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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 살면서 경험한 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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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읽기전용으로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의없는 퍼나르기에 강력 대응하겠습니다.


현재는 대학병원을 떠나 병원에서 근무중인 의사입니다.


이글을 보시는 모든분들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일 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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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름다웠던 기억


이곳에도 여름이 오고 있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은 육지보다 따뜻함은 늦게 차가움은 빠르게 왔다. 여름이 온다고 느낀건 어느 주말 산책때였다. 주말엔 혼자 근무하는날이 많았다. 간호사가 자발적으로 남지 않는다면 나혼자 근무하는것이었다. 온종일 환자가 오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해안길을 산책했다.

사람의 때가 타지 않은곳이라 그런지 자연 경관은 육지의 그것과 비교 불가였다. 수십미터의 기암절벽을 쳐다 보기만 해도 아찔해졌다. 정자에 가만히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먹었다. 차가운 바람은 혀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날의 바람은 달랐다. 바람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바람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스치기만해도 기분좋은 따뜻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따라 파도들도 천천히 섬쪽으로 밀려왔다. 몇천년간 파도의 힘에 맞서싸워온 기암절벽. 그 장엄함은 그냥 만들어진것이 아니었다. 미래의 한순간에 내 눈에는 멋진 자연경관으로 보이고 있겠지만 과거에 무수한 기간동안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물이 줄줄새는 아픔을 겪었으리라..

나 또한 현재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지만 미래의 어느시점에 피가되고 살이 되길 기원했다.


따뜻한 바람에 얇디얇은 들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운 꽃이 나타나면 사진을 찍어 ㅈㅅㅇ에게 보내주는것이 낙이었다. 길을 걷다 보지못한 색감이 나타나면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었다. 나는 간절하게 따뜻함을 원하고 있었다. 꽃이 피는만큼 내게도 따뜻한 계절이 올것이며 더 나은 시간들이 올것만 같았다. 

산책동안 듣는 노래들이 있었다. 특히 해안가를 거닐때 듣기 좋은 노래였다. 진료를 보다가도 해변의 냄새와 노래가 생각났다. 일어나 달려가고 싶어질때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탈출구를 만들고 있었다.

노래는 4차원적 힘을 가지고 있다. 분명 귀로만 들었을뿐인데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거닐음과 광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다내음도 느껴졌다. 그섬이 종종 그리워질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그 노래들을 듣곤 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해변 그리고 따스한 바람은 섬생활동안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해변가를 혼자 걷고 혼자 바라보고 또 그 긴거리를 걸어나갈때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그순간이 훼손되지 않게 눈을 감으며 조용히 기억했다. 그때의 과정때문인지 아직도 낙조순간의 해안가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가만히 정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볼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자 섬에서의 울분이 치유되는 과정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오면 곧장 내방으로 달려와 저녁을 준비했다. 나의 주말은 항상 이러했다.






2. 소중했던 인연


섬에는 젊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간호사들은 대개 50~60대 였는데 섬내에서도 젊은 순위로 상위권이었다. 섬에는 육지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파견을 온다. 그곳도 전기와 물을 쓰고 가게도 운영되고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다. 섬에 상주하는 젊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위해 일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종종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웠다. 그곳의 학교에도 젊은 의사선생님이 파견왔다는 소문이 났는지 언제 한번 우르르 물려온적이 있었다. 여자 선생 한분이 감기가 심해 왔는데 대여섯명 되는 동료 선생들이 삼디다스를 똑같이 신고 밖에서 수근대고 있었다. 일단 섬에서 또래를 만나니 반가웠다. 진료 이외에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일이 거의 없었다. ㅈㅅㅇ과의 통화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오면 먼저 반가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 무리는 한명씩 돌아가며 아프다며 보건소에 놀러왔다. 아프다는 환자를 무시할순 없다. 성심껏 진료를 봐줬다.

나도 그 무리가 오면 반가워서 많은 말을 했다. 내가 진료실에서 아끼던 홍차 티백을 그들에게 내려놓으면 작정이라도 한듯 대기좌석에 풀썩 주저 앉았다. 대여섯명이 비슷한 삼디다스 슬리퍼를 신고 꼼지락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대부분 교직 첫해를 섬에서 보내는 그들이었다. 여자선생님들은 대부분 당직을 서지 않고 육지로 돌아갔지만 남자 선생님들은 나처럼 남아 당직근무를 섰다. 종종 맥주 마실일이 있으면 학교선생님들에게 연락해서 마셨다. 다행히 모두가 좋은사람들이었고 섬생활동안 소소한 행복이 되었다. 

