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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너의 손...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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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혹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나른한 상태에 있을 때면


 불현듯 머리 위로 작은 손 하나가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자그마한 무게감이 떠나간 후에 멍한 시선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면 멀리 자리에 앉는 너


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너는 종종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의 교실에서나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혹은 나의 농담에 입을 가리고 웃다가도, 너는 까치발을 들고 서서 그 작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나는 가볍고도 부드러운 네 손길이 좋았다. 너의 손길을 거부하지도 별 반응을 보이지도 않


던 내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너는 이빨을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 나는 그런 네 웃음도 좋


았다. 가는 손가락이 앙상한 작은 손도, 하얀 피부 위로 발그랗게 올라온 홍조 띈 볼도, 치켜 


올라간 긴 속눈썹도, 눈까지 덮을 듯 내려온 무성한 앞머리도 나는 좋았다.




  너는 무뚝뚝한 나를 설레이게 하는 단 하나 뿐인 사람이었다. 너의 모든 것은 나에게 와서 


나로 인해 설레임이 되었다. 너의 말, 너의 손짓 하나 하나가 내게는 귀중했다. 나는 남 몰래 


너를 아꼈다. 그것은 조용한 동시에 돌풍과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을 내보이면 그 설레임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아무런 내색 없이 너를


 대했다.




  잘 다녀와, 하고 언젠가 너는 말했다. 너는 조퇴를 하는 내게 그런 식으로 인사를 했다. 말 


실수였는지 아니면 너 나름의 의미가 있는 말이었는지 채 물어보기도 전에 너는 등을 돌렸다.




  나는 조퇴가 잦은 학생이었다. 선천적으로 폐가 좋지 않아 자주 조퇴를 하고 병원에 다녀와


야 했다. 그러한 속사정은 교실에서도 나와 친한 몇명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잘 다녀와. 병


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너에게 느끼는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이면에는 점차 뚜렷해지는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


힌 채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 무심함에 네가 내 곁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해도


 그저 그것으로 좋았다.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임은 내게 다가와 주었으니까.




  잠깐 나가지 않을래? 체육시간, 모두가 떠난 교실에서 홀로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네가 있는 줄 몰랐기에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제법 놀란 모습을 보여야 했다. 뭘 그렇게 


놀라. 너는 또 다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밖에 나가자. 그렇게 말하며 너는 내 넥타이를 잡아


 끌었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이 한창인 교정 안을 너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앞서 걸었다.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


다. 바람이 불자 저절로 이빨이 부딪혔다. 너는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챘는지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사줘.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두 잔 뽑은 뒤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자판기 커피가 학교 안에서도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너는 커피를 마시는게 익숙한지 아무


렇지 않게 뜨거운 커피를 연신 들이켰고 나는 그저 두 손 가득 퍼지는 온기를 그러쥔 채 살며


시 네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맑은 곡선을 그리며 솟아 있는 코의 윤곽이 아름다웠다. 추위를


 머금은 투명한 햇살이 네 얼굴 위에서 반짝거린다. 이쁘다.




  그러다가 돌연 너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해맑게 웃으며 너는 그렇게 말했다. 이내 가슴


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감정을 들키면 이제 두 번 다시 너와 함께할 수 없다. 나


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쓴 커피가 마른 침을 삼키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추듯 네가 말했다.




 너 나 좋아하니?




 숨을 삼킨다. 어느새 싸늘게 식어버린 커피를 든 손이 가볍게 떨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애


써 헛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미쳤냐. 그러자 너는 한껏 짖궂은 미소를 띄우며 계속해왔


다. 말해봐, 좋아하지? 이윽고 너는 벤치 위에 두 손을 올리고는 나에게로 더 몸을 가까이


 했다. 무슨 소리야. 너의 옆 얼굴을 흘낏거리며 나는 반대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빨개졌는지도 몰랐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너의 앞에서 나


는 언제나 무심함과 무감정을 연기하여야만 했다. 그 편이 좋았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러나 끝나지 않는 너의 추궁에 나는 조금 화내는 척을 하기로 했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하


냐. 너야말로 나 좋아하는거 아니냐. 경직된 그 말투에도 여전히 장난스레 웃고 있는 네 얼


굴을 보자 나는 조금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이 분위기는 조금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


다. 이렇게 오랫동안 너의 시선이 내게 머문 것은 처음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하며, 설레였지


만 그만큼 무서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결국 해서는 안되는 말까지 뱉어버리고 만다.




