀석들은 위태로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시간이 더 흐르며,
루앙과 협곡에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다.
빗방울을 잔뜩 품은 먹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몰려오는 비구름을 본 버펄로 무리가 줄이어 루앙과 강을 떠난다.
그러자 새로운 침입자 형제도 황급히 버펄로 무리를 좇아 떠난다.
그들은 이곳에 온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은세푸 프라이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놋치와 나머지 가족들이 워낙 꼭꼭 숨어 있던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은 허무할 정도로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났다.
뜻밖에도 모든 침입자들이 거짓말처럼 떠나갔다.
이를 축하라도 하듯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공평하다.
강에서 헤엄치는 하마들도,
모처럼 은신처에서 나온 막둥이도,
가녀린 영양들도,
막둥이의 아성체 형들도,
오늘만큼은 모두 함께 이 빗방울의 달콤함을 만끽한다.
그리고 암사자 한 마리가 비로소 침묵을 깨고 우렁차게 포효한다.
흩어진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제 평화를 되찾았으니 돌아오라는 메시지 말이다.
그 메시지에 응답하듯 은세푸 사자들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은세푸 가족이 다시 뭉쳤다.
이 얼마만에 보는 정겨운 모습인가.
그러나 예외가 있다.
바로 놋치다.
그동안 가족을 방치했던 놋치는 그들에게 돌아갈 면목이 없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홀로 돌아다니며,
코끼리 같은 강자를 피해 구차스럽게 지낸다.
그의 멘탈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날 밤, 강에서는 만찬이 열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물에 빠져죽은 코끼리 사체를 향해 악어 떼가 새카맣게 몰려든다.
그 만찬장에 불청객이 하나 찾아든다.
며칠째 굶주려 아사 직전에 있는 놋치다.
둥둥 떠 있는 코끼리 사체를 향해 놋치가 성큼성큼 물속으로 발을 디딘다.
너무 굶주린 나머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공격하기 위해 악어들이 다가온다.
어쩌면 그들은 놋치를 더 신선한 고기쯤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놋치는 개의치 않고 식사를 시작한다.
악어들이 다가오자 물을 크게 튀기며 싸운다.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용기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악어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그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싸운다.
실로 장관이다.
위대한 치프조차 이런 용맹을 보여준 적은 없다.
그가 일으킨 소동에 짜증이 난 하마가 다가오지만,
놋치의 시퍼런 서슬에 놀라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
한껏 기세가 오른 놋치는 기어이 하마마저 쫓아버렸다.
그리고 악어와 하마의 영역에서 홀로 여유로운 식사를 즐긴다.
이는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이 장관을 묵묵히 지켜보던 구경꾼이 하나 있었다.
은세푸 프라이드의 암사자다.
식사를 마치고 강가로 나온 놋치에게 암사자가 다가간다.
하지만 어색하게 바라볼 뿐, 친밀한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다.
그건 놋치도 마찬가지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체취를 맡으며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그러다 문득 돌아서더니 홀연히 떠나간다.
다시 홀로 남겨진 놋치는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지 않았다.
놋치는 분명 달라졌다.
그는 루앙과 협곡의 밤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포효하며,
아직 그가 이곳의 왕임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한참 포효하던 놋치가 문득 시선을 돌린다.
가족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긴장한 것인지 감격한 것인지,
놋치는 말문이 막힌 채로 바라만 보고 있다.
아까 그 암사자의 인솔 하에 정든 얼굴들이 다가오는 것을.
그는 예전처럼 가족들에게 에워싸였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그리운 치프는 이제 없다.
그러나 그 점만 빼면,
모든 것이 옛날과 똑같아졌다.
가족들을 모두 모은 놋치가 아까보다 더 우렁차게 포효한다.
그러자 암사자들이 그를 따라 포효한다.
모든 은세푸 사자들이 함께 포효한다.
극적인 해후를 자축하는 기쁨의 함성이다.
다시 날이 밝았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해가 떠오른다.
치프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건 기정사실이다.
이제는 놋치 혼자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
전망은 대단히 어둡다.
수사자 한 마리가 왕국을 지킨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놋치는 각성했다.
예전과 달라진 그는 최후의 그날까지 꿋꿋이 버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하는 것뿐이다.
부디 그의 고독한 통치가
막둥이를 비롯한 어린 자식들이 무사히 자라서
당당하게 루앙과 협곡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되기를.
* 원본 영상(Africa's Hunters: Kings of Nsefu) *
*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제가 인스타에 사자 전문 계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마포호를 비롯한 전설적인 사자들이나,
사비샌드 사자들의 최근 동향이 궁금하신 분들은
심심하실 때 가끔 들러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7th_mapogo/
[리플수정]재밌는 글, 잘 보고 갑니다^^~ 간만에 양질의 글 읽네요~
숫사자들의 삶은 참 고달프고 처절한 것 같습니다. 끝없이 위기로 스스로를 몰아가야 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 되며 자기 존재증명을 해야 하니까요.
치프는 죽은건가요
치프는? ㅜㅜ
포타비아// ㅎㅎ 감사합니다.
목각인형// 맞아요. 처절함 그 자체입니다.
류딸느님// Audi// 네, 죽었다고 볼 수밖에요... 원본 영상에서는 사람들 사는 마을에 들어갔다가 해를 당한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몰츠용수// 마침 오늘 올라온 사진 하나가 마음을 찢던 차에 이 글을 접해서 그런지 더 먹먹하네요. 작년 가을에 죽은 버밍엄 보이즈의 은수쿠가 죽기 며칠전 사진이 올라왔거든요. 불과 반년전까지만 해도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숫사자로 꼽히던 녀석이었는데 말이죠.
개인적으로 사자라는 동물 갈기가 멋있어서 좋아하는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ㅎ
아.. 놋치 정말이지 고구마 먹다가 사이다 마신 기분입니다. 힘내라 놋치!! 막냉이도 잘 키워줘~~
설 선물이네요. 잘 받았습니다. ^^
목각인형// 버밍엄 애들이 유독 잘생겼죠. 근데 생각보다 일찍 쇠퇴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놋치의 각성이 이리 반가울 수가...
설날특집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하록선정//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숫사자가 2마리 밖에 없는데 왕국을 넓히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요?
다스릴 수도 없는 왕국을 계속 확장하다보면 나중에 순찰도 혼자서 돌다가
각개격파 당하기 쉬울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