나도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 수업도중 아픈 아이가 생기면 바로 달려가서 도와주거나 체육대회 전날 내 사비로 응급키트를 만들어서 선물해주곤 했다. 나는 참 쓸데없는 정이 많았다. 


언제는 여자선생 두명이 배가 아파서 들어왔다. 많은 환자들을 보다보면 기다리는 모습만 봐도 대충 꾀병인지 아닌지 느껴진다. 이들은 꾀병 환자가 분명했다. 분명하더라도 그 모습을 들키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의사를 보러가는것이 얼마나 힘든것인지 나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의사인 나도 종종 다른 의사를 찾을때면 긴장이 되고 주눅이 든다. 하물며 일반인들은 더하지 않을까


약을 받기전 대기석에 앉아 이리저리 쳐다보며 눈 굴러가는 소리가 진료실까지 들렸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약보다 나와의 말이었다. 궁금해서 신기해서 말해보고 싶어서 왔겠지.싶었다. 시덥잖은 질문을 해도 웃으며 대답을 한다. 어색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적당히 다음 대화가 이어질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모르는척 받아준다. 여자선생님들이라고 내가 이곳에 잡아두고 더 말하고 싶어서 이러는것이 아니었다. 이것도 의사로서 질병예방 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돌아갔다면 아쉬운 마음에 연신 이불킥을 했을것이고 그러다 무릎이라도 다치거나 발목염좌라도 당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그들은 튼튼한 발목을 가지고 한주에 한번씩 내 진료소를 찾아왔다. 내 홍차가 맛있다. 간호사님이 주시는 수박이 맛있다. 이런 핑계들을 댔지만 그들도 나처럼 외로움의 아픔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참 귀엽고도 이쁜 교사 선생님들이었다.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낼지?





3. 다양한 인연들


관광철이 되고 많은 관광객들이 섬을 찾았다. 내 환자의 20%정도는 외부인으로 채워졌다. 새벽/밤을 막론하고 응급환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에겐 유일한 의사라는 사명감으로 일했다. 할수밖에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만 우울증에 걸렸겠지만 몇달동안의 근무를 통해 나스스로 살아가야할 방향도 터득했다. 

한밤중에 진료실 유리창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그들의 얼굴을 본적 있다면 없던 사명감도 생겨날것이다. 

무서울때도 있었다. 새벽3시 유리창 두드리는소리에 불하나 없는 건물 아래로 내려가 천천히 렌턴을 비추면 환자인지 범죄자인지도 모를 사람이 떡하니 서있다. 섬은 9시만 되면 암흑천지가 된다. 그속에 혼자 일어나 그들을 상대해야했던 무수한 날들... 한편으론 오죽했으면 그 무서운 길을 뚫고 나에게 달려왔을까?란 생각도 했다. 그런 연민의 감정을 느껴야 평생을 의사로 살수 있다 생각했다.

위험한 적도 많았다. 새벽3~4시에 술에 취해 달려와서 왜 빨리 내려오지 않냐고 나를 죽이겠다고 했던 사람. 치고박고 싸우다 소주병 하나씩 머리에 박고 피 철철 흘리며 들어왔던 두사람. 한명을 먼저 해경보트로 보내니 나머지 한명이 왜 본인을 먼저 보내지 않냐고 무시한다며 내 멱살을 잡았다. 섬에는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ㅎㅎ 나는 당신들이 죽어가는걸 살리러 온사람인데....


그사람들을 상대하며 밤에 편하게 발뻗고 자본적 기억이 없었다. 혹시나 응급환자를 놓칠까 내 벨소리는 가장 크고 쩌렁쩌렁한것으로 설정해놓았고 쉬는날에도 그 벨소리가 들리는날엔 심장이 벌렁거렸다.