꼭 게이같이 생겨가지곤.




  그리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너는 사랑이기에 앞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젠장. 


뒤늦게 후회의감정이 밀려오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손에 쥔 종이컵에 힘을 주어 구기고


 자리를 박차려던 때였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네가 물었다.




  내가 진짜… 그러면, 너 좋아해도 돼?




  바람이 불었다. 너를 내려다 본다. 너는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있다. 그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다. 가슴의 고동이 어느 때 보다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어쩌면 일방적인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너에게 했던 무심을 가장한 연기들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너를 좋


아해도 되는건지도 몰랐다.




  미안.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나 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줬을지도 모를 그 


말만을 남긴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네가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빈 교실로 돌


아와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나는 체육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을 


때에야 눈을 떴고, 두리번 거리며 네 모습을 찾았을 때 저 멀리서 여느때처럼 웃는 낯으로 옆자


리 아이와 이야기하는 네가 보였다.




  문득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에 있어서도


 너의 마음에 있어서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어떤 순간을 그저 넋놓고 지나쳐 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달리 너는 쉬는시간이 되자 또 다시 평소와 다


름없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주었고, 나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평정을 유지한 채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 졸업식이 되었다. 모두는 쉬이 교실을 떠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


다. 한동안 함께 했던 짝꿍과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머


리위로 턱 하고 작은무게가 느껴졌다. 뒤를 돌자 웃는 얼굴의 네가 보였다. 오랜만의 감촉


에 나는 웃었다.




  너는 의사가 될거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성적이 좋은 너였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될수 있을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하고 네가 물었다. 그 때의 나는 사실 작


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래" 하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 채로 조용히 나를 내려다 본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동안. 이윽고 안녕, 네가 말하며 등을 돌렸다. 너의 작은 등이 교실 문을 나서 사라질 


때 까지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네 모습이 안보이게 되자 어째선지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재빨리 뺨을 훔쳐내고


 이제 마지막이 될 책상 위에 머리를 묻었다. 이 냄새. 많이 그리워지게 될 터였다. 책


상 위 오래된 나무 냄새도, 너의 손도. 너의 목소리도 너의 얼굴도 너의 작은 어깨도. 내게


로 와 설레임이 되주었던 너의 전부가. 곁에 있어도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만큼 아마


 오랫동안 그리움 속에 나는 살겠지.




  잘 다녀와. 하고 책상에 부딪혀 작은 울림이 되는 그 소리를 나는 눈물이 멈출 동안 듣고


있었다. *


 

 

 

 

 

 

 

 

댓글
  • uTorrent™ 2020/01/05 09:58

    문학추

  • 루리웹-8535925889 2020/01/05 10:00

    좋네 잘 읽었음

  • 루리웹-4803459034 2020/01/05 10:03

    남자든 뭐든 떠나서 글이 좋네. 잘 읽고 간다.

  • uTorrent™ 2020/01/05 09:58

    문학추

    (jEJidh)

  • 루리웹-7619749619 2020/01/05 10:00

    남고이야기는 아니죠?

    (jEJidh)

  • 죄수번호-58826974 2020/01/05 10:01

    맞는거 같은데

    (jEJidh)

  • 루리웹-8535925889 2020/01/05 10:00

    좋네 잘 읽었음

    (jEJidh)

  • 죄수번호-58826974 2020/01/05 10:00

    그래서 남학교라는 소리네

    (jEJidh)

  • 루리웹-4803459034 2020/01/05 10:03

    남자든 뭐든 떠나서 글이 좋네. 잘 읽고 간다.

    (jEJidh)

  • 익명_s739Gf 2020/01/05 14:17

    일단 패스~

    (jEJi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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