흥미로웠던 기억도 있다. 관광용 오토바이를 나눠타고온 여자 두명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주소지가 서울로 뜨는 그들. 설레기 시작한다.(여기서 말하는 설렘이란 큰 의미를 부여할것 없다. 섬은 메뚜기 뒤집어지는 모습만 봐도 자지러지는 곳이다)

한 친구의 친척집에 놀러온 처자들이었고 두통이 심하다고 했다. 궁금했다. 여기와서 무엇을 했는지 재밌는지... 다른곳 아픈곳은 없는지 샅샅이 찾아주고 싶었다. 그들도 참 이상하게 생각했을것이다. 약이나 주고 나가라하면 될것이지 쓸데없이 친절한 의사인건지... 그순간은 굉장히 친절한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고 나는 저녁거리를 사기위해 농협마트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 처자들을 다시 만났다. 오늘 저녁도 결국은 나혼자서 먹어야 했다. 주말은 항상 혼자였고 외로웠다. 괜히 그들과 얘기라도 하면 즐거울것 같았다.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낸건 다름아닌 맥주캔 때문이었다. 그들은 맥주캔을 들고 있었고 그걸 보다마자 재빠르게 맥주 6캔 들이를 들고 나왔다.

그들도 섬에 혼자있는 젊은 남자 의사 선생님이 궁금했을것이다. 같이 맥주라도 한잔하자고 하니 흔쾌히 마시자고 했다.

해변가의 가장 아름다운곳으로 그들을 데리고가 맥주를 마셨다. 순간의 부끄러움은 커다란 선물을 준다. 용기를 내준 내 입과 그리고 재빠르게 맥주를 집어와준 손목 발목에게 고마웠다.

6캔이나 산이유? 나는 맥주를 잘 마셨다. 그 맥주를 다 마실때까진 그들이랑 이야기를 할수 있을테니까....

맑은 바다공기에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시간을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과 재밌게 이야기했다.

이글을 보고 "섬에 놀러갔는데 뜬금없이 의사가 술먹자고 한 썰" "섬에서 공짜로 맥주 마신썰" 등이 올라오길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4. 그녀의 퇴사


내 사랑하는 여자친구 ㅈㅅㅇ. 그녀는 여전히 대학병원에서 힘든 과정을 겪고 있었다. 괴롭히던 수간호사의 정도도 최근 더 심해져 생리불순까지 겪고 있었다. 눈이 뒤집히고 화가 났지만 멀리 떨어진 섬돌이가 해줄수 있는건 없었다. 밤마다 걸려오는 한탄 전화를 잘 들어주고 위로해주는것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서 퇴사 이야기가 나왔다. 퇴사를 고민할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또한 그녀가 고통받는건 보고싶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녀는 2년만에 대학병원을 나왔다. 내가 대학병원을 떠나던 순간이 생각났다. 소심한 복수로 내 가운을 대학병원에 던져놓고 나오던날. 찌질하게 스스로는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녀또한 소소한 승리감을 느끼길 바랐다. 

그녀의 집은 순천이었고 곧바로 모든짐을 정리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삿짐 하나 같이 챙겨주지 못한 못난 남자친구였지만 그녀는 나와 가까워진다며 좋아했다. 그렇다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진것이다.

"섬으로 들어가서 며칠씩 있다가 올까?" 라는 농담이 현실이 될지도 모를일이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됐다. 

나는 아직 마무리짓지 못한 ㅂㅎㅇ과의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섬으로 놀러오기전 해결해야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저 한명의 친구라고 생각하며 연락했다. 이곳에서 100km 근방의 동네친구 하나쯤 만드는건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변명했다.


ㅈㅅㅇ은 오랜만에 여유와 행복을 찾았다. 근심가득했던 얼굴이 어느새 예쁜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원래 예쁘긴했다. 더 예뻐지고 있었다. 수술방에서 슬쩍슬쩍 보이던 그때의 모습이었다. 처음 만나던날 멀리서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던 그녀의 모습..

그녀와 몇달넘게 만났지만 처음의 설렘이 아직도 가득했다.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했다면 단호해야했다. 우유부단한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왜 몰랐을까? 


그녀는 내 휴가기간 외국여행을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도 그녀와의 여행이 기대됐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가고 싶은곳들을 적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


낭만적인 도시 파리에 그녀와 여행을 떠나게 된다.

댓글
  • 나들목슈마허 2020/01/03 01:5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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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상한마음으로 2020/01/03 01:57

    추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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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게앙마 2020/01/03 01:58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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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시작이다 2020/01/03 01:58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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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횐곰 2020/01/03 02:0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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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meslim 2020/01/03 02:2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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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왕5 2020/01/03 03:33

    보배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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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지 2020/01/03 05:31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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